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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진만 Jul 09. 2023

악몽이 선사하는 어드벤처 혹은 테라피

인상적인 영화리뷰 2023  - <보 이즈 어프레이드>

<보 이즈 어프레이드>(Beau is Afraid, 2023)


단 두 편의 영화로 자신만의 독보적인 장르 세계관을 구축한 아리 애스터 감독의 신작 <보 이즈 어프레이드>는 모두 호러 영화였던 감독의 전작들과 달리 심리극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그 심리라는 게 주인공의 도무지 그치지 않는 불안과 두려움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유사 호러' 영화라고 해도 좋겠습니다. 확실히 할 수 있는 것은 편한 마음으로 부담없이 즐길 영화를 찾으시는 분들이라면 절대 선택해선 안되는 영화라는 점입니다. 3시간동안 잦아들 줄 모르는 불안의 오딧세이는 누군가에게 흥미진진한 탐구거리일 것이고, 누군가에게는 벗어나고픈 악몽일 것입니다.


편집증이 있는 중년의 남자 보(호아킨 피닉스)는 갖은 사건사고로 조용할 날 없는 빈민가 아파트에서 혼자 살고 있습니다. 그런 그에게 유독 각별한 존재가 바로 엄마 모나(패티 루폰)인데, 보는 곧 비행기를 타고 엄마 모나를 만나러 가기로 돼 있습니다. 그런데 집을 나서려는 찰나 캐리어와 아파트 열쇠를 잃어버리면서 엄마를 만나러 가기 어렵게 되고, 불안한 마음에 엄마한테 전화를 하니 돌아오는 것은 "네가 옳은 선택을 하리라 믿는다"는 더욱 불안하게 하는 엄마의 대답입니다. 집밖은 전쟁터 같고 속시끄러운 마음 붙잡으며 전전긍긍하는 보에게 불현듯 충격적인 소식이 날아들고, 보는 무슨 일이 있어도 엄마를 만나러 가야겠다면 헐레벌떡 집밖으로 나서지만 난데없는 자동차 사고로 상황이 완전히 꼬입니다. 보는 자기들이 사고 낸 장본인이라는 로저(네이선 레인)와 그레이스(에이미 라이언) 부부로부터 간호를 받지만, 이것은 엄마를 만나러 가려는 보의 앞에 펼쳐질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위기와 위협과 함정, 그 시작에 불과합니다.


<보 이즈 어프레이드>(Beau is Afraid, 2023)


세상 밖으로 나오는 신생아 시점의 보에서 출발하듯, 영화는 시작부터 끝까지 철저히 보의 관점으로만 이야기를 전개합니다. 보는 만물과 만사에 대한 온갖 왜곡된 조바심을 갖고 있고, 그 조바심이 그대로 투영된 세상은 그래서 대단히 혼란스럽고 폭력적입니다. 처음엔 무슨 디스토피아도 아니고 이게 현실이라는 건가 싶겠지만, 이런 보의 시선으로 본 세상이므로 개연성을 따지는 것은 곧 무의미해집니다. 상상하기 싫은 상황들만 골라서 연쇄적으로 일어나는 영화 속 세상은 설령 실제 상황이 아니더라도 보의 눈에는 모두 실재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불안과 망상에 갇힌 보의 고유한 세상이자 이 영화가 다루는 유일한 세상이기에 관객은 묻거나 따질 여유 없이 그 세상을 누빌 수 밖에 없는 것이죠. 감독의 전작인 <유전>과 <미드소마>가 말도 안되는 상황 속에 던져진 개인의 혼란을 좇아간다면, <보 이즈 어프레이드>는 역으로 개인의 혼란스런 심리 상태가 말도 안되는 상황을 만들어 낸다고 보시는 게 좋을 겁니다. 그러나 이렇게 마음 먹는다고 해도 영화가 보여주는 이야기를 보이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란 녹록치 않습니다. 끓는점 언저리를 얼쩡거리다 왈칵 넘쳐버리는 주전자처럼, 영화는 예고 없이 닥치는 예측불가의 상황들로 심장을 덜컹거리게 하기 때문입니다. 납득도 안되는 불안과 공포로 가득한 타인의 세상을 누가 선뜻 비싼 돈 주고 보러 가겠습니까만 그럴 만한 것이, 아리 애스터는 과연 천재감독답게 이를 단순히 극도로 고약한 심리적 투정으로만 그리는 데 그치지 않고 날 때부터 부여되기에 떨쳐낼 수 없는 인간의 본연적 죄책감과 부채의식의 관점에서 다루면서 뜻밖의 흥미를 유발합니다.


"왜 갓 태어난 아기가 울질 않느냐"는 엄마 모나의 불안에 찬 아우성과 함께 세상 밖으로 나온 보의 시점에서 시작하는 영화는, 이후 보가 내내 보여줄 불안과 공포에 찬 마음이 그에겐 어떤 특정 사건에서 비롯된 후천적 산물이 아닌 선천적 구성 요소일 것임을 암시합니다. 제목에 들어가는 '어프레이드(afraid)', 즉 '두려워하는'이라는 뜻의 단어 뒤에는 보통 'of'가 붙어 두려움의 대상을 명확히 지칭합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에겐 별 느낌 없는 대상이 다수이고 두려운 것은 소수이기 때문인데, 이 영화의 제목에는 그 'of'가 들어가 있지 않죠. 그래서 '보 이즈 어프레이드'라는 제목의 뜻이 보가 두려워 한다는 것인지 보가 두려운 존재라는 것인지 헷갈릴 정도인데, 아마도 이것은 보에게는 예외적으로 절대 다수가, 어쩌면 세상의 모든 것이 두려움의 대상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 두려움이란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엄마 모나에 의해 세상에 태어났을 때부터 이미 존재한 것이니 더욱 무겁고 거대한 것이었을테죠. 영화 후반부에 가서 드러나는 엄마 모나의 그간 행적에서 알 수 있듯, 갖은 고통을 감내하며 보의 버팀목이 되어준 엄마 모나는 보의 존재와 세상을 만들고 유지시켜주며 그와 각별한 유대관계를 형성해 왔습니다. 그러나 나약한 보에게 그것은 축복이 아닌 악몽이었을 겁니다. 자신의 삶은 그런 엄마의 노력에 비하면 턱없이 모자라고 보잘 것 없고 나아가 배은망덕한 수준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완벽히 기대에 부응하지 않을 바에야 시도조차 하지 못하는 보의 (편집증에 입각한) 무능함으로 인해 그의 삶을 지배해 왔습니다. 그가 위험천만한 빈민가에 따로 떨어져 나와 혼자 살고 있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 그는 능력이 돼서 엄마로부터 독립한 것이 아니라 그저 엄마가 두려워서 도망치듯이 떨어져 나온 것 뿐입니다. 뭘 할 수 있다거나 해야 한다는 계획이나 역량 같은 것도 없이 말이죠.


<보 이즈 어프레이드>(Beau is Afraid, 2023)


그래서 엄마에게 어떻게든 가야 한다는 보의 여정은 어떤 목적지로 향하는 성격이면서 동시에 어딘가로부터 도피하는 성격 또한 갖고 있습니다. 가족의 품이란 대가를 바라지 않기에 무한히 넓다지만 만에 하나 대가를 바란다면 그 기대치 또한 무한히 클 것이라는 딜레마는, 갖은 방향으로 확장되는 보의 여정이 흘러갈수록 정리되거나 해결되지 않고 더 걷잡을 수 없는 혼란으로 향하게끔 만듭니다. 영화는 믿을 수 없는 장면들의 연속으로 때로는 섬뜩한 호러 장르의 문법으로, 때로는 과격한 액션 장르의 문법으로, 심지어는 지금껏 아리 애스터의 영화들에서 본 가장 서정적인 문법으로까지 그리며 그 믿을 수 없는 여정 속을 정면 돌파합니다. '효'라는 한국식 개념과 통하는 듯 상반된, 자식을 향한 부모의 기대와 부모를 향한 자식의 부채의식이 극단에서 빚어내는 이 혼돈의 어드벤처는 그 트라우마 앞에 선 인간을 끌어안는 게 아니라 박살내는 결과를 향해 달려가지만, 한편으로 테라피같아 보이기도 했습니다. 마주하기 너무 두려워서 차라리 범죄가 난무하는 빈민가라도 좋으니 도피만이 상책이었던 보로 하여금 그 두려움의 대상으로 향하게끔 하는, 그래서 어느 쪽으로든 불안과 공포의 긴장상태를 매듭짓고 끝을 보게끔 하는 아리 애스터만의 테라피처럼 느껴졌달까요. <유전>과 <미드소마> 때까지만 해도 '힐링 영화'라는 일부 평가가 그저 농담처럼 들렸지만 이번에는 일면 그럴싸하게 다가온 것도 같습니다.


아리 애스터가 만들어낸 또 하나의 대환장적 세계의 탐험자이자 동시에 창조자일지도 모를 보 역의 호아킨 피닉스는 이번에도 명연을 보여줍니다. 수틀리면 본때를 보여줄 것만 같은 날카로운 연기의 대명사인 그가 영화 내내 울 것 같은 얼굴로 'What?'을 되뇌이는데, 이게 뜻밖의 웃음 포인트가 되어 보는 이로 하여금 헛웃음을 유발합니다. 사실 그의 눈앞에 펼쳐지는 상황들이 벌어지는 데 스스로가 일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당황스럽기 이를 데 없다는 그 표정은 관객에게도 더 큰 당혹감을 안깁니다. 그런 얼굴을 하고 어디론가 떨어지거나 도망치거나 구르는 등 몸을 사리지 않으며 보의 모험에 전력으로 뛰어드는 호아킨 피닉스의 연기는 이 내키지 않는(?) 모험에서까지도 저항하기 힘든 흡인력을 자랑하며 기대를 저버리지 않습니다. 그 밖에도 보를 치었다가 구해주며 병주고 약주는 친절한 부부 로저와 그레이스 부부 역의 네이선 레인과 에이미 라이언, 한창 반항할 때인 그들의 딸 토니 역의 카일리 로저스, 돌보고 있는 폭력적 성향의 남자 지브스 역의 프랑스 배우 드니 메노쉐, 현재까지도 보의 마음 한구석에 깊이 자리하고 있는 첫사랑 일레인 역의 파커 포시, 그리고 보의 문제적 엄마 도나 역의 패티 루폰 등 다채로운 얼굴의 배우들이 등장 지점마다 각기 다른 방식으로 돌아있는(?) 연기를 선보이며 긴장을 놓을 수 없게 합니다.


매 작품마다 명쾌한 설명을 미뤄둔 채 나락으로 향하는, 그래서 도무지 해소되지 않는 공포감을 선사해 온 아리 애스터 감독이 그 작품들을 통해 지속적으로 보여준 것은 가족이든 종교집단이든 마을이든 공고히 구축된 공동체에 속한 불안한 개인의 내면이었습니다. 이번 <보 이즈 어프레이드>를 통해 그 불안의 정서를 동력으로 호러 장르를 넘어 이제는 코믹 어드벤처(?) 장르로까지 진출한 감독의 머릿속은 어떻게 생겼을까 궁금하기도 합니다만, 어떤 형태의 공동체든 소속되어 있을 수 밖에 없는 개인의 내면을 이토록 집요하게 뒤틀며 탐구하는 감독의 앞으로를 더욱 기대하게 되는 영화였던 것은 분명합니다. 


<보 이즈 어프레이드>(Beau is Afraid,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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