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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진만 Jul 02. 2023

이 사람은 당신이 아는 스파이더맨인가요

인상적인 영화리뷰 2023 - <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

<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Spider-Man: Across the Spider-Verse, 2023)


'스파이더맨' 애니메이션 3부작의 세번째 작품인 <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는 전편이 파격적인 연출 방식과 신선한 스토리로 평단으로부터 기대를 훌쩍 뛰어넘는 찬사를 받으며 대성공했던 터라 후속편이 더 나아지는 건 둘째치고 버금가기라도 할 수 있을지 기대와 우려가 공존했었는데, 그 어려운 걸 결국 해냅니다. 한 편짜리 독립적인 이야기로 다가왔던 서사가 3부작으로 확장되면서, 영화는 연출을 더욱 대담무쌍하게 구사하는 것은 물론 새로운 스파이더맨의 모험을 일시적인 '치기'를 넘어 근본적인 '탐색'을 위한 여정으로서 더욱 진중하게 그립니다. 그 덕에 영화는 어쩌면 그 쟁쟁한 실사 스파이더맨 영화들도 감히 꺼내지 못했을 화두에 이르게 됩니다.


브루클린의 고등학생 마일스 모랄레스(샤메익 무어)는 여전히 '다정한 이웃' 스파이더맨으로서의 일상을 살아가고 있지만 전편에서 만났던, 다른 우주에서 온 동병상련의 스파이더우먼 그웬(헤일리 스테인펠드)의 만남 이후 외로움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이 홀로 견뎌내야 하는 히어로의 고충과 고독, 그것은 다른 우주에 있는 그웬 또한 마찬가지죠. 마일스가 남몰래 이웃들을 구하고 다니는 게 부모님들에겐 학업도 소홀히 하며 시도때도 없이 밖으로 나도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고, 그런 상황이 이어지자 부모님들은 마일스에게 외출금지를 내립니다. 그런 마일스 앞에 난데없이 나타난 그웬. 그웬은 자신처럼 외로워 했을 마일스를 새로운 곳으로 안내하는데, 그곳은 바로 모든 우주의 모든 스파이더맨들이 경유하는 세계. 서로 다른 우주에서 온 만큼 스파이더맨들은 혼잡한 세계의 질서에 대해서도 서로 다른 신념을 지니고 있는데, 그 중 미겔 오하라(오스카 아이삭)라는 스파이더맨이 세계를 이끌며 정예 팀을 꾸려 세계의 질서를 지켜나가고 있습니다. 똑같은 고충을 안은 히어로들의 세계가 있다는 데 대한 반가움도 잠시, 마일스는 숨겨진 진실과 마주합니다. 그러나 진실로 인한 혼란 속에서 질서나 신념 같은 대의를 따지기에 마일스는 아직 어린 15세 소년이고, 그 결과 마일스는 미겔 오하라를 비롯한 수백명의 스파이더맨이 동시에 쫓는 도망자 처지에 놓입니다. 설상가상으로 무슨 이유인지 마일스를 숙적이라고 천명한 또 다른 누군가, 스팟(제이슨 슈왈츠먼)이 마일스의 우주를 무너뜨리려 합니다.


<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Spider-Man: Across the Spider-Verse, 2023)


<어벤져스: 엔드게임>,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 같은 MCU 영화들이 나오기 이전에 이미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가 우리에게 '멀티버스'라는 개념을 본격적으로 소개한 바 있습니다. 다수의 스파이더맨'들'이 고유의 그림체로 등장하며 갖은 색감과 질감의 충돌 속에서 활약을 펼치는 전편은 그야말로 '비주얼 쇼크'였기에, 이번 편에서는 아무래도 그런 비주얼에 대한 감각이 무뎌지지 않겠나 싶었지만 무너지기는커녕 더 장관이고 절경이 되어 우리를 찾아왔습니다. 전편이 그러했듯 이번 <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 역시 애니메이션 기법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그려내기보다 인상과 감정, 능력에 따라 어떻게든 변화할 수 있는 유연한 세계를 그려내기 위해 활용되고 그로 인해 해석과 투영을 거쳐 스크린에 나타나는 각기 다른 우주의 이미지들은 그 모든 컷 하나하나가 액자에 박제해놔도 손색이 없을 만큼 미적으로 뛰어납니다. 특히 전체 관람가 애니메이션의 한계를 가뿐히 넘는 액션의 비중과 임팩트는 웬만한 실사 스파이더맨 영화보다도 더 크지 않을까 싶은데요, 현실 공간을 마음껏 질주하고 확장하고 비틀며 펼쳐지는 액션은 물론 차원의 구분이 무의미한 추상적 공간에서 일어나는 무질서한 스펙터클까지, 영화 사이사이 나오는 코믹북 이미지처럼 마치 책 속으로 풍덩 뛰어들어 유영하는 듯한 시각적 쾌감은 실사 영화도 넘볼 수 없도록 독보적입니다. 이처럼 터져나오는 무질서와 질주하는 질서가 공존하는 액션은 물론, 마냥 '액션 히어로'이지만은 않은 캐릭터들의 심리를 좇아 세밀하게 흘러드는 감수성까지, 우주의 경계를 넘나드는 이들을 따라 애니메이션 연출이 보여주는 표현의 한계 역시 무의미해집니다. 천차만별로 생긴 우주의 결합과 균열, 그 속에서 충돌하는 온갖 질감의 캐릭터들이 그야말로 현대 미술 작품처럼 '전시'되는 듯 합니다.


그러나 이 영화가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졌다고 해서 스파이더맨 세계관의 쉽고 간결한 약식 버전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애니메이션은 표현의 스펙트럼을 극대화하고자 선택된 것이지, 스토리와 감정선, 담론은 실사 영화보다 오히려 더 세세하고 담대하기 때문입니다. 영화는 메인 이벤트가 펼쳐지는 공간인 '스파이더맨들의 세계'로 진입하기 전 마일스와 그웬 각자의 우주를 꽤 비중있게 보여줍니다. '자기만 그런 게 아닌' 스파이더맨의 공통된 고충을 품고도 그것을 공유하지 못한 채 고독을 숙명처럼 떠안아야 하는 그들의 일상을 보여주죠. 그들을 지켜보는 우리 역시 자기만 그런 게 아니라는 마일스와 그웬의 읊조림에 속으로 수긍합니다. 이미 다 알고 있는 이야기이니까요. 영웅이란 자고로 인생의 방향을 결정짓는 고통스런 순간을 극복해야 비로소 더 큰 영웅으로 성장할 수 있으며, 그 진실을 수차례 리바이벌되고 서로 콜라보하기도 하며 이제는 외울 만큼 익숙해진 스파이더맨의 세계관을 통해 익히 인지하고 있죠. 그러나 영화는 그렇게 모습을 바꿔가면서도 견고하게 유지되어 온 스파이더맨의 세계관에 '왜 그래야 하냐'는 근본적인 문제제기를 합니다. 그 질문이 관객의 뇌리에 날카롭게 꽂히는 것은, 멀티버스라는 개념을 통해 수많은 우주가 존재할 수 있다는 상상에 흥미를 느끼며 몰입하면서도 그 속에 놓인 인물의 향방은 우주의 수만큼 뻗어나갈 수 있는 게 아니라 반드시 '정리되어야만 하는' 것으로 내심 받아들여왔기 때문입니다. 즉 영화의 이러한 문제 제기는 수십년 간 가열차게 이용되어 온, 그러면서도 캐릭터의 운명은 정해진 길로 가둬 온 스파이더맨에 대한 도전이자 당장 마블부터도 앞장서 꺼내들며 신나게 써먹어 온 멀티버스라는 개념의 자가당착에 대한 도전이기도 한 셈입니다.


<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Spider-Man: Across the Spider-Verse, 2023)


이런 이유로 전편에선 아무래도 생소했던 마일스 모랄레스라는 이름의 스파이더맨이 이번 편에서는 가장 뜨거운 스파이더맨으로 다가옵니다. 영화에서 멀티버스는 그저 마블 코믹스 또는 MCU의 팬들을 위한 서비스나 이벤트에 머물지 않습니다. 영화 속 마일스에게 멀티버스는 아직 정체성이 정립되지 않은 방황기에 만난 초유의 관문이자, 동시에 무한한 가능성으로 이끄는 기회입니다. 전편에서부터 이미 자신과 같은 스파이더맨이 여러 세계에 수많이 분포해 있다는 걸 알게 된 마일스에는 당면한 미래 앞에서 '이 운명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하며 고뇌하기 이전에, '누가 오직 이것만이 내 운명이라고 했는가' 하며 반문하며 저항에 나섭니다. 이렇게 우리는 지금껏 본 그 어느 스파이더맨보다도 강건한 저항정신을 지닌 스파이더맨을 만나게 되고, 그의 행보를 따라 전개되는 이야기는 스파이더맨에 관한 운명론을 비웃듯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며 후반으로 갈수록 충격을 더합니다. 한계를 뛰어넘은 표현방식을 따라 경계가 사라지는 세계를, 경계가 사라지는 세계를 따라 운명을 허무는 이야기를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데드풀의 경우처럼 마블에서도 간혹 스크린 안과 밖의 경계를 허물며 스크린 안과 밖의 벽, 즉 '제 4의 벽'을 넘는 영화들이 종종 있었습니다. 하지만 <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는 그 중에서도 가장 대담한 태도로 '제 4의 벽'을 넘는 영화라 할 수 있겠습니다. 코믹스의 프레임을 넘어 관객 앞으로 다가온 히어로가 건네는 것이 가벼운 농담이 아니라 묵직한 화두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다 아는 이야기, 다 아는 세계라는 게 있다고 생각하는가'라는 그 질문은 벌써 과소비로 인한 피로감을 자아내는 듯 하던 멀티버스의 효용에 대해 새삼 각성시키며, 향후 3편까지 이어질 이 애니메이션 3부작의 비범한 근간을 짐작하게 합니다. 한 개인의 파란만장하고 드라마틱한 성장 앞에서 수많은 가능성의 세계는 어쩌면 고르기 까다로운 선택지에 지나지 않을 거라 생각하면, 이 영화가 제시하는 멀티버스는 더 이상 피로하게 다가오지 않고 더 큰 영웅의 탄생을 부르는 운동장으로 다가옵니다. 


<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Spider-Man: Across the Spider-Verse,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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