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 늦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좋은 시어머니가 되려고 노력할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의젓한 어떤 이는 자기 집에서 개그를 담당한다고 한다. 그이가 더 좋아졌다. 그이는 초등학생 딸아이가 숨바꼭질을 좋아해서 딸이 집에 들어오는 시간에 집안 어디에 숨어 있다고 한다. 하루는 딸을 놀래주려고 아내에게 말하고 종량제 봉투를 들고 아예 밖으로 나갔다. 그이의 딸은 집안을 샅샅이 뒤져도 아빠가 나오지않자 울상이 되었다고 한다. 아이 엄마는 웃음을 참으며 모른 체 했다고 한다. 한참 지나서 아이 엄마의 전화를 받고 집에 들어오자 딸아이는 ‘집 밖으로 나가는 건 반칙아니야?’ 하면서 엉엉 울었다고 한다. 그 상황이 상상이 되어서 나는 그이의 표정이 보이는 것 같았다.
집에서 개그맨이라는 그이가 마흔을 훌쩍 넘은 어느 날 길에서 한참을 울었다고 한다. 어릴 적 가족을 버리고 떠난 아버지를 멀리서 보고 온 날, 초라한 아버지의 모습이 야속하고 서러웠다고 한다. 한 참 후 다시 친구의 말에 용기를 내어 아버지를 만나러 갔다고 한다. 역 근처 국밥집에서 그이의 아버지는 소주잔만 비웠다고 한다. 그이의 글을 읽고 나는 눈이 따끔거렸다. 그이는 가족이 가장 소중하다고 한다. 나도 그렇다.
나는 딸 아이랑 숨바꼭질을 자주 했다. 화장실 문을 열고 그 뒤에 숨기도 하고 침대 옆에 세로로 바짝 붙어서 숨기도 했다. 아이들 방과 안방을 돌아가면서 숨고 맨발로 베란다에 숨어 있기도 했다. 딸아이는 자기가 숨는 것도 좋아했다. 조그만 아이가 어디에 숨든지 금방 찾을 수 있었지만, 한참을 찾는 척 했다. 어느 날 딸아이가 원형 식탁 아래 숨었다. 의자 다리 사이로 몸을 웅크리고 숨었지만 다 보였다. 나는 안방과 아이들 방 그리고 화장실을 찾아보면서 반복해서 작게 말했다.
“어? 어디에 숨었지? 못 찾겠네”
다시 베란다에서 식탁 쪽으로 걸어오는데 딸아이가 쨘 나타나면서 “요깄지” 했다. “아! 깜짝이야” 나는 놀란 척 하면서 웃었다.
나는 아이들이 어릴 적부터 어떤 부탁을 했거나, 아이들이 과자 하나라도 나누어주면, 늘 ‘고마워’라고 말했다. 어쩌다 바빠서 인사를 하지 않으면 딸아이는 “왜 고맙다고 안 해?” 하면서 고개를 갸우뚱한다. 두 아이가 성인이 되었지만 나는 지금도 아이들의 배려와 친절에 고맙다고 인사를 한다.
나는 신혼 시절이 가장 서러웠다. 친구 소개로 만나 데이트를 열 번도 하기 전에 결혼 날짜를 잡았다. 남편도 어쩌다 결혼했지만 사랑하지는 않았다고 두 아이가 성인이 되었을 때도 솔직하게 말했다. 서운해도 어쩌겠나 솔직하게 말하겠다는데.
시댁이라는 울타리에 어쩌다 들어온 나는 이방인이었다. 첫 아이를 낳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시댁 식구가 모였다. 주방에서 모여앉아 식사를 마치고도 한참을 이야기 하고 있었다. 아이가 울자 큰형님이 애 울리지 말고 와서 밥 먹으라고 했다. 식구들이 둥근 상에서 한 걸음 물러 삥 둘러 앉은 가운데 나 혼자 밥을 먹었다. 원숭이가 된 기분이었다.
우리집에 돌아와서 그 상황과 나의 기분에 대해 남편에게 말했다.
“당신이 나를 존중하지 않는데 식구들이 나를 존중하겠어요?”
그 날 이후 시댁에서 모여서 밥을 먹을 때, 남편이 ‘정미씨 식사해요’라고 말을 했다. 식구가 많아서 한 번에 모두 식사할 수 없지만, 고모부님들이 식사를 마치고 자리를 비워주시면 여자들이 뒤 이어 식사를 했다.
우리 시어머니는 말씀이 없으시고 잘 웃지 않으신다. 딸들도 자기 엄마를 무서워했다. 내가 결혼 한 첫해 추석에 어머니와 버스를 타고 시장에 갔다. 어머니 팔짱을 끼고 걸으면서 장 본 걸 들었다. 두부 가게를 지날 때 두부를 사야 하냐고 두 번 물어도 대답 없이 지나쳤다. 장을 보고 집에 돌아와서 인절미에 콩고물을 묻히고 전 몇 가지를 했다. 늦은 오후에 두부 차가 왔다는 스피커 소리가 들렸다. 어머니는 바가지를 들고 나가서 두부 두 모를 사 오셨다. 나는 야속했다.
‘어머니도 참, 마을에 두부 차가 오니까 두부는 안 사도 된다고 말씀해주시면 좋을걸’
우리 시어머니가 쉰여덟 살이었을 때, 나는 큰 며느리로 시집을 갔다. 올해 나는 쉰여덟이다. 나는 며느리를 봤다. 나는 우리 새아가를 만나고 올 때마다 며느리가 귀엽다. 잘 해줄거다. 아들에게도 단단히 일러두었으니 잘할 거라 생각한다.
“너, 남의 집 귀한 딸 눈에 눈물 흐르게 하면 안된다.”
내가 좋아하는 그이는 어릴 적 자신을 버리도 떠난 아버지를 원망하면서 살았다고 한다. 나는 살면서 신혼 시절이 가장 서러웠다. 어릴 적에 주야간 근무하면서도 그렇게 슬프지는 않았다. 어쩌겠는가. 살다보면 살아야하고 살아지는 걸.
용서는 자신을 위한 행동이라는 말을 들었다. 나는 시어머니 간병할 때 말대꾸를 하다가 운이 좋게 ‘우발적 용서’를 체험했다. 나를 멘토라 부르는 그녀는 자기 엄마를 용서하지 못하고 아파한다. 몇 번 시도했지만 그럴 때마다 또다시 상처를 받아서 아예 모른 체하기로 했단다. 열 살 많은 나에게 어떻게 하면 용서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어색한 분위기를 누그리려는 마음에 농담조로 말했다.
“아마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용서할 수 있을걸요? 저도 그런 거 같아요.”
그래도, 늦지 않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