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도 그렇게 죽음을 그렸으리라.
우리는 비평에 민감하다. 나 또한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자기만족의 기준은 자신에게 있지 않은지 오래다. 스스로가 만족한다면 그만이라는 말을 어느 누구도 잘해주지 않는다. 설사 스스로 만족하는 삶이라도 하더라도 너는 유별나다고 말하는 세상에 살아가고 있다. 적어도 나의 세계는 그랬다.
한 인물을 자신이 바라보고 싶은 대로 생각한 대로 일반화시키고 그를 선동하는 것이 어렵지 않은 시대가 왔다. 사람이 만든 허위의 장난이 종용이 된다. 그것이 그 사람의 평판이 되고 정체성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다. 진실과 거짓은 이미 무용하다. 많은 사람들이 떠났다. 그 들을 애도하기도 전에 그 선택의 이유와 이에 따르는 추측이 난무한다. 환멸이 났다. 이후 난 아무 말이나 내뱉으며 동조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에 대한 뒷담을 써 내려갔다. 허나 분풀이를 하더라도 달라질 건 없었다.
누군가를 이해시키려 드는 행동은 힘들다. 마음을 나누는 순간에 우연히 작은 공명이 울렸을지언정 타인의 고통과 감정을, 상황을 온전히 내 것처럼 받아들이고 이해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에 관해서는 회의적이다. 그렇다면 그 사람들이 대체 왜들 그러는지 이유라도 납득이 갈 수 있게 골몰해보는 것이었다.
저마다 크고 작은 고통을 안고 살아간다. 직접 경험해보지 못한 상황을 가정하게 될 때면 한 없이 관대해지거나 혹은 뾰족하게 날이 서게 된다. 그렇게 경험해보지 대립점의 구도에 다다른다. 각자가 겪는 고통의 깊이는 어느 누구도 헤아릴 수가 없고, 그렇다고 짐작하려 들어서도 안된다. 그러나 만약이라는 가상의 환경에서도 각자의 현실을 반영하지 아니할 수가 없다.
자의식이 들통나는 순간은 어렵지 않다. 함부로 타인에 대한 판단을 하는 행위, 눈으로 보이는 것 이상으로 해석하려 들지 않고 보이는 것 그대로 예측하여 낙인찍어 버리는 그 자체. 어림짐작하여 내린 판단이 상대에게 부풀어 나는 고통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 리가 만무하다. 이를 단순한 감상과 관찰로 치부해버리기엔 하나의 인격체가 비평의 장이 되어버리는 결과를 낳는다. 내가 말하는 그 들은 눈으로 보이는 것 이상은 해석하려 들지 않는 근시안적 인물들일 것이다. 자크 라캉은 '무의식은 타자의 담론이다'라고 말했다. 즉 인간이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말을 하건, 그건 뇌에 박힌 고정관념에 의해 만들어진 생각이라는 것을. 하나의 복수라고 할 수 있는 건 애처롭게 여겨주는 것이 전부라는 현실이 애석하다.
모든 상황의 이해를 자신의 기준과 그 외의 것, 이분법적인 판단으로만 어림짐작하려 드는 대화를 나눌 때 혹은 그런 식의 대화를 전해 들을 때. 들려오는 작은 것 하나에도 마음이 상했고, 또 전전긍긍해왔다. 주관적으로 헤아릴 수 없는 것들이 타인에게 내재하여 있다 하여 보편적인 인간의 군상을 따지며 자신과 조금 다른 것 같은 타인을 비정상이라 낙인찍는 것이다. 그들이 말하는 보편적인 인간은 사회적으로 자신의 의무를 다하는 것에 근거를 둔다 했다. 누군가와의 관계와 혹은 사회생활을 힘들어하는 이들을 비주류로 취급하며 그들의 의지와 정신력 결여에 문제가 있다고 입을 모아 이야기했다. 그들이 말하는 비주류가 나와 너무나 닮아있었다. 그렇게 아무 의중 없이 흘린 말들에도 내 속이 썩어간다는 것을 누구도 알지 못했다.
확실한 대답을 채근하는 상대에게 해줄 수 있는 건 침묵이었다. 스쳐 지나가는 '우울감'이라는 찰나의 감정을 가지고 단순히 '우울증'이라 명하지 않는다. 우울증 환자가 느끼는 일종의 감정을 '우울감' 하나라고 통칭해버리기엔 그들 또한 나름대로 평범한 희로애락의 감정을 안고, 혹시나 하는 낭만을 안고 살아간다.
그러나 그 모든 감정을 잠식시켜버릴 정도로 우울은 크게 다가온다. 앞으로 살아봤자 그다지 크게 의미가 없을 것 같은 삶. 이렇게 살 바에는 죽는 게 낫겠다. 누군가에는 우스갯소리도 던지는 가벼운 농담이 사무치는 진심이었다면 그 들은 믿을 수 있을까. 살아있음으로 인해 흘러가는 시간을 막지 못하는 것. 그 시간과 함께 커지는 어둠을 막지 못하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다. 그렇게 죽음을 그린다.
대부분 '죽음'이라는 것은 자체가 앞으로 실존하지 않을 그의 시간을 안고 존재함으로써 두려움을 얻지만, 우울증 환자에게 '죽음'이란 앞으로 실존하지 않을 생의 시간, 고로 고통도 사라져 버린 영원한 평온의 시간이 되어준다는 것이다. 아마 그대도 그렇게 죽음을 그렸으리라. 이제야 알아버린 그대의 절규에 죄책이 인다. 마지막 온 힘을 다해 힘겹게 고백한 고통을 더 이상 외면하지 않으리라. 그렇게 보내지 않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