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째서 내가 가장 사랑한 것들은 나를 가장 힘들게 하는지. 가장 사랑했던 얼굴과 시간들 그리고 나를 가장 행복하게 했던 여행지에서의 순간은 그 황홀이 끝난 후에도 한동안 나를 놓아줄 생각이 없는 듯해 보인다.
여행에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부터 우울이 시작되었다. 태국 남부로 떠난 이번 여행은 유독 운이 좋았다. 날씨는 화사했고, 만난 사람들은 모두 기분 좋은 미소를 띄고 있었으며 음식은 맛있었다. 로맨스 영화의 한 장면 같았던 순간도 있었고, 리조트에서는 독채 빌라로 룸 업그레이드를 받아 아일랜드의 프린세스가 된 기분이 들기도 했다.
너무나 찬란했던, 이미 흘러가버린 그 시간들을 다시 되돌릴 수 없다는 걸 알기에. 이제는 그만 현실을 마주해야 한다는 것을 알기에 심장이 무겁다. 나는 그 시간들을 오래도록 기억해야 할 의무가 있어서 지나간 시간들을 다시 재생하며 그 기억이 바래지 않게 채색하고 덧칠한다. 이러한 글을 쓰는 것도 그러한 연유에서다.
아오낭 비치에서 마지막 석양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차라리 이번 여행이 조악했다면 떠나는 것이 이렇게 힘들진 않았을 텐데. 바보같이 그런 투정을 했다. 멋진 경험을 허락해준 신에게 못할 짓이다.
당신의 인생에서 가장 기억할만한 몇 장면들을 떠올리면 어떤 기분이 드는지 궁금하다. 그 황홀경이 너무나 높아 내려오는 길이 유독 가파르게 느껴지는지. 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골든아워는 이미 지나고 앞으로 다가올 모든 날들은 이와 비교하면 시시하게 느껴질 것이 뻔해 우울한지.
위로가 될지 모르겠지만, 여행 후유증 그러니까 Post Vacation Blues는 사실 매우 흔하다. 당장 주변만 봐도 천국에서의 일주일을 잊지 못해 그곳으로 이민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는 사람부터,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그만 찔끔 눈물이 났다는 사람까지 다양하다.
하지만 어쨌든 우리는 이번 우울에서 살아남아 일상으로 돌아가야 한다. 여행 후유증을 극복하는 방법이 나에겐 두 가지 있다. 첫 번째는 참 단순하게도 빨래를 하는 것이다. 짐을 풀고 치킨을 먹으며 바들바들 떨고 있는 내 영혼을 조금 달래준 다음 빨래를 시작한다. 바다의 소금과 땀으로 가득한 비키니와 야시장에서 산 화려한 무늬의 원피스를 깨끗하게 빨아 넌다. 곱게 걸린 빨래를 바라보며 생각한다. 그래, 사실 잔잔한 일상도 나쁘지 않잖아. 여행지의 황홀만큼 자극적이진 않지만, 잠자리에 들기 전 캔들을 피우는 시간과 깨끗하게 청소된 방에서 킨들을 읽는 시간도 나는 역시 사랑하지. 무엇보다 수수한 일상이 있기에 여행지에서의 모든 것들이 특별하게 다가오는 거잖아. 그러니 돌아온 내 일상을 미워해서는 안 되는 거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국의 언어가 귓가에 맴도는 것 같다면 그때는 다음 여행 계획을 세울 차례다. 끄라비의 작은 바에서 만난 친구가 말한 그 섬을 찾아본다. 날씨는 언제쯤이 좋은지, 바다와 가까운 곳에 위치한 전망 좋은 숙소는 뭐가 있는지. 그리고는 그곳의 사진을 걸어놓고 다음 꿈을 꾼다. 인간은 기대감으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던가. 분명 다음 여행은 이보다 좋을 것이며 나를 새로운 세상으로 인도할 것이다. 그렇게 믿으며 잠을 청한다.
당신의 여행 후유증이 길다면, 그건 그만큼 당신이 멋진 여행을 했다는 반증이니 조금은 훈장처럼 자랑해도 괜찮다. 제일 사랑했던 사람과의 이별이 가장 아프고, 황금 같았던 시절을 뒤로하는 게 어려운 것처럼 여행도 그렇다.
하지만 우리 인생의 가장 멋진 바다는 아직 오지 않았다. 우리가 계속 꿈을 꾸고 다음 여행을 지속적으로 기약하는 한은. 우리에게는 아직 코타오의 해저와 잔지바르의 바람과 페트라의 석양이 남아 있지 않던가. 여전히 쉽지는 않다. 나는 오늘도 낮잠을 자다가 라일레이 해변의 꿈을 꾸었다. 일어나서도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한채 차가운 서울의 한복판에 위치한 내 방문을 열면 마법처럼 그 곳에 있지 않을까 착각하기도 했다. 가슴이 좀처럼 시리지만, 다행인것은 나는 알고 있다는 사실이다. 저릿했던 첫사랑과의 이별을 다시는 극복하지 못할 것 같았던 날 들이 있었으나, 이제는 그가 웃으며 바라볼 수 있는 작품이 된 것처럼 어느 날엔가 이 추억들도 더 이상 아프지 않고 그저 감상할 수 있는 한 폭의 그림이 되리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