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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진만 Jul 02. 2023

박제된 세계를 향한 조바심 혹은 그리움

인상적인 영화리뷰 2023 - <애스터로이드 시티>

<애스터로이드 시티>(Asteroid City, 2023)


할리우드 미쟝센의 대가인 웨스 앤더슨 감독의 새 영화 <애스터로이드 시티>는 이번에도 잠깐 지나가는 역할까지 주연급 배우들로 채워질 만큼 초호화 캐스팅으로 그만의 별천지를 구축하는 가운데, 작은 마을에서 열리는 천문학 행사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시놉시스는 언뜻 어른들을 위한 동화가 아닐까 싶었지만, 웨스 앤더슨 감독이 최근 작품에서 연이어 보여준 감수성의 연장선상에서 이 영화 역시 새삼 울적한 기분을 일으키는 작품이었습니다. 늘 자신만의 고유한 프레임 안에서 세상을 정교하게 가꾸는 감독은 이제 그 액자에 켜켜이 쌓이는 세월의 무게를 외면하게 어렵게 된 모양입니다.


1955년 인구 87명의 몹시 작은 마을 애스터로이드 시티에 종군 사진기자 오기(제이슨 슈왈츠먼)와 장남 우드로(제이크 리안)와 두 딸들,  유명 배우 밋지(스칼렛 요한슨)과 딸 디아나(그레이스 에드워즈), 교사 준(마야 호크)와 제자들 등 아이들을 동반한 일행들이 모여듭니다. 중앙에 도로를 두고 양옆에 식당, 주유소, 모텔 정도만이 보일 뿐인 이 작은 사막 마을에 그 사람들이 모여든 이유는 3천년 전 이 마을에 떨어진 운석을 기념하는 '소행성의 날'을 맞아 열리는 천문학 행사에서 상장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깁슨 장군(제프리 라이트) 아래 올해도 '소행성의 날' 기념 행사가 열리려는 그때, 갑자기 나타난 외계 존재로 마을은 큰 혼란에 빠집니다. 순식간에 마을은 정부에 의해 격리되고, 행사 때문에 잠깐 왔다가 일주일 이상 갇혀 지내게 된 사람들은 그 와중에도 새로운 만남과 추억의 시간들을 보내긴 하지만 이 타지에서의 멈춰진 시간을 어떻게 견딜지 고민합니다. 이상의 내용은 실존하는 마을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이야기가 아닌 '애스터로이드 시티'라는 연극의 내용이고,

등장하는 인물들은 실제 그 처지에 놓인 사람들이 아니라 그 사람들을 연기하는 연극 배우들입니다.


<애스터로이드 시티>(Asteroid City, 2023)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프렌치 디스패치> 등 웨스 앤더슨 감독은 최근 액자식, 그것도 여러 겹의 액자식 구성을 무척 선호하게 된 듯 합니다. 예고편으로 볼 땐 아닌 줄 알았던 <애스터로이드 시티>는 스포일러랄 것도 없이 아예 시작부터 액자식 구성임을 천명합니다. 이 액자식 구성 안에서 우리가 영화 속 '애스터로이드 시티'라는 마을을 만나게 되는 방식 또한 예상과 조금 달라지는데, 애스터로이드 시티에 이르기 전에 그 도시를 창조해 내는 작업 과정의 풍경을 먼저 거치게 되기 때문입니다. 타자기를 두들기는 일면 고독하게도 보이는 작가의 집과 건조한 리허설 현장은 일부러 빛을 거두어 가기라도 한 듯 어두운 흑백 톤으로 제시되고, 뒤이어 그들의 작업을 거쳐 나타나는 애스터로이드 시티의 풍경은 그렇게 수거한 빛들을 한꺼번에 쏟아 붓기라도 한 듯 현란하고 쩅합니다. 그런데 이로써 애스터로이드 시티의 풍경이 아련함을 더하는 것은, 이런 장치로 인해 지나간 세월 안에 보관된 풍경임이 더 명확해지기 때문입니다. 다수의 영화에서는 과거든 현재든 미래든 시점을 막론하고 세계의 현재성, 실재성을 가급적 살리며 몰입을 이끌어내려 하는데, <애스터로이드 시티>가 보여주는 이런 장치는 현재가 아니고 더는 실재하지 않는 이야기임을 일부러 강조하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이러한 거리두기가 역설적으로 추억의 순간을, 보내기 싫은 순간을 담은 액자 속 풍경처럼 느껴지며 아련함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렇게 현실의 빛까지도 모두 그러모아 담아 낸 애스터로이드 시티는 사상 초유의 격리 사태로 혼란스런 와중에도 생기를 품고 있습니다. 격리된 공간 안에서 멈춰진 듯한 시간을 보내야만 하는 사람들은 저마다 신음하며 풀려날 날만을 고대하면서도, 상 받으러 온 학생들답게 총명한 소년소녀들이 짚어주듯 진실과 의미를 발견하는 순간은 이 멈춰진 시공간 안에서도 존재하기 마련이죠. 오기와 밋지 사이에서 일어나는 어른의 감정, 그들의 아들딸인 우드로와 디아나 사이에서 생겨나는 풋풋한 소년소녀의 감정, 여기 와서 엄마의 죽음을 처음 알게 된 어린 딸들과 그들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다독이려는 할아버지 스탠리(톰 행크스)의 이야기, 이것도 나름 흥미로운 모험인지 호기롭게 노래를 만들어 선생님 준 앞에서 들려주는 아이들과 이를 거드는 카우보이 몬타나(루퍼트 프렌드) 등 외계 존재의 출현과 그로 인한 마을의 격리라는 초현실적인 사건 가운데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에피소드들이 잔웃음을 자아냅니다. 3천년 전에 떨어진 운석이 마을에 여태 보관되어 있듯이, 지금은 좀이 쑤셔도 언제고 기억하게 될 순간들이 이 마을에는 차곡차곡 쌓여갑니다. 그리고 이곳에서의 순간은 너무도 대비되게 건조하게 묘사되는, 연국 '애스터로이드 시티'를 준비하는 작가와 극단의 장면으로 넘어오며

박제된 시간, 박제된 세계로서의 의미를 얻습니다. 그런데 이 시간과 세계를 향한 마음이 양가감정이라는 것이 참 얄궂다는 겁니다.


<애스터로이드 시티>(Asteroid City, 2023)


애스터로이드 시티에 격리된 사람들의 아우성처럼, 시간이 흘러야 나타나는 성장과 성취를 생각하면 우린 멈춰진 시간을 쉬이 용납하지 못합니다. 영화의 기술이 이토록 진보할 수 있었던 것도 결국 시간의 흐름 속에서 각성과 노력이 축적되어 왔기에 가능했듯이 말이죠. 그러나 그 시간들 속에 언제나 찬란한 시절은 존재하고, 그렇게 시간을 흘려보내고 나면 꼭 잡을 수 있을 때 잡지 못한 걸 후회하며 되뇌이고 돌이키곤 하니 얼마나 사람이 변덕스러운지요. 흐르는 시간의 덕을 보면서 동시에 야속하다 원망도 하게 되는 우리를 발견합니다. 그러니 어쩌면 애스터로이드 시티 곳곳을 채우는 배우들의 면면 또한 화려한 것이 당연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웨스 앤더슨의 페르소나로 활약해 온 제이슨 슈왈츠먼이 그 중에서도 실질적인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오지 역을 연기하며 시절을 기록하고, 웨스 앤더슨의 영화에 첫 출연하는 스칼렛 요한슨은 시절의 빛나는 한 페이지로서 밋지의 의연한 모습을 매력적으로 연기합니다. 첫인상은 고지식한 어르신 같아 보였으나 손주들에게는 한없이 부드러운 할아버지 스탠리를 따뜻하게 연기한 톰 행크스도 인상적이었네요. 이 밖에도 틸다 스윈튼, 에드워드 노튼, 애드리언 브로디, 스티브 카렐, 마고 로비 등의 배우들이 단역 수준의 역할까지 흔쾌히 맡아 장면장면을 채우는데, 그 화려한 면면이 영화가 보존하고픈 시간과 시절의 무게를 더하는 듯도 해 강한 인상을 남깁니다.


애스터로이드 시티가 3천년 전에 떨어진 운석을 아직도 기념하듯, 그 지나간 시절의 한 형태를 끊임없이 반복하며 무대에 올리듯, 보존하고 재현하며 박제함으로써 흐르는 시간의 불가항력 앞에서 빛나는 것을 넘어 우스꽝스러워질 때까지 저항하는 것이 인간의 숙명일까요. 이제는 양식화된 영화 미쟝센의 대명사로 자리잡은 웨스 앤더슨의 이러한 시청각적 완벽주의는 어쩌면 (그것이 영화의 시절이든 개인의 시절이든) 이제는 돌아올 수 없는 어떤 시절들을 소환하려는 부단한 노력은 아닐까 싶었습니다. 수 겹의 액자 속에 그 박제된 시간과 세계를 담아내는 이 영화 또한 시간을 향한 나름의 저항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애스터로이드 시티>(Asteroid City,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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