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상적인 영화리뷰 2024 - <조커: 폴리 아 되>
- 스포일러 있습니다 -
코믹스 원작으로서는 비평적, 흥행적으로 이례적인 성공을 거둔 <조커>의 5년만의 속편 <조커: 폴리 아 되>를 보았습니다. 전편은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 수상,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수상 등 예술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은 데다 순수 악의 탄생을 한편으론 억압되고 소외된 자가 폭발시키는 분노로 해석되게 하며 분분한 찬반 양론을 낳았더랬죠. 그런만큼 속편에 대한 기대는 각별히 컸고, 게다가 조커의 소울메이트라고 할 수 있는 할리퀸이 등장해 '2인조'로 활약하게 될 것이라는 소식은 기대감에 불을 지폈습니다. 그러나 그 커다란 기대 끝에 모습을 드러낸 <조커: 폴리 아 되>는 비평적으로는 물론 대중적으로도 거의 '지탄'에 가까운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분명한 건 <조커: 폴리 아 되>는 길고 먼 길을 돌아 해야 마땅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그 들어 마땅한 이야기가 어째서 대중의 마음에 가 닿지는 못한 것일까요.
무명의 코미디언 아서 플랙(호아킨 피닉스)이 '조커'라는 닉네임으로 나타나 유명 생방송 토크쇼 진행자를 포함한 5명(이지만 사실은 6명)을 살해한 혐의로 정신병원에 최고 수준으로 격리 수용된지 2년이 흘렀습니다. '조커'라는 가면을 벗어던진 후 한없이 초라하고 궁색한 모습을 하고 있는 아서는 간간히 나타나는 상상을 통해서만 환영 같은 웃음을 지을 뿐입니다. 재판을 눈앞에 두고 변호사 메리앤(캐서린 키너)은 그의 범죄가 정신질환으로 인해 벌어진 것임을 입증해야 판결에 유리하다고 강조합니다. 이를 위해 변호사가 주장하는 전략은 바로 아서 플랙의 또 다른 인격으로서 '조커'가 발현되었다는 것. 그런 와중에 아서는 정신병원의 다른 병동에서 노래 활동을 하고 있는 여인 리 퀸젤(레이디 가가)에게 첫눈에 반하고, 리 역시 아서에게 강렬히 이끌리게 됩니다. 같은 노래 활동을 하면서 급속히 가까워진 둘은 뜨거운 사랑에 빠지죠. 그런데 문제는 리가 선망하는 것이 '조커'였을 때의 아서 모습이라는 것. 리는 아서의 곁에서 조커의 모습을 다시 한번 발현하길, 조커와 합일하길 부추기고, 재판을 앞둔 아서의 내면은 다시 혼란 속으로 빠져듭니다.
<조커: 폴리 아 되>는 최근 개봉한 <베테랑2>에 이어 관객의 기대를 배반하는 류에 속하는 또 하나의 속편입니다만, 그 배반의 정도(?)가 더 심한 편입니다. 전편이 관객에게 선사했던 (위험하지만 짜릿한) 쾌감을 일말이라도 제공할 수 있는 경로를 완전히 봉쇄하기 때문입니다. 영화의 제작 소식이 전해졌을 때 관객들이 가장 많이 기대한 것은 광기의 전설들이 쌍을 이뤄 얼마나 세상을 뒤집어 엎으며 광기의 '시너지'를 낼지였을 것입니다. (이미 <수어사이드 스쿼드>에서 실망한 전적이 있기에 그 기대는 더욱 절실했을테고요.) 그러나 그렇게 시너지가 폭발할 것이란 기대는 애초에 가질 수가 없는 것이, 영화 내내 아서 플랙은 (사실 수감에 가까운) 수용된 정신병원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반인권, 비윤리적인 정신병원 안에서 볼거리나 즐길거리란 기대할 수 없으며, 우리가 볼거리나 '스펙터클'이라고 부를 수 있는 장면은 대부분 아서의 내면을 드러내거나 과거를 회상할 떄 나타납니다. 상상이나 회상은 언젠가 끝나기 마련이며, 끝난 이후에는 지독히 절망적인 현실의 존재감이 더욱 더 짙어질 뿐입니다. 그렇게 영화는 전편에서 '악의 아이콘', '분노의 결정체'로 부상한 아서를 부흥까지 갈 것도 없이 곧장 나락으로 떨어뜨립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몰락은 정신병원에 수용된 아서가 조커라는 광기의 허영을 벗어버리고 현실과 직면하게 되면서 더욱 또렷해집니다.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를 과거 친밀했지만 지금은 그를 공포에 떨며 바라보는 동료의 눈빛을 통해 깨닫습니다. 그 결과 지금 자신이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정신병원에서 마주하는 숱한 모멸감으로 인해 깨닫습니다. 그럼에도 자신이 어떤 대접을 받고 있는지를 바깥에서부터 어렴풋이 느껴지는 '조커'를 부르짖는 수많은 이들의 함성을 통해 깨닫습니다. 명백히 용서받지 못할 짓을 저질렀음에도 그가 그 과정에서 만들어낸 '조커'라는 아이덴티티에 환호하며 그의 석방을 힘주어 외치고 있는 세상과 마주하며 무언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다는 것을 그는 느꼈을 것입니다. 실은 불꽃과 같은 악의 탄생이 아니라 시커먼 재와 같은 죄의 찌꺼기였음을. 이처럼 아서가 뼈저리게 각성한, 자신이 드리운 짙고 어두운 그림자에는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 리 또한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번 <조커: 폴리 아 되>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요소가 되었을 뮤지컬 장면은 대부분 아서의 심리 상태를 표현할 때 펼쳐집니다. (조커 같은 자가 탄생하고 그런 자에게 열광하는 도시의 현실에서 뮤지컬이 펼쳐질 리가 없습니다.) 매 장면에서 아서는 조커가 되든 아니든 어떤 형태로 자신의 욕망을 발현하지만, 그만큼 피폐한 현실과의 괴리는 심합니다. 뮤지컬 속 아서의 상태는 점차 고양되어 가는데 현실에서는 나아질 기미가 없으니, 뮤지컬 장면은 아서의 광기를 돋우는 수단이 아니라 오히려 점점 현실과 멀어져 고립되어 가는 아서의 절망적인 상황을 또렷하게 하는 장치인 셈입니다. 그 한가운데를 장식하는 할리퀸, 즉 리는 우리가 흔히 조커-할리퀸의 관계에서 떠올릴 수 있는 '뮤즈'의 이미지가 아니라 어쩌면 '세이렌'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서로 하여금 조커로 발현하기를 끊임없이 유혹하지만 일말의 개선 여지가 없는 현실에 비추어 보면 그녀의 그러한 유혹은 오히려 아서를 더 큰 나락으로 이끌테니까요. 이렇듯 감독은 장르의 전환까지도 불사하면서, 아서가 직면한 절망적인 현실과 자아의 형편없는 실체를 가감없이 보여주려 합니다. 아서가 조커라는 이름으로 이룩해 가던 악의 신화가 전편의 정점을 지나 나락으로 가는 과정은 역시나 강렬한 한편, 전편만큼 보는 이를 빨아들이는지는 의문입니다. 내면의 심연을 박차고 올라오지 못한 채 심연 속에서 내내 허우적대는 조커의 이야기를 좇다 보니, 느와르나 스릴러 같은 장르적 쾌감까지 희생시켜가며 아트하우스 영화에 가까운 긴 호흡이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그 힘보다도 무거운 어둠의 존재감으로 인해 영화의 취지는 알겠으나 그게 관객의 마음에까지 연착륙하지는 못하는 느낌입니다. 그래서인지 통렬하고 충격적인 결말은 더욱 헛헛하게 보는 이의 마음을 짓누르고요.
그럼에도 호흡이 기대되었던 호아킨 피닉스와 레이디 가가의 '광인 협연'은 기대만큼 강렬합니다. 여전히 뒤틀린 온몸과 얼굴 주름으로까지 감정을 토로해내는 호아킨 피닉스는 광기를 연료삼아 도약하려는 내면과 점점 침잠해가는 현실을 수시로 넘나들며 그야말로 '맹연'을 보여줍니다. 종이 한 장 차이로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독보적 광기의 소유자가 누구라도 건드리면 산산조각 날 것만 같은 어둡고 유약한 내면의 소유자가 되는 인물을 코믹스 속을 넘어 현실에 발을 딛고 선 캐릭터로 구현하는 데 성공합니다. 이런 '연기의 신'과 협응하는 레이디 가가의 에너지도 만만치 않습니다. 기존에 봐 온 할리퀸과는 다소 다른 접근으로, 뱀처럼 또아리를 튼 채 뒷걸음질치려는 아서를 열렬히 앞으로 끌어당기는 여인을 그려내는 필치가 강렬하게 다가옵니다. 이 둘의 호흡에서 분출되는 에너지는 이토록 강렬한데, 영화 또한 이들이 빚어내는 시너지 효과를 최대한 이끌어낼 수 있는 활력을 갖추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그래서 더 강하게 남습니다.
<조커: 폴리 아 되>는 토드 필립스 감독과 호아킨 피닉스가 해석한 '조커'라는 캐릭터를 완성시키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영화였다는 것을 느낍니다. 전편은 조커라는 불세출의 빌런을 주인공으로 삼아 보기 드물게 강렬한 연대기를 낳았지만 그 부작용으로 조커가 안티히어로 오도되기도 했기에, 이번 영화는 그렇게 일부가 잘못 받아들인 조커의 정체성을 확실히 정립하고자 전편을 보면서 우리가 느꼈던 일말의 카타르시스들을 조목조목 부정하는 것입니다. 감독이 오랜 시간 코미디 장르에 천착해 왔음을 감안하면, 보잘것 없는 인물인 아서 플랙이 조커라는 이름으로 겪었던 찰나의 명멸은 한편으로 그저 자아가 비대할 뿐인 우스꽝스런 범죄자에게 보내는 거대한 조소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영화의 목적성과 그 목적성에 부합하는 표현 방식이 관객이 원했거나 적어도 만족이라도 했을 흥미와 몰입감을 이끌어내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하는 관계로, 만들어 마땅한 취지에 비해 두고두고 욕을 먹을 것 같다는 점이 그저 아쉬울 따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