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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갤럭시편지 Jul 29. 2024

살림의 힘

2024.07.29.

살림은 사전적 의미로는 한 가정을 이루어서 살아가는 것이라고 쓰여있지만, ‘살린다’라는 동사에서 압축되어 어떤 존재나 가치를 소생시킨다는 의미가 더 직관적으로 다가오는 것 같다. 나에게 살림은 늘 어중간한 어떤 것이었는데, 최근에서야 어떤 의미인가를 생각해 본다. 직장을 다닐 때는 늘 어딘지 모르게 어수선한 공간을 더 깨끗하고 정돈된 공간으로 만들고 양질의 식사를 준비하고 섭취하는 기쁨을 느끼고 싶다고 생각했다. 나는 일도 잘하면서 살림도 잘하는 여성이고 싶었다. 하지만 장시간 노동을 하는 여성에게 살림은 언제나 파트너와 혹은 자신과의 크고 작은 싸움이 될 뿐이다. 현재는 직장을 다니지 않으니 상대적으로 집에 머무는 시간이 늘어나고 자연스럽게 살림에 투자하는 비중도 늘어났다. 이제는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정기적인 청소를 하고 공간을 정돈하며, 장을 보고 먹을거리를 준비한다. 파트너에게 친절하게 내가 정한 살림 규칙을 제시할 수도 있고 설득할 수도 있다. 파트너와 분담을 시도할 수 있고, 내 공간과 살림을 리드할 수 있다. 그렇다고 우리 집이 아주 깔끔해지고 이전과 비교해서 획기적으로 정돈된 공간이 되었을까? 사실 그렇지는 않다. 이전보다 조금 깔끔해졌지만, 여전히 어딘가 어수선하고 너저분해 보일 때가 있다. 그럼에도 이전처럼 살림 자체가 스트레스이고, 뭔가 잘 작동하지 않는 영역으로 느껴지진 않는다. 무슨 차이일까 생각해 보면, 살림의 영역 즉 임금 노동 이외의 시간과 공간에 대한 나의 통제력이 증가한 것이다. 그리고 이 원천에는 시간이 있다.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살림의 시간은 살림 free 시스템의 원천이 되었다. 한 여름 조금만 게으르면 금방 기름때가 끼고 마는 가스레인지 주변, 아무리 때 빼고 광 내도 한계가 있는 구식 빌라, 효율 극대화를 추구해도 정리정돈에 한계가 있는 작은 방과 공간들, 나의 소득으로 선택할 수 있는 먹거리들의 최대치와 한계점 등등 이런 것들을 열심히 고민하다 보면 허무해지기도 한다. 요리·청소·보살핌 등의 가사 일이 대부분인 보이지 않는 재생산 노동은 생산 노동과의 적절한 균형을 통해서만 빛을 발하는 것일까? 살림을 아무리 열심히 한다 한들 변치 않은 살림살이는 임금 노동으로 갱신해야 한다니. 그렇다면 내가 하고 있는 재생산 노동은 어떤 가치를 인정받고 있는 것일까, 더구나 왜 이런 고민은 언제나 여성에게 집중되어 있을까. 시기적절한 섭생, 상대에 대한 관찰과 배려, 섬세한 조정과 지속적인 성실함을 통한 재생산 노동의 미덕을 갖춘 파트너를 찾기는 왜 이리 어려운 것일까. 낭만닥터 김사부처럼 드라마 속 의사만 무조건 살린다는 미션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일상의 순간순간에서 시간과 장소 그리고 관계가 응축된 삶터를 가꾸고 그 위를 지나다니는 여러 사람을 살리는 살림의 힘은 어떤 것보다 강하고 중요하다. 그렇기에 살림살이 꾸리는 것이 얼마나 힘겨운 일인지, 사소하고 구차스러운 것인지, 인내를 요구하는 것인지, 얼마나 기쁘고 충만한 것인지 계속 떠들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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