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진만 Mar 17. 2022

춤추듯 몸부림치던, 몸부림치듯 춤추던

인상적인 영화리뷰 2022 - <스펜서>

<스펜서>(Spencer, 2021)


<네루다>, <재키> 등 유명 실존인물을 주제로 하되 전기물이 아닌 심리물의 느낌으로 그들을 그렸던 파블로 라라인 감독은,

이번 영화 <스펜서> 역시 다이애나 스펜서가 살아온 삶이 아닌 품고 있는 심리를 좇음으로써 인물의 초상을 그리려 합니다.

우리는 그녀의 결말이 어떤지 이미 알고 있지만, 실재했던 시간 사이에 자리한 여백 속에 움츠리고 있었을

그녀의 속내를 그림처럼 그려 나가는 영화를 통해 그녀의 세계는 예정된 끝을 품고도 더 넓고 깊어집니다.


온 나라가 주목하는 '이슈메이커'인 왕세자비 다이애나 스펜서(크리스틴 스튜어트)가 왕실 휴가지에 옵니다.

매년 크리스마스마다 왕실 별장에서 열리는 이 3일간의 휴가는 그녀에게 정말 오고 싶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왕세자비라는 신분답지 않게 홀로 직접 차를 운전하고 별장에 가장 늦게 도착하는데, 어쩌면 그 마음이 반영된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만큼 '떠났다'기보다 '불려갔다'는 표현이 어울릴 이 휴가지는 3일만 버텨보자 마음 먹건만, 10년이 지나도 견디기 힘든 곳입니다.

별장 안에서는 남편 찰스 왕세자(잭 파딩)를 비롯한 왕실 가족들의 시선이, 밖에서는 먹잇감을 노리는 듯한 파파라치들의 시선이

내내 다이애나를 향해 있는 듯 한데다 새로 고용된 그레고리 소령(티모시 스폴)의 눈초리도 매섭습니다.

재미로 만들었다는 이상한 전통을 강요하는 일정들로 빼곡하고, 기분이 어떻든 매 끼니마다 정해진 의상을 입어야 하죠.

남편이 내연녀에게 선물한 것과 똑같은 진주목걸이를 걸고 참석한 디너 자리는 마치 목걸이가 목을 조여오는 것만 같고,

그런 가운데 남편은 물색없이 다이애나에게 왕세자비로서의 품격을 요구합니다.

의지할 곳은 두 아이들 뿐. 어린 시절을 보낸 고향집이 지척에 있건만, 별장 안에서 길을 잃은 듯 여인의 내면은 흔들리며 부유합니다.


<스펜서>(Spencer, 2021)


살아온 삶, 이슈 메이커로서 떨친 유명세, 비극적인 죽음 등 다이애나 스펜서라는 인물에 대해 알려진 것은 많지만,

<스펜서>는 그런 익숙한 이야기들보다 매체를 통해서는 알 수 없었으나 실은 가장 폭풍 같았을 그녀의 내면을 들여다 봅니다.

특히 시간적 배경이 1년 중 가장 행복하고 즐거워야 할, 크리스마스 시즌의 휴가 기간이라는 점이 아이러니를 더합니다.

차라리 휴가 밖의 일상이었다면 개인 일정이나 공식 일정을 핑계로 왕실을 잠깐이라도 벗어날 수 있었겠지만,

왕실 휴가는 그 자체가 왕실 공식 일정이자 동시에 개인 일정이기에 3일간은 꼼짝없이 머물러야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감독의 전작 <재키>가 갑작스레 들이닥친 비극으로 인해 급속히 피폐해진 인물의 내면을 주목했다면,

<스펜서>는 이처럼 오랜 시간 항상 곁에 머물고 있는 중압감에 시달리는 인물의 피로하고 진저리쳐지는 내면을 주목합니다.

왕실 사람들은 자기 의지로 살아 숨쉬는 인간이기보다 전통이 만든 루틴에 따라 작동하는 프로그램처럼 보이고,

그 속에 드물게 그녀를 마음으로 지켜보는 사람들이 있는 가운데 다이애나는 휘청거리다 바로서기를 반복합니다.

밖에서 봤을 때는 선망하는 삶이겠으나 안에서 느끼기에는 하루빨리 벗어나고픈 삶이었을 이 역설 속의 여인에 대해,

관객 또한 마찬가지로 양가 감정을 동시에 느끼게 됩니다. 그녀가 안쓰러우면서도 동시에 아름다워 보이는.


그 거대하고 화려한 왕실 별장이 다이애나에게는 음식도 제대로 넘길 수 없을 고통스러운 현장입니다.

헨리 8세의 연인이었으나 그에게 처형당한 앤 불린의 이야기가 담긴 책은 마치 그녀의 미래를 예견하는 듯 하고,

사냥 당하기 위해 사육되어 날려 보내려 해도 제대로 날지 못하는 꿩은 현재 그녀의 신세인 것만 같습니다.

울타리만 넘으면 닿는 어린 시절의 추억이 담긴 별장 속에는 세상을 모르고 마냥 행복하던 떄의 웃음이 메아리치는 듯 합니다.

그렇게 암울한 현재를 깨닫게 하는 대상이 사방이 있는 곳에서 이어지는 그녀의 방황은, 역설적이게도 아름답습니다.

영화는 혼돈스러우면서도 아련하고 아름다운 필치로 유리감옥에 갇힌 여인의 휘황찬란한 위태로움을 담아냅니다.

고통스러워 하는 다이애나를 영화가 무너뜨리지 않고 이처럼 아름답게 지킨 것은, 역시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 때문일 겁니다.

끝까지 우리에게 그 흔들리는 마음을 내색하지 않았던, 마지막 순간까지도 빛나는 여인으로 남은 그 모습 말이죠.

이처럼 영화는 몸부림치듯 춤추는, 춤추듯 몸부림치는 여인의 초상을 통해 걷잡을 수 없이 흔들렸을 내면을 그려내면서

동시에 그런 내면을 부여잡고도 꼿꼿이 서 있기를 포기하지 않았던 여인을 향한 경의를 보냅니다.


<스펜서>(Spencer, 2021)


얼굴을 알 만한 영국 출신 배우들이 등장하지만 <스펜서>는 크리스틴 스튜어트의 모노드라마라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극중 영국 왕실의 구성원을 이루는 대다수의 배우들이 영국 출신인데 반해 크리스틴 스튜어트만 홀로 미국 출신인데,

이는 마치 영국 왕실이란 하나의 거대한 '환경' 속에서 다이애나만을 오롯이 환경과 별개에 놓인 인물로 그리려는 의도로 보입니다.

그 속에서 크리스틴 스튜어트는 영국식 악센트에 특유의 연기 톤을 더하며 매우 강렬한 연기를 선보입니다.

그녀의 연기는 어떤 역할에 철저히 몰입한다거나 정돈되고 치밀하다고는 보기 힘든, 색깔이 확실한 연기인데

비명이 쏟아질 듯한 입을 애써 막아내는 듯한 여인의 찰랑이는 내면을 담기에는 더없이 어울립니다.

샐리 호킨스, 티모시 스폴, 션 해리스 등 베테랑 영국 배우들이 조용하지만 굳건하게 내공을 발휘하며

이런 크리스틴 스튜어트와의 상호작용에 충실한 덕분에, 다이애나의 위태로운 세계가 더욱 입체적으로 구축됩니다.


혼돈스런 내면을 끊임없이 휘젓고 다니는 전개와 사뭇 상반되어 보이는 영화의 결말은 이론의 여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다이애나 스펜서라는 인물의 결말을 이미 알고 있는 이상, 영화의 결말은 오히려 그 감흥이 명확히 다가옵니다.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의 아이콘으로 박제된 인물이 어쩌면 진심으로 꿈꿨을, 이루어질 수 없는 바람을 내포한 결말에 이르러

이 3일간의 이야기는 그 이후의 예정된 엔딩으로 인해 좁을 수 밖에 없는 운신의 폭에도 불구하고 더욱 넓고 깊은 품을 갖게 됩니다.

전후 맥락이 어떻든 때로 이해할 수 없는 정도로까지 휘청이는 속내에 깊이 주목하고 동조함으로써,

<스펜서>는 비운의 왕세자비로 남은 여인에게 다시금 숨결을 불어넣고 못다 이룬 품위와 자유를 부여합니다.


<스펜서>(Spencer, 2021)


매거진의 이전글 지금은 이불킥이어도 그때는 진지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