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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진만 Mar 01. 2022

배트맨, 악의 얼굴을 찾는 자

인상적인 영화리뷰 2022 - <더 배트맨>

<더 배트맨>(The Batman, 2022)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다크 나이트 라이즈> 이후 10년만에 나온 배트맨 솔로 무비인 <더 배트맨>은

이전 배트맨 실사 영화 시리즈에서 느껴본 적 없는, 아니 히어로물에서 거의 느껴본 적 없는 분위기를 연출하며

세계관의 연속성 따위 고려하지 않고 자기만의 세계 확립을 존중하는 DC코믹스 기반 영화들의 기조를 이어갑니다.

특정된 적과 맞서 싸우는 히어로이기 전에 사건의 진상을 캐는 탐정에 더 가깝게 그려진 배트맨을 통해,

<더 배트맨>은 어둡고 부패한 도시의 표상 같았던 고담 시의 실체로 더 깊이, 그렇게 배트맨의 내면에 더 깊이 들어가는 듯 합니다.


브루스 웨인(로버트 패틴슨)이 '배트맨'이 되어 어둠 속에서 범법자들을 응징하는 삶을 산 지 2년.

배트맨은 고든(제프리 라이트)과의 교류를 통해 경찰과 암암리에 협력하며 고담 시의 치안을 살피고 있습니다.

고담 시는 여전히 만연한 범죄로 고통받는 도시를 구제할 리더를 뽑을 시장 선거를 앞두고 있는 가운데,

선거가 얼마 남지 않은 어느날 엘리트 관료들이 잇따라 살해 당하는 사건이 발생하며 또 다시 도시가 술렁이기 시작합니다.

자신을 '리들러'(폴 다노)라고 소개하는 범인은 매 사건 현장마다 알 수 없는 암호와 단서들로 이루어진 수수께끼를 내는데,

'배트맨에게'라고 적힌 카드를 함께 남기며 매번 배트맨을 겨냥한 듯한 메시지를 보냅니다.

배트맨은 셀리나 카일(조이 크라비츠), 마피아 권력자인 팔코네(존 터투로)와 펭귄(콜린 파렐) 등 다양한 사람들과 접촉하며

리들러의 실체와 사건의 진상에 점차 다가가는데, 그 과정에서 점점 더 큰 혼란에 직면합니다.

아픈 과거에 대한 응징으로서 범죄가 들끓는 도시를 정화하기 위해 스스로의 정체성을 '복수'라 규정했건만,

리들러의 수수께끼는 도시 전체가 어쩌면 거대한 악의 덩어리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낳기 때문입니다.


<더 배트맨>(The Batman, 2022)


제작 과정에서 공언한 대로 <더 배트맨>은 과연 지금까지 본 배트맨 영화 중에 가장 어둡습니다.

놀란 감독의 '다크 나이트' 3부작도 이만큼은 아니었지 싶을 정도로 영화 내내 모든 부분이 어둡습니다.

브루스 웨인은 배트맨일 때는 물론 심지어 '억만장자 브루스 웨인'일 때의 공식 석상에서 멀끔하고 당당한 '척'마저 하지 않습니다.

폐터미널을 개조한 무기고는 박쥐 동굴마냥 음침하고, 집 또한 크다는 느낌 이상의 으리으리한 규모감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배트맨으로 나설 때에도 가면 너머 드러나는 눈 주위마저 검게 칠하며 자신의 정체를 어둠 속에 더 단단히 감추려 합니다.

대부분 어둡고 흐리고 비내리는, 영화가 그리는 고담 시의 이미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나마 가장 화려하고 스펙터클한 공간이 철저히 비공개로 운영되는 고위층 대상의 클럽일 정도로,

영화는 고담 시를 마치 검고 붉고 눅진한 어둠에 기생하는 도시로 그리려 하는 듯 합니다.

여러 스릴러, 느와르 교본 영화들이 스쳐 지나가는 이 이미지들은, 한두 명의 빌런으로 악을 대표하지 않고

몸뚱아리 전체가 온통 악에 잠식된 도시의 살풍경을 드러내려 하는 것도 같습니다.

이러한 묘사를 바탕으로 영화는 배트맨이 꼭 검은 슈트를 입고 목소리를 낮게 깔아서가 아니더라도

그토록 무겁고 어두운 히어로, 아니 비밀의 '자경단'이 될 수 밖에 없는 병든 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찬찬히 탐험합니다.


<더 배트맨>을 볼 때 유의할 점은 이렇듯 인물과 세계를 탐험하는 데 야심이 집중되다 보니

누가 봐도 흥행할 블록버스터 히어로 무비로서의 야심은 상대적으로 덜해 보인다는 점입니다.

아트하우스 영화처럼 무심한 타이틀 샷과 임팩트 있는 이벤트가 아닌 은밀하고 건조한 범죄 현장을 보여주는 오프닝부터

눈요기로 관객을 압도하겠다는 의지가 분명해 보이지 않고, 3시간의 러닝타임 또한 도전적인 관람을 요합니다.

(물론 죽이지만 않을 뿐 죽도록 박살내는 배트맨의 파워가 근접 격투, 카체이싱, 윙슈트 낙하 장면 등

풍부하진 않아도 존재감 확실한 몇몇 액션 장면들에서 짜릿하게 구현되며 감탄을 자아내기도 합니다.)

그러나 스스로도 미처 떨쳐내지 못한 어둠을 끌어안고 어쩌면 어둠 그 자체일지도 모를 도시의 내부를 탐험하는 배트맨의 여정은,

영웅으로 누빌 떄와는 다른 탐정으로서의 터치로 고담 시를 그려내며 확실히 흥미를 자아냅니다.


몇 사람만 솎아내기에는 이미 도시 전체가 악에 물들고 익숙해져 버린 듯하여 더욱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2년차 '젊은 배트맨'은 이 거대한 어둠의 일부가 될 것인지 어둠을 걷어낼 구원자가 될 것인지 기로에 직면합니다.

지금껏 영화에서 봐 온 그 어느 배트맨보다도 자주 흔들리고 때로는 광기에 휩싸이기까지 하는 이 배트맨은

이처럼 거대하게 드리운 악의 그림자 앞에서 비로소 흉내뿐이 아닌 진정한 고뇌에 직면하고,

비로소 '어둠의 복수자'를 넘어 우리가 알고 있는 '어둠의 기사'로 나아갈 명분을 얻게 되는 셈입니다.

수수께끼라는 게 아이러니로 가득하게 마련인데, 리들러가 배트맨에게 제시하는 수수께끼들은

악의 기운으로 움직이는 도시의 아이러니를 통렬하게 드러내는 수단이 되고,

배트맨은 그 수수께끼들을 통해 드러나는 도시의 민낯을 뼈저리게 확인하면서 고통스런 성장을 겪게 되는 것이죠.


<더 배트맨>(The Batman, 2022)


'트와일라잇' 시리즈의 대성공 이후 블록버스터 시리즈의 타이틀롤과 거리가 먼 필모그래피를 쌓아 온 로버트 패틴슨은

전통적인 할리우드 상업영화의 그것과는 사뭇 다른 특유의 연기 스타일로 배트맨을 그려내는 데 성공합니다.

어느 때보다 방황하고 위태롭던 배트맨이 각성하고 성숙해져 가는 과정에서의 내적 갈등을 깔끔하게 그려냅니다.

보통 배트맨 캐릭터를 연기하는 배우들은 브루스 웨인일 때와 배트맨일 때의 목소리 톤을 완연히 다르게 내는데,

로버트 패틴슨은 목소리 톤을 일정하게 유지하며 보다 어둠에 침잠해 긴밀하게 엮인 브루스 웨인/배트맨을 그려내 인상적이었습니다.

조이 크라비츠가 연기한 캣우먼은 색달랐는데, 배트맨과 대립과 협력 사이를 줄타기하며 그를 도발하던 기존의 캐릭터 대신

배트맨을 자극하기보다 그저 자신이 맞다고 생각하는 길을 갈 뿐인 주체적인 캐릭터로 그려진 점이 돋보였습니다.

폴 다노가 연기한 리들러는 기대 이상으로 강한 임팩트를 남겼는데, 영화 팬들에게는 아무래도 <배트맨 포에버> 속 짐 캐리의

우스꽝스런 광대 스타일이 익숙할 리들러라는 캐릭터가 아이러니로 가득한 세상에 수수께끼로 문제 제기를 하는,

보다 도발적이고 저항적이어서 그만큼 위험한 동시대적 빌런으로서 그려진 듯해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반면 콜린 파렐이 연기한 펭귄은 배우의 감쪽같은 이미지 변신으로 인해 캐릭터의 외적 인상은 확실히 강렬했으나,

영화에서의 활용도는 예고편 등을 통해 형성된 기대치에 미치지 못해 다소 아쉬웠습니다.


팀 버튼, 크리스토퍼 놀란 등 굵직한 감독들이 과거에 그려낸 배트맨과 비교했을 때

맷 리브스 감독의 이 배트맨의 우열을 가릴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고유의 매력은 확실히 어필한 것 같습니다.

탐정으로서의 배트맨을 아마도 영화에서 처음 그려낼 <더 배트맨>은 느와르, 추리 장르의 모습을 띠고서

'부패한 범죄 도시'의 이미지를 어렴풋하게 띄웠던 고담 시의 내부를 보다 밀착취재합니다.

이를 통해 배트맨의 활약 뿐만 아니라 배트맨과 고담 시, 그 사이에서 언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고 움직이며 확장할지 모를

악의 얼굴 간의 관계를 추적하고 있으며 그 향방이 어디로 갈지 다음 이야기를 기대하게 만드는 데 성공했습니다.

배트맨이라는 히어로를 안지는 매우 오래 됐지만, 고담 시는 이제야 비로소 제대로 들어가 보게 된 것 같습니다.

그리고 도시와 세력과의 역학관계 속에서, 배트맨은 앞으로 더 다양한 얼굴을 보여주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더 배트맨>(The Batman,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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