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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진만 Jan 25. 2022

빛과 그림자, 두 얼굴이 써내려 간 하나의 역사

인상적인 영화리뷰 2022 - <킹메이커>

<킹메이커>(KIngmaker, 2021)


한국 현대 정치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인 김대중과 그와 함께 했던 '선거판의 여우' 엄창록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한 <킹메이커>는,

숭고한 목적을 위해 전혀 그렇지 못한 수단을 써야만 했던 한국 정치사의 두 얼굴을 속도감 있게 그려냅니다.

감독이 전작에서 보여준 감각적인 연출을 정치 드라마의 외피 안에서도 무리 없이 보여주는 가운데,

특정 인물을 칭송하기보다 역사의 한 페이지를 수놓았던 어느 파란만장한 관계를 입체적으로 그려내며 생각할 거리를 던져줍니다.


청년 서창대(이선균)는 세상을 바꾸는 데 일조하고픈 원대한 야망을 실현하고자 합니다.

그런 그의 눈에 때마침 들어온 이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맨발로 뛰며 유세중이던 정치인 김운범(설경구).

외딴 시골 동네부터 다지며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힘주어 외치던 운범의 모습에 필연처럼 매료된 창대는,

운범의 정치 행보에 함께 하며 선거운동에 뛰어드는데 그가 제시하는 선거 전략이 운범의 마음엔 선뜻 와닿지 않습니다.

승리를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창대의 전략이 내키지 않으나 아이러니하게도 그 전략에 힘입어

운범은 오랜 고전을 끝내고 선거에서 승승장구합니다. 지역구 국회의원에서 대선 경선 후보로, 그리고 대선 후보로까지.

정치판에서 점차 뚜렷한 족적을 남기기 시작하는 운범의 뒤에서 그림자가 되어 전략을 펼치는 창대는

점점 커지는 판의 규모만큼 점점 더 대담해지고, 그렇게 운범과 창대는 예측할 수 없는 관계의 소용돌이에 휘말립니다.

60-70년대 한국 정치계를 가로지르며 어지간하면 알 만한 굵직한 인물들이 가명으로 곳곳에 등장하지만,

영화의 중심은 어디까지나 동지이면서도 대립할 수 밖에 없는 운범과 창대의 기이한 관계입니다.


<킹메이커>(KIngmaker, 2021)


운범은 정치인이 되어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정치인이 되기까지의 과정도 정의로워야 한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수단이 결과를 정당화할 수 없다고 믿는 운범과 달리, 창대는 통하는 수단을 써야 원하는 결과에 이른다고 믿습니다.

진흙탕 같은 정치판에선 홀로 깨끗하려 해봤자 튀는 진흙을 막지 못할 뿐, 같이 진흙탕을 뒹굴어서라도 이겨야 한다는 것.

선거라는 '결투'를 통해 승리한 자만이 자기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정치의 세계에선 일단 이기는 것이 중요하다는 거죠.

원래 동업이나 회사 생활도 성향이 맞지 않으면 깨지기 마련인데, 둘의 이런 관계는 오히려 성공가도로 이어집니다.

빛의 영역에서 운범은 정의의 가치를 힘주어 외치며 정의에 목마른 대중을 매료시켰다면,

그림자의 영역에서 창대는 갖은 술수와 모략을 그에 상응하는 비열한 계략으로 상대하며 창대를 엄호하죠.

이런 운범과 창대의 관계는 목적과 수단이 몹시 이질적이었던 한국 정치사의 양면성 그 자체를 상징합니다.

국가 권력이 앚아서서 부정으로 선거판을 물들이고 있던 시대에는, 정의로운 지도자가 되기 위해

부정으로 맞불을 놓아야만 하는 딜레마를 마땅히 감내해야 했음을 두 사람의 '성과'를 통해 보여주는 것입니다.


전작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에서 익숙한 느와르의 공기 속 두 남자의 기묘한 관계성에 주목하며

독특한 감수성을 이끌어냈던 변성현 감독은 그러한 테크닉을 이 정치 실화극에 의외로 자연스럽게 녹여냅니다.

때론 케이퍼 무비처럼 박진감 있게, 때론 느와르물처럼 음침한 긴장감을 조성하며 선거판을 조명하면서도,

관계의 새로운 국면에 이르는 두 남자의 모습을 사이사이 인상적인 이미지로 그려내며 방점을 찍습니다.

전작에 이어 이번에도 감독은 거대한 세계의 소용돌이 위에 선 인물들을 밀착 관찰하며 울림을 주지만,

이번 영화에서는 그런 인물들을 향한 시선이 곧 그들이 속했던 실제 현대사의 어떤 얼굴로 투사된다는 점에서 더 의미 있습니다.

보다 성숙한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해 진흙탕 속을 발버둥쳐야 했던 한국 정치사의 고달픈 얼굴,

그 얼굴의 서로 다른 면을 상징했던 두 사람의 한때 빛났고 결국에 뒤틀리는 관계는 세계의 영향 바깥이었다면

그들이 순수하게 지향했을 가치를, 꾸밈없이 품었을 애정을 떠올리게 하며 복잡한 여운을 남깁니다.


<킹메이커>(KIngmaker, 2021)


김운범 역의 설경구 배우와 서창대 역의 이선균 배우는 전혀 다른 결의 힘을 앞다투어 뿜어내며 극에 긴장과 에너지를 불어넣습니다.

설경구 배우의 연기는 과묵하고 강직하게 세계의 중심을 차지하는 늑대의 기운을 뿜어냅니다.

감정을 섣불리 드러내지 않는 무게감으로 일관하면서도 연설 등을 통해 자신의 가치관을 외칠 때의 힘은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한편 이선균 배우의 연기에서는 날카롭고 영민하게 분위기를 이끄는 여우의 기운이 느껴집니다.

꿈을 향한 절박한 의지를 동력삼아 늘 상황을 예의주시하면서 파고들 곳을 찾아내는 기세로 장면을 장악하죠.

둘은 부딪칠 수 밖에 없는 캐릭터를 연기하지만, 그처럼 힘을 발휘하는 방식이 극명하게 다른 탓에

충돌하는 듯 하면서도 어우러지고, 깨지는 듯 하면서도 엮어지는 그 조화가 극의 중요한 재미를 줍니다.

이외에도 정치적 계산에 철저한 이실장 역을 특유의 서늘한 연기로 소화하는 조우진 배우를 비롯해,

유재명, 박인환, 이해영, 배종옥 배우 등 묵직한 존재감의 배우들이 한국 현대 정치사 속 중요한 얼굴들을 연기하며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정치 다툼의 소용돌이 속에 있었던 당대를 선굵은 그림으로 형상화 합니다.


<킹메이커>는 한국 현대사의 한 페이지 아니 여러 페이지를 장식한 빛과 그림자 속 인물들을 그리면서도,

어느 한 쪽 편을 들기보다 빛과 그림자가 함께 하나의 역사를 만들 수 밖에 없었던 시대의 초상으로서 두 사람을 나란히 세워둡니다.

한 사람은 엄숙하고 헌신적인 빛으로서 울림을 주고, 한 사람은 신성한 꿈을 악마의 재능으로 실현한 어둠으로서 생각할 거리를 남기죠.

<킹메이커>는 1960-70년대 현대사를 세련되고 속도감 있는 연출로 훑는 가운데에도,

대비되고 대립하는 두 인물 사이의 복잡한 관계성이 이 땅의 정치 역사에 남기는 의미를 놓치지 않은 수작입니다.


<킹메이커>(KIngmaker,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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