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차피 죽을 텐데 그냥 합시다 우리
여행 도중 두 번의 죽음을 경험했다. 떠나는 비행기에서 신에게 '무료한 인생을 묵묵히 살아내고 있으니 부디 흥미진진한 경험을 하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했는데 그가 아마 내 말을 좀 오해한 것 같다. 내가 원한 건 여행지에서 사랑에 빠지는 것 혹은 우연찮게 멋진 뷰를 발견하는 것 정도였는데. 이렇게나 극단적인 회신이라니.
방콕에 도착했다. 방콕에 한 번도 안 가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간 사람은 없다고들 하지 않나. 교통체증, 나를 벗겨 먹으려는 툭툭 기사와의 실랑이, 축축한 습기. 이 모든 단점들을 무마시킬 정도로 방콕은 매혹적이다. 이 도시는 혼란스럽고 어딘가 살짝 미쳐있는 듯 보이며 극단적이다. 나조차도 새벽 사원에서 온 몸을 가린 채 경건한 태도를 취해놓고 카오산 로드에서는 가장 대범한 옷을 입고 Chang 비어를 마신다. 그리고 나는 그 부분이 마음에 든다. 미지근하고 어정쩡한 것보다야 확실한 게 내 타입이다. 사람이든 도시든.
다섯 시간의 비행으로 무거워진 몸을 이끌고 체크인을 했다. 그리고 여느 때처럼 리셉션 직원에게 뷰가 좋은 높은 층으로 배정을 부탁했다. 당시의 나는 그 사소한 선택이 어떤 나비효과를 불러일으킬지 꿈에도 모르는 순진한 얼굴이었으리라.
그 날 아침. 뭔가 이상한 기운에 잠에서 깼다. 눈을 뜨니 천장에 달린 램프가 미친 듯이 흔들리고 있었다. 상황 파악이 되지 않은 몽롱한 상태로 고개를 돌려보니 행거에 달린 옷들도 마치 폴터가이스트 현상처럼 좌우로 춤을 추고 있었다. 등에서 소름이 돋았다. 지진이었다.
2019년 11월 21일. 하필 내가 방콕의 고층 호텔에서 머물렀던 그 날, 태국의 북부에서 6.1 강도의 지진이 일어났다. 일본에 사는 내 동생은 이 정도 지진을 겪은 걸 가지고 오버한다고 하겠지만, 이는 내 생애 가장 죽음에 가까워진 경험이었다.
만 스물일곱의 나는 평생을 살 것처럼 매일을 살아가고 있었다. 발리 여행은 이번 프로젝트를 마무리하고 떠나야지. 항상 쓰고 싶던 책은 내가 하고 싶은 말이 좀 더 생기면 쓰기 시작해야지. 천만 원만 더 모으고 인도로 요가 자격증을 따러 가야지. 나는 마치 신이 내게 영원을 약속한 마냥 여유를 부리고 있었다. 왜냐하면 젊은 나에게 내일이 오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니까. 하지만 방콕에서의 지진은 죽음이란 항상 그림자처럼 도처에 머무르며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는 서늘한 눈빛이라는 걸 상기시켜 주었다.
그 이후로 여행 내내 죽음에 대해서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 내 병적인 생각이 또 다른 죽음의 경험을 끌어당겼던 것인지도 모른다. 다음 목적지인 끄라비에 도착해 보트를 타고 피피섬 투어를 떠났다. 모든 건 완벽했다. 날씨는 화창했고, 보트에서 만난 말레이시안 커플과의 대화는 즐거웠으며, 스노클링을 하면서 본 바닷속은 눈물겹게 아름다웠다. 돌아오는 길에 거대한 스톰을 만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바다의 변덕스러움은 경험해 본 사람만이 안다. 분명 오 분 전까지 자애로운 미소를 짓고 있던 바다가 히스테리를 부리며 돌변했다. 먹구름이 몰려오며 비바람이 보트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거친 파도를 타느라 작은 보트는 미친 듯이 위아래로 흔들렸고, 그 버거운 반동에 꼬리뼈가 아플 지경이었다.
유난히 시끄럽던 스페인 남자 일행은 이 상황이 즐겁다는 듯 동영상을 찍어댔다. 어디선가 본 장면이었다. 왜 공포영화를 보면 도입 부분에 뭔가 좋지 않은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재미있다는 듯이 이를 농담처럼 받아들이는 사람이 클로즈업되지 않나.
시간이 지나자 선원들의 표정이 굳어졌고 그들은 빨리 구명조끼를 입으라고 지시를 내리더니 태국말로 서로에게 이야기 하기 시작했다. 손님 중 딱 한 명 태국 여자분이 있었는데 그녀가 선원들의 말을 듣고 옆자리에 앉은 남편에게 귓속말로 이야기를 전하더니 얼굴이 창백해지는 것이었다. 이윽고 선미에 앉은 영국 여자는 울기 시작했고 우리 모두는 말과 생기를 잃었다.
그 지옥의 귀환은 무려 40분간이나 지속됐다. 다행히 우리 모두는 무사했고, 선원은 목적지에 도착해 '위험했다면 아마 근처 섬에 정박했을 것이다. 우리는 여러분의 안전을 최선으로 여긴다.'라고 입바른 소리를 했지만 그 말을 믿는 사람은 우리 중에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산발이 된 머리와 영혼을 잃은 표정으로 저벅저벅 끄라비 해변을 걸으며 생각했다. 이건 분명 신이 나에게 어떤 메시지를 보내고 있는 거야.
그러니까 신은 나에게 말하고 있었던 거다. '넌 죽을 거야'라고. 이는 협박도 경고도 아닌 그저 단순한 리마인더였다. 생은 한정되어 있는데 너는 종종 그걸 까맣게 잊고 사는 것 같아. 가끔은 죽음이란 필터를 통해 네 인생을 돌아봐야 할 때가 있는 법이지. 네가 진짜로 이번 생에 하고 싶은 것이 뭔지. 정말 중요한 본질이 뭔지.
두 번 죽음에 가까워진 이후로 내 마음은 한층 가벼워졌다. 내가 악과 기를 쓰며 성취하고자 했던 것들. 괜찮은 어른이 되어야 한다는 압박감. 내 주변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다는 마음의 짐. 이 모든 것들이 꽤나 덧없고 실체가 없는 두려움이라는 걸 깨달았다. 죽음을 생각하면 복잡하던 것들이 참 명료해진다.
죽음을 목전에 둔다면 무엇을 할까 고민해봤다. 그래서 내가 하고 싶은 말들에 대해 지금 당장 쓰기 시작했다. 오지도 않은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는 짓을 그만두었다. 치즈 프라이는 엑스트라 라지로 시키고, 오늘 먹을 치킨을 내일로 미루지 않게 되었다. 찬장에 관상용으로 고이 모셔두었던 웨지우드 찻잔을 꺼내 쓰기로 했다. 그리고 조금 긴 여행을 계획하는 것에 착수했다.
우리는 죽음을 옆구리에 차고 다닐 필요가 있다. 죽음만큼 명확한 인생의 가이드라인을 주는 것은 없으며 그 앞에서 대부분의 것들은 민낯을 드러낸다. 당신은 죽는다. 이 당연한 사실은 우울하게 들리지만 이상하게 용기를 북돋아주기도 한다. 직장을 버리고 떠나야 하는 장기 여행. 짝사랑해온 그 사람에게 내 감정을 고백하는 것. 오금이 저릴 정도로 무섭고 큰 용기가 필요하지만 '아, 어차피 언젠가 죽을 텐데 그냥 하자.'라고 생각하는 순간 인생은 참 단순 명료해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