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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재형 딴짓마스터 Mar 22. 2017

틀딱과 급식충이 사는 세상 1

무례하고 무기력한 존재에 대하여

※모든 사진은 특정 용어와 관계없습니다.


아야!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파란색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가는 길. 어디 다녀오는지는 기억 안 나지만 왜 아팠는지는 생생하다. 처음 보는 할아버지는 등산복을 입으셨다. 아마 주말이었나 보다. 하긴 초등학생이 주중에 멀리 나갔다 올 일이 얼마나 있었겠나. 아무튼 내가 앉은 곳은 일반석. 서있는 저분은 ‘어디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이 내 자리에 앉느냐’하는 표정으로 날 바라보셨다. 내가 비명 지른 건 그 할아버지가 등산 스틱으로 내 발을 찍었기 때문이다.


중학교 1학년 때였다. 그날은 여름방학이었고 방학 숙제를 위해 경복궁에 갔다 돌아오는 길이었다. 집 앞까지 바로 가는 버스를 탔다. 카드를 찍고 나이 지긋한 기사님 바로 뒤에 앉았다. 몇 정거장 뒤에 할머니 한 분이 타셨다. 출발하자마자 거울 너머 기사님과 눈이 마주쳤다. 그러더니,


“학생! 자리 비켜!”
“아니 어르신이 타셨으면 알아서 양보해야지. 꼭 말해야 일어나나?”
“아이고, 할머니 앉으세요. 허허”


원래 목소리가 큰 분이셨을까. 내가 들은 건 감정이 실린 고함이었다. 아마 손꼽히게 억울했던 날 일거다. 넓은 버스에는 할머니, 나, 기사님 밖에 없었으니까.


'틀딱'에 대한 비판을 단순한 세대갈등으로 규정하기는 어렵다.


틀딱의 등장


광화문에 촛불이 켜지자 시청 앞은 태극기가 펄럭였다. 군가가 흘러나왔고 확성기에선 전투적인 문구를 선창 했다. 태극기를 든 수많은 노인들이 따라 외친다. ‘틀딱’의 등장이다. 광화문과 시청 사이는 경찰의 차벽이 둘러졌다.


‘틀딱’ 이전에 ‘꼰대’가 있었다. 꼰대는 권위적이고 일방적이었다. ‘나는 했는데 너는 왜 못해’, ‘나는 이렇게 생각하는데 너는 왜 다르게 생각해. 틀렸어’ 같은 사고방식과 말투. ‘틀딱’으로 지칭되는 일부 노인들은 조금 다르다. 권위적인 듯 하지만 무례하다. 생각을 강요한다기보다 다른 생각을 무시하는 쪽에 가깝다. 무시하는 범위도 상당해서 도덕, 질서의식, 준법정신까지 포함된다.


내 발을 찍은 할아버지는 요즘으로 치면 ‘틀딱’이다. 본인의 가치관을 강요한 버스 기사님은 꼰대에 가깝다.


어른과 어린이, 노인과 청년 간 대화와 공감대 형성 노력이 없다면?


사회는 빠르게 변화했다. 70대 전후 노인들은 1970~1980년대 한국의 고성장을 이끈 주역이다. 그들은 그들이 주도한 세상에서 열심히 일했다. 국가의 성장에 개인의 자유는 무시당했고 희생은 당연하게 여겨졌다. 민주주의 역시 무시당했다. 정부가 주도하는 권위적인 성장이었다. 이 세대가 성장의 주역으로 남으려면 정부의 권위주의를 합리화해야 했다. 자기합리화의 시작이다.


그렇게 열심히 일했는데 현재 노인 인구는 빈곤하다. OECD 평균 노인 빈곤율은 12.4%, 한국은 49.6%다. 찬란한 과거와 암울한 현재가 배치된다면? 산업화와 민주화의 주인공들이 절대 빈곤으로 내몰렸다. 이곳은 OECD에 가입할 만한 선진국일까. 아니 정상이기는 한 걸까.


‘틀딱’의 등장 원인을 한두 가지로 요약하기는 어렵다. 개인 성향일 수도 있고, 자기합리화의 결과일 수 있으며, 맹신의 부산물일지도 모른다. 변화하는 세상을 따라잡는 건 노인들에게 벅찼다. 누군가는 변화해 온 지금을 ‘잘못된 세상’으로 외면했을지 모른다. 소통의 부재도 빼놓을 수 없다. 불통은 현재를 볼 수 있는 눈을 가리고 미래를 예상 못하게 한다. 소통을 무시한 것은 노인 세대의 잘못이지만, 충분한 대화가 있었냐는 질문에 동의하기도 어렵다.


어제의 우리는 무례하고 무기력한 그들을 보았다.

내일의 우리가 지켜봐야 할 건 ‘틀딱의 재생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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