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답함의 속을 태운다

영화 <버닝> 이 별 세개 반인 이유.

by 갤럭시편지

다음 글에는 영화 <버닝>의 줄거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좋은점


결론적으로 영화<버닝>과 같은 색감이나 영상이 좋다.

하늘의 회색빛 그라데이션이 아름다운 사진과 같은 영상미를 보여주고, 톤 다운된 미장센은 숨죽이게 하고일상을 낯설게 비추고, 낯설게 바라보는 시선에서 오는 긴장감은 차분하다.


나는 이창동 감독의 영상미가 보여주는 '현실의 낯설음'이 좋다.

그것이 보여주는 노력하는 영상미가 아름답다.


다른점


혹자는 영화 ‘버닝’이 무라카미 하루키의 ‘헛간을 태우다’라는 단편소설을 이창동식으로 한국화하였고,

하루키의 패턴을 뛰어 넘었다고 평가한다. 하지만 나는 극중 유아인의 마스터베이션 장면을 처음 보자마자, 이건 역시나...! 하루키식 표현의 답습을 전제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남성적 결핍과 고독, 그 속에서 현실과 꿈과 같은 상상의 교차적인 혼돈 등은 하루키의 전유물이었고. 하루키가 가지고 있는 남성 주체에 대한 애정어린 시선 "나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 가?" 질문하는 소년은 '남성의 고독과 존재론적 고민을 살펴주는 여자' '안고싶은 여자' '떠나간 여자' '동경하는 여자' '불쌍한 여자'와의 관계 속에서만 독보적으로 조명 받는다.


이 과정에서 '여성'은 남성존재와는 떨어뜨려놓고 상정될 수 없는 존재이자, 남성의 고독과 결핍을 표현하는 하나의 수단 또는 장치로써 판타지가 된다. 가장 추상화된 이상과 환상으로 격상된 '여성'은 현실에서 사라지거나 나 이상과 극단적으로 불화하여 왜곡된다.


영화속


영화 <버닝> 속 극중 해미(전종서)는 멍한 표정으로 먼 곳을 바라보고, 실제 존재하는 지 확인할 길이 없는 고양이를 키우고, 근근히 모은 전재산으로 아프리카에 갔다가 현실과 꿈 사이를 방황한다. 영화의 초반 귤을 먹는 판토마임을 하면서 무엇인지 모를 것 같은 표정을 짓는 해미는 께름칙하게 아름답지만. 마치 어렸을 적 굉장히 소중히 여겼던 인형이었으나, 나중에 찾아보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는 인형처럼 묘사되면서, 영화 속에서 소실된다.


극중 종수(유아인)는 남과 북의 대남방송이 끊이지 않는 경계적인 공간, 파주에서 공무원을 폭행해서 잡혀간 아버지를 위해 탄원서를 작성하고, 집 근처에 빈 비닐하우스가 17개는 족히 되는 황량한 들판에서 홀로 옛 집을 지키며, 배달일을 하기 위해 강남 도심부를 오간다. 극중 종수는 해미에게 홀리고 해미를 찾아헤매며, 자위를 하며, 글을 쓴다. 그리고 정의라고 생각되는 개인적인 복수까지 수행한다.


'현실과 꿈' , '존재와 사유' 속에 방황하는 두 청년의 삶은 왜 대등하게 작용하지 못했을까?

왜 주변과 중심을 넘나드는 종수의 삶 속에 해미는 마치 밀랍 인형처럼 배치되었다고 소실되었을까?

그렇기에 이 영화가 한국사회 청년들의 불안하고 고단한 삶을 보여준다는 또 다른 혹자의 평은 포인트를 빗나간다. 오히려 남성 주체의 고독과 외로움, 영역을 넘나드는 방황과 탈피가 핵심이기에

난...'별 세개반' 남성적인 시선에 숨이 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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