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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진만 Jan 15. 2022

누구를 위한 유산이었나

인상적인 영화리뷰 2022 - <하우스 오브 구찌>

<하우스 오브 구찌>(House of Gucci, 2021)


공교롭게도 <라스트 듀얼: 최후의 결투> 이후 불과 3개월 만에 이 거장 감독의 신작 <하우스 오브 구찌>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바로 전작의 장중한 위엄과는 완전히 상반된 건조하고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등장해 전혀 다른 즐거움을 줍니다.

사라 게이 포든의 동명 논픽션을 원작으로 세계적인 이탈리아 명품 브랜드 '구찌'를 만든 구찌 가문의 바람잘날 없던 나날들을

그 공동체에 진입한 외부인 여성의 시선에서 그리는 이 영화는, 스스로도 몰입을 거부하고 관객의 몰입도 막아내면서

어떤 '가족 기업'이 가족의 가치도 기업의 가치도 모두 잃게 되는 과정을 냉소를 곁들인 기록으로 써내려 갑니다.


1978년, 트럭 운송 회사 사장의 딸인 파트리치아(레이디 가가)는 한 파티장에서 만난 남자와 사랑에 빠집니다.

그녀를 사랑에 빠지게 한 것은 남자의 외모도 능력도 성격도 아닌 그의 이름이었으니, 그 이름은 바로 마우리찌오 구찌(아담 드라이버).

세계적인 명품 브랜드 '구찌'를 만든 구찌 가문의 3대손인 그는 변호사 공부를 하며 윗세대와는 다른 길을 가고 싶어 합니다.

마우리찌오의 이름값에 반한 파트리치아와 파트리치아의 당찬 모습에 매료된 마우리찌오는 불같은 사랑에 빠져 결혼에 골인합니다.

두 사람은 마우리찌오의 아버지 로돌포(제레미 아이언스)의 반대 속에 처음엔 독립하려 했으나,

뉴욕에서 구찌 브랜드의 미국 시장 공략에 힘쓰고 있는 마우리찌오의 삼촌 알도(알 파치노)가 부부에게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고,

세대에 걸쳐 쌓아올린 구찌라는 유산이 너무나 거대한 나머지 파트리치아와 마우리찌오는 구찌 경영에 개입하기 시작합니다.

파트리치아가 부부의 경영권 참여를 주도하는 가운데 곳곳에서 구찌라는 이름에 균열이 가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니,

능력에 비해 너무나 과분한 영향력을 가지고 자신의 브랜드를 론칭하려는 사촌 파올로(자레드 레토)를 견제하는 것부터 해서

가족으로 만들어진 이 거대 기업 안에서는 배신과 음모, 계략이 펼쳐지며 구찌라는 이름의 향방을 예측할 수 없는 곳으로 이끌고 갑니다.


<하우스 오브 구찌>(House of Gucci, 2021)


명품 브랜드의 찬란한 역사를 배경삼아 가족 내의 암투가 정신이 얼얼하게 소용돌이 칠 것만 같은 이야기이지만,

<하우스 오브 구찌>는 그런 기대치에 비해 내러티브적으로도 시각적으로도 무척 건조합니다.

오프닝을 제외하고는 시간 순서대로 흘러가는 이야기는 영화라기보다 기록처럼 보이는 그대로 펼쳐지는 가운데,

영화는 극의 중심에 있는 파트리치아를 비롯한 등장인물 누구에게도 쉽게 감정이입의 여지를 주지 않습니다.

더불어 세계 패션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브랜드에 관한 이야기답게 시대를 주름잡았던 브랜드의 이미지들이

현란하게 화면을 수놓으며 관객을 매료시킬 것 같지만, 영화는 인물이 화려한 옷을 입고 나와도 굳이 톤을 누르는 느낌입니다.

리들리 스콧 감독의 필모그래피를 되짚어 보면 그가 할 줄 몰라서 화면을 이렇게밖에 못 만든 게 아니라는 걸 짐작할 수 있습니다.

마치 우발적으로라도 매혹적으로 보이지 않게 하려는 듯, 영화는 이 가문의 이야기로부터 거리를 두고 있는 셈입니다.

그 속에서 과거에는 가문이었고 지금은 기업이 된 어느 공동체의 우습고도 개탄스러운 치부를 무표정으로 드러낼 뿐입니다.


감독이 주목하는 것은 대를 이어 역사를 쓰고 유산을 키우면서 가족과 기업의 가치를 모두 잃어버린 (당시) 구찌의 혼란한 정체성입니다.

이탈리아의 어느 장인의 이름을 걸고 탄생한 브랜드는 이름이 곧 브랜드인 만큼 그 이름을 지닌 가족이 경영의 중심에 섰습니다.

장인의 솜씨는 타고나 세계를 매료시켰지만 애석하게도 그 솜씨는 핏줄을 타고 흐르는 것이 아니었고,

같은 이름을 지녔다는 이유로 경영의 일원에 있거나 그 가장자리에서 기웃거리는 사람들로 인해 균열은 일어납니다.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믿고 무능력마저 사업 수완처럼 포장되어 과시의 대상이 되고, 기업의 생명력을 좀먹는 부조리는 방관됩니다.

한편으로 가족의 이름으로 유지하기엔 걷잡을 수 없이 그 규모와 영향력이 거쳐버린 기업의 속성은,

이윤을 추구하려 가족을 내치는 상황을 수시로 낳으며 가족의 연이 조각나게 만드는 상황을 초래하기도 합니다.

약삭 빠른 구성원들이 바보 같은 가족의 또 다른 일원들을 손가락 튕기듯 내치고 그 상대는 허탈하게 쫓겨나는 풍경은,

피식 웃음을 자아내면서도 실상은 전혀 멋있거나 카리스마 있어 보이지도 않는 재벌 가족의 비루한 싸움을 적나라하게 드러냅니다.

이후 브랜드가 어떤 과정을 거쳐 지금의 명성을 회복했는지 아는 사람이라면 이 가족의 이야기는 더욱 우스꽝스럽게 다가옵니다.


<하우스 오브 구찌>(House of Gucci, 2021)


이렇게 영화는 모두가 선호해 마지 않는 명품 브랜드의 창피하고 당혹스런 히스토리를 더하지도 덜지도 않고 그려내지만,

애써 누른다고 해도 눌릴 수 없이 자체발광을 뽐내며 관객을 호강시키는 것이 있으니 바로 배우들의 연기입니다.

레이디 가가, 아담 드라이버, 자레드 레토, 제레미 아이언스, 알 파치노 등 저마다 실화의 막장성에 과분한 일품 연기를 보여주죠.

전작에서 성공적인 배우 신고식을 치른 레이디 가가는 이번 영화에서 파트리치아 레지아니 역으로 작정하고 에너지를 뿜어냅니다.

마치 그녀가 무대에서 보여줘 온 강렬한 카리스마를 영화로 옮겨온 것처럼, 장면마다 잡아먹을 듯한 기세를 유감없이 펼칩니다.

하나같이 수동적이고 무능하고 관성적인 구찌 가문 구성원 내부를 그녀는 그 에너지로 마음껏 휘젓고 다니며 드라마에 힘을 싣습니다.

대를 이어 학습된 품위를 자연스럽게 발산하는 한편 이름에 매료돼 가문의 유산을 향한 탐욕을 대책없이 드러내는

마우리찌오 구찌의 양면성을 절제미가 돋보이는 연기로 그려낸 아담 드라이버 역시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가문의 '문제아' 파올로 구찌 역의 자레드 레토는 대단한 변신이라 할 만한데, 미리 알지 않으면 못알아 볼 분장도 분장이지만

전작들에서의 카리스마는 남김없이 날려버리고 하찮고 우스꽝스럽기 이를 데 없는 캐릭터의 면모를 표현한 디테일에 감탄하게 됩니다.

로돌포 구찌 역의 제레미 아이언스와 알도 구찌 역의 알 파치노 또한 가문이 이룬 열매 아래에서

우아함을 터득한 한편 좀스러운 보수성과 혈연주의를 버리지 못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명불허전의 고급 연기로 그려냅니다.


영화에서는 인물들의 입을 통해 '유산(legacy, 앞 세대가 물려 준 사물 또는 문화)'이라는 단어가 자주 언급됩니다.

이 유산이 과연 누구를 향한 것인가라는 질문에 구찌 가문은 아마도 제대로 답을 못했던 것 같습니다.

가족의 이름에서 시작된 유산은 이미 세계의 것이 되었으나 그것을 '가족을 향한 유산'으로 여겼던 그들의 편협했던 탐욕.

<하우스 오브 구찌>는 그렇게 혈연과 돈이 거미줄처럼 뒤엉킨 채로 휘청거리다 고꾸라져 가는 기업의 초상 안에서,

핏줄이 만든 '가족'이란 타고난 공동체와 같이 천성처럼 물질에 매달리고 이름에 인생을 거는 인간의 모습을 당연스럽게 비춥니다.


<하우스 오브 구찌>(House of Gucci,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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