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정은 에세이 「작은 일기」에서 찾은 작은 희망

2025 창비 황정은 에세이 서평단 참여글

by 갤럭시편지
한국 사회에서 30대 여성으로 살면서, 적어도 우리 사회가 제도적으로 민주화되었다고 믿었던 한 사람으로서 이천이십사년 십이월 삼일 화요일 오후 열시 삼십사분 계엄은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분노를 채 느끼기도 전에 실소가 터져 나왔던 순간을 기억한다. ‘이게 지금 사실이라고?’ 그 충격이 너무 압도적이라 그 후에 느끼는 감정과 생각을 글이나 말로 표현하는 것조차 나 스스로 유치하게 느껴졌었다. 그때는 그게 내 표현력의 한계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감히 자유민주주의를 거론하며 이유 없는 계엄으로 우리들의 일상과 민주주의를 파괴한 내란 세력들에게 내상을 입어 말을 잃었던 것 같다.

얼마나 반가운 일인지 모르겠다. 이천이십사년 십이월 삼일 화요일 오후 열 시 삼십사분 계엄 이후, 우리의 치열한 일상을 이렇게 살뜰히 되돌아보고 기록한 이가 있다는 것이 말이다. 그 치열함과 솔직한 기록을 공유해 준 것에 대해 깊은 감사를 느꼈다. 한국 사회 계엄 이후 하루하루에 대한 기록들은 세밀한 현미경으로 찬찬히 살펴본 순간들이 넘치게 그렇다고 모자라지도 않게 담겨 있다. 나에게 말을 잃은 답답함은 깊은 불안과 혼란에 가까웠는데, 이 책은 그런 기억들을 되돌아보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계엄 이후 집-광장-현실의 순환

글을 읽으며 내내 작가가 보여주는 하루하루의 시공간을 상상할 수 있었다. 글을 써야 하는 공간으로서 작가의 집, 국가 내란 세력에 저항하는 시민들의 ‘장’으로서 광장, 뉴스 보도를 통해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권력 오남용의 현실로서 언론 보도를 보여준다. 이천이십사년 십이월 십일 화요일 오후 아홉시 구분 현관에서 배웅하는데 그가 잠시 머뭇거리더니 토요일에 결과가 실망스러워서 어떡하느냐고 말했다. 현관에 붙은 손팻말을 본 것 같았다. 자기는 처음엔 홧김에 계엄을 선포한 줄 알았는데 매일 나오는 뉴스를 보니 너무 무섭다고 했다. 그렇죠, 무섭죠, 보통일이 아니죠. 실망했다는 말을 하기는 싫어서 그냥 웃었다 또 가죠 뭐. 집수리 기술자와의 대화를 통해서 우리의 일상은 정치적인 이슈가 관통하는 순간들임을 보여준다. 그런 순간들은 위기의 순간에 더 빛나게 도드라지는지 모르겠다. 너무나 다르다고 생각했던 개개인들이 우리가 만들어온 최소한의 규칙과 합의점이 붕괴될지 모른다는 공포와 두려움으로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아이러니의 반복들.

말하기-듣기-쓰기의 소명

이 책의 하루하루는 말하기-듣기-쓰기로서 한 사람의 소명의식을 보여주는 것 같다. 글을 쓸 수 없는 작가로서의 괴로움이 묻어나 있다. 생각해 보면 쓴다는 것은 어떤 현상에 대한 자신의 해석과 표현을 벼르는 일이다. 그런데 그 현상이 너무나 파괴적이고 처참했을 때, 정리될 수 없는 것이 또한 글이다. 현상을 파악하고 천착하기 위해서는 충분히 듣고 습득해야 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계엄 이후, 쏟아지는 말들 속에 사실과 진실, 허위는 늘 혼재되어 있었다. 작가는 스펀지처럼 그 현상들을 흡수하고, 말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처럼 보인다. 말한다는 것은 육성으로 말하는 행위와 글로 생각을 드러내는 행위를 모두 일컫는다. 사람들은 생각을 정리한 후 말할까, 아니면 말을 하면서 생각을 정리하게 될까. 선후가 어찌 되었든 작가는 말하는 것, 듣는 것, 쓰는 것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끈질김과 치열함을 보여준다. 이천이십오년 삼월 십오일 오후 아홉시 십육분 삶의 목적과 의미를 ‘목격’에 두고 산 지 꽤 되었다. 이걸 하러 나는 여기에 왔다. 아주 작은 무수한 입자들로 흩어졌다가 어느 날 인간이라는 물리적 형태로 세상에 출현해, 기적적으로 출아해, 세상을 겪고 세상의 때가 묻은 채 다시 입자로 돌아갈 것이다. 세상을 관통한, 그리고 세상이 관통한 더러운 경험체로서. 세상을 관통한 경험체로서 매 순간 깨어있으려고 분투했을 작가에게 연민마저 들었다.


계엄의 보편과 연대

계엄령 이후 계엄과 내란에 반대하는 시민들의 저항은 뉴스를 통해 보도되었다. 수많은 보도는 ‘계엄 반대 및 내란 세력 처벌, 내란 주범의 탄핵’을 외치고 있다. 작가는 계엄 이후, 광장에 모인 사람들이 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보편의 정서와 그 힘을 믿는다. 그러나 여기서 그치지 않고, 섣부른 보편화로 인한 차이의 묵살과 차별을 민감하게 잡아둔다. 우리 사회가 소수자의 끊임없는 목소리들을 통해 운동하고 있다는 생각에서 출발한 것 같다. 이천이십오년 삼월 삼십일일 월요일 오후 두 시 십구분 “헌재의 예고는 아직도 없고 사람들이 헌재에서 “사고가 났다”는 점을 인정하고 다음 단계를 모색, 준비하고 있다. (중략) 이 사회의 약자들이, 소수자들이 겪어온 괴로움과 어려움을 이제 온 사회가 다 겪고 있다. 소수의 사람들이, “전장연이”하는 이웃의 말에 가슴이 철렁하기를 거듭하다가 여성들이 성범죄를 대하는 사법부의 지나치게 관대하고 게으른 판결에 실망하고 분노하기를 거듭하다가 참사 유가족들이 “우리 나름의 책사가, 차라리 우병우 같은 사람이 필요하다”라고 느낄 정도로 거듭 좌절을 겪다가 결국 모두의 일로 번지고 말았다” 장애인, 여성, 노동자, 국가폭력의 생존자 등 소수자를 외면했던 우리를 반성하고 있다. 우리가 보편적으로 믿어왔던 민주주의의 위기를 통해서 전 사회를 다시 본다. 과거를 돌아보고 현재를 반추하는 성찰의 과정, 오히려 불편해서 편안한 대목이었다.


다시 만나는 세계를 기다리며

이천이십오년 사월 사일 오전 열한시 이십이분 헌법재판소에서 내란 주범 윤석열의 탄핵이 인용되었다. 탄핵 인용을 통해 우리는 윤석열이라는 인물과 그 세력들이 법과 제도를 가지고 우리 사회가 최소한의 것이라고 합의했던 상식과 개념들을 유린하는 과정들을 기억할 것이다. 환희와 눈물로 탄핵 인용을 받아들인 얼굴 모를 사람들에게 감격스러운 애정을 멈출 수 없었다. 우리 사회의 최소한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분노한 사람들이 있었고, 이들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점을 체감했다. 작가는 책의 맺음말로 “이 국면을 함께 지나온 사람들, 여러분과 동시대를 살아 다행이었고, 영광이었습니다. 다른 날 다른 때 우리가 또 서로를 알아볼 수 있기를 바라며” 라며 깊은 안도감과 애정을 표현하고 있다. 인류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라는 것이 따뜻한 시선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닐까. 이천이십오년 사월삼일 목요일 오후 세시 칠분 글을 쓰기에 적합한 시간은 아무래도 새벽인데 요즘은 그 시간에 책을 읽는다. 그 시간에 그렇게 하는 게 좋다. 타인의 생각과 시선을 내 들끓는 생각과 감정 안으로 들이지 않으면 내가 지나치게 확장된다. 가장 깊이 몰입할 때 내가 사라지고 새벽에 책을 읽을 때 그게 가장 잘되고 오로지 그것만이 목적이고 그래서 좋다. 그렇게 좋은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지 않으면 하루가 어렵다. 작가는 광장에서도 글을 쓰는 일터에서도 그렇게나 잘 듣고, 살펴보고, 생각하는 사람인가 보다. 그 태도와 마음이 따뜻해서 큰 위로가 되었다. <끝>



※ 참고: 에세이 집에서 발췌한 문장들은 진하게/ 아래밑줄 표기함.

※ 바로가기: 황정은 작가 에세이 §작은일기§ http://aladin.kr/p/rRrs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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