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상적인 영화리뷰 2024 - <룸 넥스트 도어>
올해 베니스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새 영화 <룸 넥스트 도어>는 경력 내내 스페인어로 장편 영화를 만들어 온 알모도바르 감독이 처음 영어로 만든 장편 영화입니다. 영화는 그러나, 언어만 바뀌었을 뿐 감독이 자신의 인장을 오롯이 새겨놓고 몰두하는 화두를 변함없이 탐구하는 작품입니다. 주제적 요소만으로 '15세 이상 관람가'를 받을 만큼 다루는 소재는 논쟁적이고 논하는 주제는 무겁지만, 이상하게도 영화는 보는 내내 따뜻하고 아늑한 느낌을 줍니다. 그것은 아마도 지난날 '악동'이라 불렸던 감독이 이제는 '거장'으로 성숙해 가면서, 세월을 따라 함께 무르익은 시선으로 필연적인 두려움 앞에 놓인 보통의 인간들을 따스하게 어루만지기 때문일 것입니다. 너무 친밀하지도 너무 소원하지도 않은, 제목처럼 딱 벽 하나를 사이에 둔 옆 방 사람만큼의 관심을 기울이면서 말이죠.
긴 시간 파리에서 살다가 새 책 출간을 맞아 오랜만에 뉴욕에 온 작가 잉그리드(줄리안 무어)는 사인회 도중 우연히 만난 친구로부터 뜻밖의 소식을 듣습니다. 젊은 시절 뉴욕에서 같은 잡지사에서 일하며 내내 붙어 지낼 만큼 친했지만 이제는 연락이 끊긴지 오래된 옛친구 마사(틸다 스윈튼)가 악성 암에 걸려 뉴욕에서 치료 중이라는 것입니다. 잉그리드는 일정을 마친 후 그길로 곧장 마사를 찾아가 그동안 못다한 이야기를 나누며 어제 본 친구들처럼 돈독한 시간을 보냅니다. 마사와 딸의 소원한 관계에 대한 이야기라든지, 종군기자였던 마사가 취재현장에서 만난 드라마틱했지만 기사로 쓰진 않았던 이야기라든지, 한때 두 사람이 교대로 사귀었던 남자 데이미언(존 터투로)에 대한 이야기라든지. 마사는 예정된 새로운 치료법의 효과가 어떨지 기다리고 있지만, 내심 죽음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던 터였는지 그게 마냥 반갑지만은 않은 듯 합니다. 아니나다를까 기대했던 치료는 효과를 보지 못하고, 마사에게 이제 남은 시간은 길어야 1년 남짓. 둘이 함께 영화를 보러 온 영화관에서 마사는 잉그리드에게 덜컥 자신의 결심을 이야기합니다. 고통스럽게 연명하는 대신 존엄하게 죽겠노라고. 그러면서 마사는 잉그리드에게 부탁을 합니다. 자신이 죽음을 맞기 위해 떠나게 될 곳에 동행해 달라는 것. 그리고 (잉그리드에게는 미리 말하지 않을) 그 어느 땐가 자신이 비로소 결심을 실행에 옮길 때 옆방에 있어 달라는 것입니다.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은 필모그래피 내내 약동하는 생의 감각만큼이나 자신의 작품에서 끊임없이 죽음을 다루어 왔고, 최근작인 <페인 앤 글로리>와 <패러렐 마더스>에서는 연작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죽음을 중요한 주제로 다루어 왔습니다. 이번 <룸 넥스트 도어>가 주의깊게 들여다 보는 것 역시 죽음입니다. 감독은 생을 향한 욕망을 당연스럽게 생각하는 것만큼이나 죽음 또한 필연적인 것으로 여깁니다. 특히 영화에서 죽음의 이미지는 비단 시한부 선고를 받은 마사에게서만 비치지 않습니다. 마사가 회상하는 자신과 첫 남편의 이야기에서, 마사가 종군기자로서 세계 곳곳에서 겪어야 했던 전쟁터에서, 세계의 종말을 임박한 운명처럼 주장하는 데이미언의 모습에서까지. 죽음은 사실 우리가 당장 살아 숨쉬는 삶의 영역에서 멀지 않은 곳에 존재하고 있고, 우리는 언제 그런 죽음에게 곁을 내어주게 될지 알 수 없음을 깨닫습니다. 이런 진실 앞에서 우리의 삶이 궁극적으로 끝나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당연한 것이지만, 그토록 근원적인 공포를 자아내는 것임에도 누구나 예외없이 반드시 마주해야 하는 것이 죽음인 이상 어떻게 마주할 것인가를 끊임없이 고민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번 영화가 특히 주목하는 것은 죽음과 마주선 당사자보다, 그의 곁에 선 사람의 태도입니다. 영화는 '존엄사' 혹은 ' 조력 자살'이라고 불리는 행위를 소재로 삼지만 입 밖에 꺼내는 순간 수많은 논쟁을 불러일으킬 이 소재는 어디까지나 이야기의 마중물일 뿐, 진짜 이야기는 '죽음의 모습'이 아니라 이를 계기로 아끼는 이의 죽음을 곁에서 준비하게 된 사람이 겪게 되는 '삶의 변화'인 것입니다.
첫 장면에서 죽음을 소재로 한 책을 내고 사인회를 연 잉그리드는 팬의 물음에 '생명이 어째서 죽음에 이르러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밝히며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노골적으로 드러냅니다. 잉그리드에게 죽음은 삶과 완전히 대척점에 있는 것으로서, 삶의 가장 마지막에 미루고 미룬 끝에 맞이해야 할 최후의 공포인 것만 같습니다. 반면 마사에게 죽음은 지금 이전에도 이미 너무나 가까운 것이었습니다. 종군기자라는 그의 직업은 언제 어디서 맞이하게 될지 모를 죽음의 가까움을 실감하게 된 큰 계기였을테고, 그런 환경 속에서 삶은 그에게 그저 '연명하는 것' 이상의 떳떳한 당위성, 시들지 않는 존엄성을 갖춰야 하는 게 되었을 겁니다. 한때는 무척이나 가까웠지만 오랜 시간 굳이 연락하지 않을 만큼 그렇게 또 '죽고 못사는' 관계도 아니었던 잉그리드와 마사는 이처럼 죽음에 대해서도 상반된 태도를 지니고 있으면서 '죽음을 마음먹은 여정'이라는 기이한 여행에 함께 나서게 됩니다. 잉그리드는 마사와 동행하지만 마사와 같은 방을 쓰진 않습니다. 언젠가 반드시 누구보다도 가장 먼저 직접 목격하게 될 마사의 죽음이 두려워서일 것이고, 그런 잉그리드에게 마사가 제안하는 딱 '옆방'만큼의 거리는 어려운 와중에도 받아들일 만한 제안이었던 셈입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딱 그만큼의 거리가 잉그리드에게, 이를 지켜보는 우리들에게 죽음 앞에서 우리가 취할 수 있는 태도에 대해 가장 현명하게 알려주는 듯 합니다. 겪을 이에게도 그와 함꼐 할 이에게도 필연적인 고통과 공포를 야기할 죽음 앞에서, 그 고통이 두려워 차마 곁을 지키지는 못할지라도 옆방에 자리함으로써 홀로 죽지만 적어도 외롭게 죽는 것은 아님을 알게 해주는 것. 그 깊은 애도의 마음으로 떠나간 이가 남겨둔 것들을 기록하고 계승하며 세상에서 사라지지 않게 하는 것. 그것이 세상의 필연적인 일부분으로서 죽음을 자연히 체화할 수 있는 방법임을, 죽음이 소멸이 아니라 축적되는 개인 혹은 세계의 역사의 일부가 되게 할 수 있는 방법임을 말하는 것이죠.
알모도바르 감독 고유의 렌즈가 그대로 적용되었기에 밝고 선명한 원색들이 생명력으로 넘실거리면서 새삼 새롭게 다가오는 뉴욕을 배경으로, 실제로 동갑내기인 두 배우 틸다 스윈튼과 줄리안 무어가 풀어내는 격조 있는 대화는 그 자체로 명연입니다. 과거와 현재, 이상과 현실, 지식과 경험을 오가는 대화 속에서 두 사람은 단지 탁월한 이야기꾼일 뿐만 아니라 이야기 안에 자신의 감정과 신념까지도 오롯이 담아내는 생동감 넘치는 자아이기도 합니다. 죽음을 예비하는 마사 역의 틸다 스윈튼은 날로 쇠약해져 가는 와중에도 마지막 순간까지 세상 앞에 숨지 않고 스스로를 속이지 않은 자로서의 품위를 잃지 않는 인물의 우아한 초상을 부드럽고도 강인하게 그려냅니다. 죽음을 지켜보는 잉그리드 역의 줄리안 무어는 일종의 화자 역할로서 죽음에 대한 당연한 두려움을 드러내면서도 특별한 여행을 통해 삶과 죽음의 유의미한 가치와 그 모든 것을 초월하고야 마는 인간의 힘을 배워가는 모습을 섬세하게 보여줍니다. 여기에 두 여자 사이에 있는 남자로서 또 하나의 색다른 관점을 제공하는 데이미언 역의 존 터투로까지. 이 관록 있는 배우들이 언어의 바다에서 길어올린 말들로 어루만지는 인간의 두려움과 희망은 매 장면장면에서 보는 이의 가슴 위에 두터이 내려앉습니다.
심연 너머로 파고들어가며 사색하기보다 넘실대는 물결처럼 이야기하고, 넓게 뻗어나가는 풍경처럼 보여주는 <룸 넥스트 도어> 속 거장의 시선은 더없이 따스합니다. 영화 속에서 잉그리드와 마사가 여러번 읊조리는 제임스 조이스의 소설 '죽은 사람들' 속 대사는 산 자와 죽은 자 모두의 위로 떨어져 내리는 눈의 존재를 말합니다. 알모도바르 감독이 자신만의 시선으로 뉴욕을 캔바스 삼아 담아낸 수많은 색깔 위에 흰 눈이 내릴 때, 그 구절은 눈 앞의 풍경이 되어 우리의 눈길로 다가오고 그 풍경은 곧 잉그리드와 마사가 마주한 이야기가 되어 우리의 마음에 들어앉습니다. 보여주는 풍경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보고 있는 영화 한 편이 되어가는 순간이 무척이나 아름답습니다. 논쟁적 소재를 가지고도 일체의 자극을 배제한 채, 강렬하고도 정교하게 감독이 구축한 미장센 위에서 그 자체로 명연기와 명장면이 되는 배우들의 원숙한 대화를 듣고 있으니 이렇게 황홀한 경험이 없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