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번째 떠드는 글
경험한 적 없는 떡밥을 접하게 됐다
2014년 10월. 덕질을 시작한 지 12년 만에 서울에서 니콜 키드먼을 만난(서울에서 니콜 키드먼을 만났다) 나는 평소보다 덕력이 +100 정도는 되어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시간은 흘러 흘러 어느새 6개월이 지난 2015년 4월. 나는 니콜 키드먼을 향한 덕질을 시작한 이후로 단 한 번도 경험한 적 없는 떡밥을 접하게 됐다. 니콜 키드먼이 오는 9월부터 11월까지 런던 웨스트엔드에서 연극 무대에 선다는 소식을 듣게 된 것이다.
가수나 연주자, 댄서나 DJ가 아닌 영화배우를 좋아할 때 아쉬운 점을 한 가지 들라면 배우의 본업 활동을 현장에서 볼 수 없다는 사실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내 눈앞에서 니콜 키드먼이 연기하는 것을 볼 기회가 찾아왔으니, 이것은 운명, 놓쳐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니콜 키드먼이 맡은 역할 자체도 흥미로웠다. 니콜이 출연하는 연극은 안나 지글러가 극본을 쓴 '포토그래프 51'이라는 작품이었는데, 니콜은 실존했던 과학자이자 극의 주인공인 '로잘린드 프랭클린'을 연기한다고 했다. 로잘린드 프랭클린은 51번 사진(포토그래프 51)을 촬영해 DNA의 이중 나선 구조를 발견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나, 남성 과학자들에게 업적을 가로채기 당하고 역사에 제대로 기록되지 않은 인물이다.
기념비적인 성취를 거뒀으나 합당한 평가를 누리지 못한 여성에 대한 이야기라니, 그녀를 재조명하고자 하는 니콜 키드먼의 마음이 느껴졌다. 나 역시 여성 서사에 관심이 많은 편이기 때문에 꼭 니콜이 출연하지 않아도 로잘린드 프랭클린이라는 인물의 이야기를 극으로 감상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물론 니콜이 출연하지 않는다면 굳이 런던까지 날아가 연극을 감상하진 않았겠지만).
니콜 키드먼의 연극 출연 소식이 들려오고 얼마 지나지 않은 4월 25일 티켓 예매가 시작됐다. 나는 다가오는 9~11월에 런던을 갈 시간적, 금전적 여유가 되는지 따위는 따지지 않고, 가을보다는 겨울이 좋다는 이유만으로 11월 공연 티켓을 무작정 예매했다.
작정이라는 게 없기는 없었다. 나에게 2015년 11월이면 대학 마지막 학기가 한창일 때로 졸업까지 남은 9학점을 들으며 취업 준비에 열을 올려야 할 기간이었기 때문이다. 최악의 청년 취업난이라는 뉴스가 매일 같이 나고 있는데, 마지막 학기 중에 좋아하는 배우가 출연하는 연극을 보러 팔자 좋게 런던으로 날아가는 게 맞는 일인지 남다른 덕력을 자부하는 나조차도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머쓱하게도 고민의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니콜 키드먼의 연기를 눈앞에서 볼 수 있는 기회를 저버릴 수 없었거니와 몇 주 정도 학교 수업을 빠지고, 취업 준비를 쉰다고 해서 내 인생이 어떻게 될 것 같지도 않았다. 괜한 반항심에 "막학기 취준생은 하루도 허투루 쓰면 안 돼!" 하는 한국 사회 분위기에 나를 맞추고 싶지 않기도 했다. 쿨한 건지 무모한 건지, 그렇게 나는 마지막 학기가 한창인 11월에 런던으로 날아가 니콜 키드먼을 보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일정을 계획하게 됐다.
비행기표를 사고 숙소도 예약하며 런던으로 떠날 준비를 얼추 끝낸 나는 아마존에서 안나 지글러가 쓴 "포토그래프 51" 극본 초판을 구매했다. 영어 실력이 평균보다 좋은 편(순전히 니콜 키드먼 덕질을 열심히 한 영향으로 영어를 곧잘 하는 편이다)이지만, 아무런 준비 없이 가 모든 대사가 영어로 이루어진 극을 깊이 있게 이해하고 감상할 정도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는 출국 날이 다가오기까지 전공 서적이나 자격증 문제집보다 "포토그래프 51" 극본을 훨씬 열심히 읽고 연구했다. 특별히 마음을 움직이는 대사에는 형광펜을 긋고, 특별히 인상적인 대목에는 포스트잇을 붙여가며 극본을 거의 외울 만큼 여러 번 읽었는데, 이런 대사를 말할 때 니콜 키드먼이 어떤 모습일지 그려보며 읽으니 여러 차례 읽어도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런던으로 날아가 니콜 키드먼을 만나게 됐다
극본을 읽고 분석하며 니콜 키드먼의 연극을 볼 준비를 하고, 겸사겸사 런던을 여행할 준비와 학교생활, 취업 준비까지를 열심히 병행하다 보니 출국 날이 성큼 다가왔다. 나는 기내에서 다시 한번 읽을 생각으로 챙긴 "포토그래프 51" 극본을 손에 쥐고 런던행 비행기에 탑승했다.
12시간 비행 끝에 런던에 도착한 나는 숙소에 체크인해 짐을 풀자마자 런던 내셔널 갤러리도, 타워브리지도, 세인트 제임스 파크도 아닌 니콜 키드먼의 연극이 열리는 노엘 코워드 극장부터 찾았다. 극장에 도착해서는 니콜의 얼굴이 큼지막하게 들어간 포스터가 걸린 극장 사진을 기념으로 몇 장 남기고, 지난 4월에 일찌감치 예매해둔 티켓을 수령했다.
공연까지는 시간이 다섯 시간 정도가 남았다. 비는 시간에 런던 시내를 조금 둘러볼까도 싶었지만, 연극을 볼 체력적, 정신적 여유를 챙기는 게 더 중요한 것 같아 관광은 뒤로 미뤄두고 근처 카페에서 간단한 요기를 하며 공연이 시작되는 밤이 오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이날 공연은 7시 30분 시작이었다. 극장의 문은 공연 시작 정확히 30분 전에 열렸다. 나는 문이 열리자마자 극장에 입장해 예매해둔 세 번째 줄 정중앙 좌석을 찾아 앉았다. 공연 시간이 다가올수록 니콜 키드먼을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무척이나 떨렸다. 뛰는 심장을 부여잡으며 오들오들하는 마음을 애써 차분하게 가다듬고 있는데, 객석을 비추는 불이 꺼지고 극장 전체가 어두워졌다. 이제 니콜 키드먼이 이끄는 다른 세상으로 빠져들 시간이라는 신호였다.
'탈칵' 하는 소리와 함께 무대 위에 조명이 들어왔다. 분주한 느낌의 효과음과 함께 니콜 키드먼은 남자 배우 7명을 이끌며 무대 뒤편에서부터 빠른 걸음으로 걸어 나왔다. 남자 배우 여럿을 이끌고 선두에서 등장하는 여성 배우라니, 시작부터 멋스러움이 느껴졌다. 또 한 번 '탈칵' 하는 소리와 함께 무대 한가운데 자리를 잡은 니콜 키드먼을 비추는 조명이 들어왔다. 자신만을 비추는 조명을 받은 니콜 키드먼은 내가 극본에서 읽은 그 첫 번째 대사를 말하기 시작했다.
This is what it was like.
We made the invisible visible.
We could see atoms,
not only see them-manipulate them,
move them around.
We were so powerful.
...
We could see everything,
really see it-except, sometimes,
what was right in front of us.*
첫 번째 대사는 DNA의 이중 나선 구조를 발견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될 과학자 로잘린드 프랭클린의 연구에 대한 열정과 높은 자부심을 보임과 동시에 극의 전체적인 드라마를 은유하는 대사다. 이 대사를 말하며 로잘린드 프랭클린을 연기하는 니콜 키드먼의 모습은 내가 극본을 읽으며 그려봤던 것보다 훨씬 대단했다.
열 문장으로 이루어진 첫 번째 대사에서 문장마다 변화하는 인물의 감정을 세심하게 전달하는 니콜 키드먼의 모습은 나의 마음속에 '와' 하는 탄성이 절로 터져 나오게 했다.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고, 스탠리 큐브릭 같은 거장의 영화에 출연한 대배우의 아우라가 과연 남달랐다.
이 극은 1951년에서 1953년 사이 영국에서 있었던 DNA 구조 연구 경쟁의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 시기 여성 과학자인 로잘린드 프랭클린이 남성 중심의 과학계에서 겪었을 고단함(극에서 선임급 교수 식당이 남성 전용이라는 이유로 로잘린드가 동료 교수들과 점심을 먹지 못하는 장면이 나오며, 동료 교수들은 시종일관 로잘린드를 로잘린드 '박사'가 아닌 로잘린드 '양' 혹은 '로지'라고 부른다)은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어렵지 않게 예측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 가운데 자신의 연구에 순수하게 몰두하는 로잘린드 프랭클린의 열정과 강단, 이면에 존재하는 고독과 쓸쓸, 지침. 강인한 여성이지만 인간이라면 어쩔 수 없이 가질 수밖에 없는 유약함. 그 모든 것들 가운데서도 때때로 발휘되는 유쾌함까지. 로잘린드 프랭클린이라는 인물은 니콜 키드먼의 정교하고 풍부한 표현으로 무대 위에서 입체적으로 살아났다.
니콜 키드먼이 이끄는 감정선에 몰입해 극을 따라가다 보니 어느새 후반부에 이르렀다. 극의 후반부는 한국에서 미리 극본을 읽었을 때 특히 나의 마음을 움직여 형광펜을 그어뒀던 대목이 나오는 때였다. 로잘린드 프랭클린이 자신을 연구원으로서 존중하는 유일한 동료 교수인 캐스퍼와 식사를 마치고 "당신은 무엇을 원하나요, 로잘린드?"라고 묻는 캐스퍼의 질문에 답하는 장면으로, 극에서 가장 감정적인 표현이 나타나는 대목이었다.
모두에게 시종일관 차가움을 유지했던 로잘린드 프랭클린의 이면이 관객들에게도 처음으로 보여지는 장면을 니콜 키드먼이 어떻게 그려낼지 기다려졌다. 몇몇 장면이 지나 이윽고 캐스퍼 역을 맡은 배우가 '그 질문'을 던졌고, 니콜 키드먼은 로잘린드 프랭클린으로서 답했다.
CASPAR: I mean... what do you want, Rosalind?
ROSALIND: So many things. to wake up without feeling the weight of the day pressing down, to fall asleep more easily, without wondering what it is that's keeping me awake,
...
to be kissed, to feel important, to learn how to be okay being with other people, and also how to be alone. To be a child again, held up and admired, the world of endless future.**
이 대목에서 니콜 키드먼은 앞서 묘사했던 로잘린드 프랭클린과는 전혀 다른 표정, 전혀 다른 손짓, 전혀 다른 어조로 감정을 끌어냈다. 이때 로잘린드 프랭클린을 연기하는 무대 위의 니콜 키드먼은 경외감이 들 정도로 대단하여, 감상자가 인물의 감정 안에 완전히 빠져들 수 있도록 해주었다.
관객들 모두 숨죽여 있는 것이 느껴졌다. 객석 어딘가에서는 훌쩍이는 소리도 들렸다. 물론 나도 울었다. 고단했을 로잘린드 프랭클린의 이면을 엿보았다는 점에서 순수하게 인물에게 마음이 가 슬프기도 했지만, 니콜 키드먼이 저와 같은 수려한 연기를 펼치는 것을 내 눈으로 직접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이 뭉클하고 감동적이었다.
나의 마음을 퍼간 대목 이후로 그리 길지 않은 얼마간을 이어간 극은 마지막 대사를 마친 니콜 키드먼이 먼 곳을 응시하는 것으로 끝마쳐졌다. 니콜 키드먼의 시선을 비추고 있던 조명이 서서히 어두워지고, 무대 위 모든 조명이 완전히 꺼지자 관객들은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쳤다.
절제하던 감정이 연극을 마침과 동시에 터져 나왔는지 니콜 키드먼은 관객들의 기립 박수를 받으며 눈물을 흘렸다. 벅차오르는 마음을 추스르며 오늘 공연장을 찾아준 관객들에게 인사하는 니콜 키드먼을 향해 나는 13년의 덕심을 잔뜩 끌어모아 손바닥이 빨갛게 돼 아플 만큼 세찬 박수를 보냈다. 무척 감동스러운 나의 마음이 무대 위 니콜 키드먼에게 모두 전달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니콜 키드먼이 퇴장할 때까지 정말이지 끝없이, 끝없이 박수를 보냈다.
세 번째 만남을 기다리고 있다
런던 웨스트엔드 극장가에는 '스테이지 도어링'이라는 문화가 있는 모양이었다. 스테이지 도어는 배우들이 드나드는 극장 뒤편의 쪽문을 말하는 것인데, 연극이 끝난 뒤 이곳에서 기다리면 분장을 지우고 의상도 평상복으로 갈아입은 배우가 나온다고 했다. 일종의 퇴근길인 이 공간에서 배우들은 자신을 기다려준 팬들에게 사인을 해주고, 사진 촬영에도 응해주며 오늘 공연이 어땠는지 작은 대화를 나눈다고 했다.
나는 한국에서 사전 조사를 철저히 해 니콜 키드먼이 연극을 하는 극장의 스테이지 도어가 어디에 있는지도 이미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연극이 끝나자마자 후다닥 달려가 스테이지 도어 제일 가까이에 자리를 잡고 니콜 키드먼을 기다렸다. 컨디션이 좋지 않다거나 하는 이유로 배우가 스테이지 도어에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는데, 다행히 니콜 키드먼은 이날 자신을 기다리는 팬들을 만나기 위해 얼굴을 비췄다.
서울에서 니콜 키드먼을 만난 이후 1년여 만에 니콜 키드먼을 다시 만난 나는 공연 티켓에 사인을 받고, 니콜에게 오늘 당신이 무대 위에서 얼마나 '어메이징' 했는지도 전했다. 서울에서 니콜 키드먼을 만났을 때 같이 사진 한 장을 남기지 못한 것이 조금 아쉽기도 했는데, 이날은 니콜 키드먼과 함께 사진도 한 장 남기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니콜 키드먼은 스테이지 도어에서 자신을 기다린 팬들 한 명 한 명과 친절히 인사를 나누고 극장을 떠났다. 나도 그제서야 극장을 벗어나 런던아이가 보이는 템스강을 끼고 조금 걷기 시작했다. 템스강변을 걸으며 나는 1년 전 서울에서 니콜 키드먼을 만나고 DDP 일대를 걸을 때 그랬던 것처럼, 오늘 니콜 키드먼을 만난 벅찬 마음을 헤아려보기 시작했다.
늦은 밤 니콜 키드먼의 연극을 보고 런던 강변을 혼자 거닐고 있다니, 새로운 감회의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니콜 키드먼을 막 좋아하기 시작했던 14살의 나는 기말고사 영어 시험에서 70점 정도를 겨우 받던 꼬맹이였는데, 어느새 20대 중반이 되어 니콜 키드먼이 영어로 말하는 연극을 보러 혼자 런던을 다 왔다.
사는 게 언제나 재미없게 느껴지는 나지만, 이런 순간에는 산다는 것이 꽤 재미있게 느껴지는 것도 같다. 니콜 키드먼이 내 눈앞에서 연기하는 모습을 다 보게 될지 누가 알았겠어. 나는 정말 몰랐다. 남의 집 자식들은 아이돌 가수 좋아할 때 나만 혼자 이렇게 니콜 키드먼 좋아하는 나를 보며 '쟤는 왜 저러지' 했을 우리 엄마도 정말 몰랐을 것이다. 정말 삶이라는 건 일단 살고 볼 일인 건가 싶기도 하다.
사실 2015년 선보인 니콜 키드먼의 '포토그래프 51'은 니콜이 17년 만에 연극 무대에 복귀한 것이었다. 니콜은 내가 덕질을 시작하기 4년 전인 1998년에 마찬가지로 런던에서 '더 블루룸'이라는 연극을 선보인 바 있다. 또다시 17년이라는 시간이 지나면 니콜 키드먼이 런던 연극 무대에 복귀하게 될는지도 모르겠다.
2015년에서 17년이 지난 2032년이면 내 나이가 마흔을 넘겼을 때인데, 만약 니콜 키드먼이 때맞춰 다시 연극 무대에 선다면 20대 중반 청년을 지나 40대 중년이 된 내가 또 어떤 감상을 느끼게 될지 궁금해진다. 그때의 니콜 키드먼은 또 어떤 모습으로 멋스러울지 기대되기도 한다.
2032년이 됐든 언제가 됐든, 연극이 됐든 다른 기회가 됐든, 나는 니콜 키드먼과의 세 번째 만남을 기다리고 있다. 내 삶에 니콜을 다시 만나보게 되는 그런 벅차오르는, 그런 재미있는 일이 또 생겼으면 좋겠다. 만약 그런 일이 또 생긴다면, 세 번째 만난 니콜 키드먼에 대한 이야기도 꼭 써보도록 하겠다.
*Anna Ziegler, "Photograph 51", Oberon Books(2015), p11.
**Anna Ziegler, "Photograph 51", Oberon Books(2015), p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