TMI아내의 스페인 & 포르투갈 신혼여행 일기 #5 #바셀 #산하우메성당
L군과 나는 취미이자 업으로 사진을 찍는다. 덕분에 여행에선 언제나 자발적 산책자가 된다. 굳이 산책 스타일을 따지자면 출발지와 목적지는 있지만 정해진 루트는 없는, 언제 목적지에 닿느냐보다 어떻게 목적지로 가느냐가 중요한 편이다. 산책 전에는 지도에 정확한 시작점과 도착점을 찍는 일을 가장 먼저 한다. 시작점에서 출발한 뒤에는 도착점을 향해 걸으면서도 어떻게 하면 길 잃은 산책자가 될까를 고민한다. 대충 이 방향일 거야, 라는 느긋한(?) 산책자의 감에 전적으로 의지한다고 해야 하나. 그러다 보면 우리도 모르 새에 보물 같은 선물을 찾곤 한다.
바르셀로나에 머무는 마지막 밤, 우리는 멋대로 '넓은 범위의 고딕지구'를 명명하고 그 안의 빙빙 돌았다. 사실 고딕지구(Gothic Quarter)만 보기엔 보통 하루에 3만 보 이상 걷는 우리의 여행 욕구가 성에 차지 않을 것 같았다. 원래 고딕지구는 <야밤의 바르셀로나 산책 ; 고딕지구 part 1>에서 설명한 구시가지 중앙에 위치한, 오랜 역사를 보존하고 있는 건축물 거리를 의미한다. 건물 외관과 거리만 볼 수 있는 야밤의 산책을 선택한 우리는 범위를 조금 넓혀 시작점을 시우타데야 공원(Parc de la Ciutadella)과 이어진 바르셀로나 개선문(Arc de Triomf)으로 잡았다. 목적지는 람브라스 거리(Ramblas Street) 중심에 있는 우리의 숙소. 느린 걸음으로 걸어도 30분이면 닿을 거리를 3시간 정도 카메라와 함께 헤맸다.
누구보다 느리게 목적지에 도착하는 일에는 도가 튼 토끼 두 마리는 가이드의 명쾌한 설명 대신 두 다리와 두 눈으로 그곳을 기억하기로 했다. 집으로 돌아와 여행 사진을 정리하면서 안 사실은, 그 와중에 우리는 고딕지구 야간 투어 코스를 대부분 보았다는 것. 거북이보다 부지런한 재주 좋은 토끼 둘이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촬영한 사진들을 보며 그곳이 어디인지 알아보면서 고딕지구를 또 한 번 걸었다.
아침부터 이어진 가우디 탐방에, 오랜 야간 산책으로 지친 내가 "이제 그만 돌아갈까"라는 말을 하기 무섭게 L군이 구글 맵을 켜고 호텔을 목적지로 찍었다. 스페인 시청사와 카탈루냐 자치정부청사가 서로 마주 보고 있는 산 하우메 광장(Placa Sant Jaume)에서 람브라스 거리로 이어지는 페란 거리(Carrer De Ferran)를 따라 걷다가 음악 소리에 잠시 걸음을 멈췄다. 바르셀로나에서 본 다른 성당에 비해 몸체도, 들어가는 입구도 작은 산 하우메 성당(Esglesia de Sant Jaume)에서 미사를 드리고 있었고, 한눈팔기를 좋아하는 토끼 둘은 아름다운 노랫소리에 이끌려 성당 안에 발을 들였다. L군은 따듯한 실내에 만족스러워했다. 그렇게 귀를 살랑살랑 간지럽히는 노랫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시 졸았고, 나는 이 소리를 오래 기억하고 싶어 동영상 촬영 버튼을 누른 뒤 카메라를 바닥을 향해 엎어뒀다.
"노래가 정말 좋았어."
"졸았잖아."
"눈 감고 감상한 거야!"
"감상을 코를 골면서 하지는 않지 않아?"
배를 부여잡고 웃는 나를 뒤로 하고 L군은 머쓱한지 토끼처럼 깡총거리며 숙소를 향해 걸었다. 그 후로 가끔 그날의 소리를 듣고 싶어 화면이 새까만 영상을 튼다. 소리를 듣다 보면 자연스레 우리가 걸었던 고딕지구,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발견한 보물 같은 성당, 그 안에서 졸고 있는 L군, 예쁜 노랫소리에 섞여 든 코골이, 민망해 깡총거리던 L군 뒷모습이 차례로 떠오른다.
*사진에 등장하는 고딕지구 산책 지도 part 2 맵은 가장 하단에 있습니다.
: 건물 외관과 거리만 볼 수 있는 야밤의 산책을 선택한 우리는 범위를 조금 넓혀 시작점을 위쪽 지도 가장 상단에 있는 시우타데야 공원과 이어진 바르셀로나 개선문으로 잡았다. 목적지는 같은 지도 하단에 있는 람브라스 거리 중심에 위치한 우리의 숙소. 느린 걸음으로 걸어도 30분이면 닿을 거리를 3시간 정도 카메라와 함께 헤맸다. 바르셀로나 개선문부터 시우타테야 공원, 라몽 베렝게르 광장, 로마 방어벽, 바르셀로나 대성당, 산 하우메 광장과 페란 거리. 그리고 그 사이사이 우리가 인지하지 못했지만, 둘이 함께 걸었던 수많은 고딕지구의 오래된 역사까지. 사진이라는 고마운 취미 덕분에 우리의 3시간은 조금 더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한 가지 더, 영상에는 취미가 없어 종종 김영하 작가가 활용한다는 녹음으로 그 도시의 소리를 기록해둔다. 나의 기억이 어느 순간에 번쩍 쓰일지 모른다는 글쓰는 사람으로서의 강박이다. 누구에게나 열려 있던 산 하우메 성당은 산 하우메 광장에서 람브라스 거리 방향으로 난 페란 거리 중앙에 위치해 있다. 문을 활짝 열어둔 채 예쁜 목소리로 지나가는 사람들의 걸음을 멈춰 세우는 곳. 스페인어를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그날 그곳의 소리를 담아와서, 그날의 기억과 감정이 더욱 선명해진 것만은 분명하다.
혹시 이곳을 지나게 된다면, 눈과 정신의 피로를 살핀 L군과 귀의 피로를 살핀 나처럼 각자만의 방식으로 잠시라도 힐링을 얻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