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가족의 색깔

이 글은 영화 <어느 가족>에 대한 줄거리를 포함해요!

by 갤럭시편지

영화 「어느 가족」의 색깔


한 페친의 맨션으로 상기한 제목에 대한 생각. 영화 「어느 가족」의 원제는 ‘만비키 가족’ 한국어로 번역하면 ‘좀도둑 가족’이다. 한국판 포스터의 '그들이 훔친 것은 함께한 시간이었다'하는 표제가 보여주듯이 이 가족은 생필품이나 식재료, 간식이나 문구 등을 훔쳐서 생계를 유지하고 혈연이 아닌 서로에 대한 필요를 통해 맺어졌다. 자신의 것이 아닌 어떤 것을 얽기 섥기 엮어서 살아가는 이들은 말 그대로 '좀도둑'이다.


일본의 아베 총리가 감독의 영화 색깔을 싫어하듯이, 이 영화의 색깔은 기본적으로 빨갛다. 왜냐면 보수와 우익세력은 개인이 노력하면 여전히 이 세상은 살만한 곳이며, 아직도 세상은 정상가족이나 상부상조공동체로 가득하다고 주장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살아남기 위해 더군다나 '비도덕적 행위'를 서슴치 않는 이 가족이 서로에 대한 상처와 아픔까지 이해한다니! 내가 낳은 자식도 나를 기른 부모도 아닌데도!

그들은 정상가족 신화에 흠집을 내는 그 자체일 것이다.


그런점에서 한국판 제목을 ‘좀도둑 가족’에서 ‘어느 가족’으로 순화한 것은 위험하고 비도덕적이라고 비난 받을 수 있는 이 가족의 양태가 우리 사회의 ‘정상가족’의 신화를 저격하고 있음을 은폐하려는 시도였는지 모른다. 마치 이런 가족도 있고, 저런 가족도 있는거지 뭐 하는 상대주의적 시선으로 위험을 피해가는 잔재주를 부렸다. 하지만 그 모든 물타기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의 색은 빨갛다. 빨갛게 읽혀야 한다.


영화 속 인물들에 대해서


이 영화에서 크게 눈길이 간 인물은 아들과 아버지 포지션이었던 ‘오사무 시바타’와 ‘쇼타 시바타’였다. 심지어 '시바타'라는 성을 공유한 사이였다는 걸 이 글을 쓰며 깨달았다.


출처: 네이버 영화 정보

‘오사무 시바타’는 아이들에게 상냥하고 남에게 나쁜 소리 못할 것 같은 아저씨다. 함께 사는 연인의 예전 고객이었던 것 같고, 소소하지만 생활에는 꼭 필요한 물건들을 훔치는 방법을 아이들에게 가르친다.

그는 아들처럼 생각하는 쇼타에게 아버지라고 불리길 희망하며 아버지로써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싶어 한다. 그가 영화의 마지막에 ‘이제 나는 아저씨로 돌아갈게’라고 말하며 돌아눕고는 다음날 눈물로 자신을 떠날 아들을 쫓아간 건 아들에 대한 미련과 사랑 때문일까? ‘아버지’라며 읊조린 쇼타의 나직막한 말을 그가 들었다면 조금의 위로가 되었을까? 그것이 도둑질이라도 자신의 삶의 방식과 시선을 쇼타에게 알려주고 싶어했던 그가, 실제 쇼타에게 아버지라는 말을 듣는다면 그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출처: 네이버 영화 정보

‘쇼타 시바타’는 아버지인 오사무 시바타가 아버지라고 불러달라고 하는데, 절대 불러주지 않는다. 웃지도 찡그리지도 않으면서 아저씨이자 아버지인 그를 따른다. 그리고 관찰한다. 그러다 '유리'라는 여동생을 만나 좀도둑 가족의 관계 속 자신의 위치가 흔들릴까 경계도 하지만, 이내 유리의 작은 손을 꼭 잡고 무언가를 훔치러 나선다. 도둑질을 할 때 하는 특유의 귀여운 손동작도 동생에게 알려주고, 단골 가게에서 아이스크림도 훔쳐서 나눠준다. 동네 단골가게의 주인 할아버지에게 '동생에게는 도둑질 시키지 마라'는 말을 듣고, 그는 부끄럽게 뒤돌아선다. 결국 쇼타는 무언가를 훔쳐야 하고, 학교를 가고 싶지만 갈 수 없고, 또 다른 이에게 이 불안정한 삶의 방식을 공유하는 것을 멈추기로 결정한다.


그것이 도덕적 죄책감이든 불안함이든 쇼타의 결정은 아슬아슬하게 유지되던 좀도둑 가족의 결속을 깨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그렇다면 쇼타는 이 좀도둑 생활을 지속하고 싶지 않다고 느꼈음에도 왜 오사무에게 아버지라는 말을 남길까. 그는 고로케를 라면국물에 적셔먹으면 아주 맛이 좋다는 걸 알려준 그 상냥한 남자를 다시 찾아갈까?


고립된 개인


나에게도 여전히 어려운 질문을 다시 꺼내든다. 우리에게 가족이란 무엇일까.

좀도둑 가족은 솔직하다. 한 개인이 세상을 바라보는 인식을 재생산하고 인간 본연의 관계성을 확장하는 공간으로써 가족을 보여준다. 오히려 상처와 아픔을 공유하는 개인들의 결속으로써 '선택한 가족'이 구성원들의 인식과 생활양식을 견고하게 재생산 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좀도둑 가족이 어느 가족, 그러니까 한 종류의 가족으로 남아버리는 것은 못내 아쉽다. 전 세계적인 경제위기와 침체, 적자 생존의 투쟁 속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이제 가족은 '진정성'보다 '생존'의 공간이 되었다. 정상가족은 생존을 담보하는 공간이자 개인의 사회적 학습공간으로써 기능을 잃어가고 있지만, 역설적으로 가족의 테두리조차 유지하지 못하는 이 사회는 '고립된 개인'들이 가족에 더욱 연연하도록 불안정한 토대를 견고히 한다.


출처: 네이버 영화 정보

그렇기에 좀도둑 가족은 정상가족의 잣대와 편견에 도전했지만 왜 우리에게 가족이라는 테두리가 실존적으로 중요해졌는지 지적하지 못한다. 그런점에서 이들이 보여주는 빈곤, 절도, 산업재해, 성매매, 홀몸 어르신의 독고사, 아동학대, 가정폭력 등 취약한 사회적 고리들이 다소 부자연스럽게 미화되는 측면이 있다.


결국 영화 「어느 가족」은 정상가족의 허위성을 지적하고 우리에게 ‘진정한 가족은 무엇인가'하는 질문을 남겼지만, 가족이라는 테두리에 갇힌 '고립된 개인'보다 가짜 가족에서 진짜 가족으로 회귀하는 한계를 보여준다. 핵심은 어떤 가족이냐보다 연대에 목마른 소외된 개인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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