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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진만 Mar 06. 2022

진짜는 저절로 품격을 얻는다

인상적인 영화리뷰 2022 - <피그>

<피그>(Pig, 2021)


니콜라스 케이지의 신작 영화 <피그>를 보았습니다.

영화제가 아닌 일반 극장 개봉으로 니콜라스 케이지의 영화를 만난 게 얼마만인가 싶네요.

납치된 돼지를 찾아나서는 어느 은둔자의 이야기라는 첫인상은 그가 10년 가까운 시간동안 출연해 온

실망스러운 비디오용 영화 속 그의 모습을 언뜻 오버랩시키는 듯 했지만, 영화는 그와 차원이 다른 수준으로 비상합니다.

눈부신 영광을 누리다가 산업의 뒤안길로 사라진 듯 했던 니콜라스 케이지의 현실과 맞닿는 듯한 영화의 진심은,

적잖은 세월동안 '소비되었다' 여겼던 그의 필모그래피조차 달리 보일 만큼 강렬하게 다가왔습니다.


외딴 숲속 오두막에 은거하는 '롭'(니콜라스 케이지)이란 이름의 남자가 하는 일은 숲속에 숨겨진 트러플을 찾는 일입니다.

사람이 따라잡을 수 없는 감각으로 일품 트러플을 찾아 안내하는 돼지 한 마리가 현재 그의 유일한 벗이죠.

그렇게 조용하지만 평온하던 롭의 일상은 아닌 밤 중에 나타난 의문의 일당이 돼지를 납치해 가면서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그저 생계를 넘어 인생의 동반자였던 돼지를 잃어버리게 되자, 롭은 열 일 제쳐두고 돼지를 찾아나섭니다.

롭은 그동안 유일한 거래처지만 말 한 마디 섞지 않았던 식재료 바이어 아미르(알렉스 울프)에게 도움을 청하여

오랫동안 발을 들이지 않았던 포틀랜드를 찾고, 그곳에서 역시 오랫동안 연을 끊었던 사람들과 장소들을 만납니다.

롭은 조금 특별한 방식으로 돼지의 행방을 쫓는데, 그 과정에서 감춰졌던 롭과 그에 얽힌 사람들의 사연이 드러납니다.


<피그>(Pig, 2021)


<피그>의 이야기에서 '돼지의 행방'은 사실 주인공 롭의 속내에 다가가기 위한 매개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이 영화가 인상적인 지점은, 베일에 싸인 롭의 과거사가 무엇인지 파고 들어가는 데 집중하기보다

그 과거사가 어떻든 그로부터 일련의 시간이 지나 롭이 무엇을 깨달았고 어떤 사람이 되었는가에 주목한다는 것입니다.

롭이 그토록 오랜 시간동안 세상과 척을 지고 숨어들게 된 이유는 생각보다 의외스럽지 않을 수 있겠지만,

영화도 익숙해진 절제의 삶 속에서 불현듯 나타나는 젖은 눈빛과 머뭇거리는 얼굴로만 그 부분을 나타낼 뿐 강조하지 않습니다.

한때는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았으나 지금은 세상에서 자신을 지운 채 진짜 트러플을 찾는 일에만 몰두하는 남자를 통해

영화는 '진짜'의 가치를 묻고, 빤한 멜랑콜리함과는 거리가 먼 이 물음은 근원적이면서도 오히려 새로워 보는 이의 마음을 울컥 깨웁니다.

영화 초반부에 이마에 묻은 핏자국을 영화가 끝날 떄까지 닦지 않을 정도로 롭은 자신을 돌보지 않지만,

오랜 시간 홀로 지내며 안으로 곱씹어 왔을, 진짜를 향한 명백한 신념이 나타날 때 그의 눈만은 영롱하게 빛납니다.

그때 우리는 비로소 그가 은둔한 지난 세월이 그에게 멈추었거나 지워져버린 세월이 아니었음을,

다만 세상에서 보이지 않았을 뿐 그에게는 진짜의 소중함을 발견하고 체득해 나가는 지난한 수련의 시간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롭이 만나는 여러 사람들, 현실을 떠난 롭과 달리 현실에 남았지만 여전히 진짜를 찾아 헤매는 그 사람들 앞에서

롭이 진심 어린 깨달음을 담아 건네는 진짜에 대한 소회는 그의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을 넘어 지켜보는 우리의 마음까지 울립니다.


이런 롭의 여정은 자연히 롭을 연기한 현실의 배우 니콜라스 케이지가 지나온 길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견의 여지가 없는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수상으로 스타덤에 오른 후 한 시절 할리우드의 여름 흥행 보증수표였던 그는,

흥행과 비평에서 실패한 작품들을 잇따라 내놓으며 어떤 결정적인 타격의 순간이랄 것도 없이 주류에서 밀려났고

한 해에 몇편씩 비디오용 영화들만 찍으며 필모그래피를 실속 없이 채워가는 듯 보였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시대를 풍미했던 배우의 쓸쓸한 퇴장이 되면 어쩌나 우려할 수 밖에 없었지만,

돌이켜 보면 할리우드의 냉정한 수요와 공급 시스템 속에서 그 또한 보이지 않는 생존의 흔적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눈부신 성공의 자리에서 내려와 지리멸렬한 연명의 자리에서도 추구를 멈추지 않은 덕에 진짜의 의미를 깨닫게 되는 롭의 모습은,

침체의 시간을 지나 이렇게 보란듯이 명연을 선보인 니콜라스 케이지의 현재 또한 다르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꾸준함이 우리의 감각을 비로소 죽지 않게 하고, 그렇게 우리가 몰두하는 것을 '진짜'로 만든다는 것을 일깨우면서 말이죠.


<피그>(Pig, 2021)


블록버스터의 히어로가 아닐 때, 아니 심지어 블록버스터에 출연할 때조차도 니콜라스 케이지는 늘 비애감을 품고 있는 듯 했습니다.

크고 처진 눈과 느린 말투에서 배어나는 그 우울감은 그러나 성의 없이 만들어진 영화들에서는 덩달아 성의 없는 연기로 비치곤 했는데,

<피그>는 오랜만에 그런 그의 모습을 캐릭터와 훌륭히 일체화시키며 침잠하는 내면 속에서도 부인할 수 없는 진정성을 끌어냅니다.

얼굴은 물론 복장까지 단 한 번도 멀끔한 모습을 기대할 수 없는 영화 속 니콜라스 케이지는 그렇게 '거지꼴'을 하고도

캐릭터에 대한 세심하고도 신중한 접근과 결코 낭비하지 않는 힘을 통해 '우아함'을 느끼게 합니다.

그가 이 영화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에 오르지 못한 것은 그저 경쟁이 그만큼 치열했기 때문이었을 거라고 믿게 됩니다.

한편 롭과 데면데면한 동행에 나섰다가 점차 마음이 통하는 파트너가 되어가는 아미르 역의 알렉스 울프 역시

<유전>, <올드> 등 여러 전작에서 보여준 강렬한 장르적 이미지와 상반된 현실적이고 인간적인 캐릭터를 설득력 있게 그려냅니다.


<피그>가 말하는 '진짜'의 특징은 가만히 있어도 저절로 품격을 드러낸다는 점입니다.

흙 속에 파묻히고도 고유의 풍미를 뿜어내며 기어코 발견되고 마는 트러플처럼,

이제는 지난 시절의 것이라며 잊고 있었으나 버젓이 현재에 되살아와 파문을 남기는 니콜라스 케이지의 연기처럼,

영화는 유별난 명예의 주인공만이 아니라 살아서 멈추지 않고 정진하는 모든 것에게 진짜가 될 자격이 있음을 말합니다.


<피그>(Pig,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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