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 -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감독
영화라는 것은 단돈 9천원에서 만원 정도의 값어치만 지불하면 커다란 화면 안에서 쏟아져 나오는 셀 수 없이 다양한 이야기들과 볼거리들을 간접체험하게 할 수 있는, 비용대비 효과 면에서는 단연 두드러지는 대중예술이다. 그러나 이런 영화의 가치도 만드는 사람의 의지가 어느 정도냐에 따라 천차만별이 될 수도 있다. 집에서 천원짜리 VOD로 봐도 시간이 아깝게 느껴지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단돈 만원을 주고 편한 좌석에 앉아서 보는 게 황송할 정도의 고차원적인 경험을 선사하는 경우도 있다. 내가 왜 이런 걸 봐야 하나 싶은 경우도 있는 한편, 살면서 실제로 겪으리라곤 기대도 하지 않고 부디 그러지도 않길 바라는 무시무시한 경험을 온전히 선사함으로써 직접 체험하지도 않았건만 좀처럼 잊을 수 없는 기억을 남기기도 한다. 그리고 미디어를 접할 수 있는 경로가 한없이 다양해지면서, 영리한 영화들은 극장에서 직접 보지 않으면 느낄 수 없는 이 '체험'의 요소를 점점 극대화시키고 있는 중이다. 일찍이 <아바타>가 그러했고, <그래비티>,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 같은 경우가 그러했다.
그리고 이 영화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이하 <레버넌트>)가 그 뒤를 잇는다. 이 영화의 캐릭터를 가장 쉬운 한 줄의 문장으로 요약한다면 '보는 내가 다 추워지는 영화'다. 물론 우리 인체에는 하등 영향을 미치지 않지만, 그럼에도 굳이 돈을 지불하고 극장까지 와서 '보는 내가 다 추워지는' 이런 영화를 본다면 그에 상응하는 가치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 앞서 말한 '체험'에 관한 두 가지 측면에서 <레버넌트>는 일단 그 가치를 하고도 남는다. 첫째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극한생존'의 최극점까지 간다는 것, 부디 우리에겐 일어나지 않길 바라고 또 바랄 그 순간의 공포와 무력감과 박진감과 환희를 거의 완전함에 가깝게 전달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둘째로 겪어보지 못했으면 말을 말라는 듯, 그 체험에 가장 근접한 관람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세계와 인간에 관한, 말로는 다 설명하지 못할 웅대한 메시지를 전한다는 것이다. 생명의 밑바닥까지 떨어진 한 인간의 싸움으로부터 온 세계를 만날 수 있다면, 2시간 반동안 스크린 너머로 전해오는 칼바람에 눈이 좀 얼얼한들 어떠랴.
서부 개척시대 이전의 19세기 아메리카 대륙에는 대륙을 정복하려는 현재의 미국인들과 대륙을 지키려는 과거의 미국인, 즉 원주민들이 살벌한 대치 상태를 이루고 있다. 사냥꾼이자 현지 가이드인 휴 글래스(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헨리 대위(돔놀 글리슨)가 이끄는 일련의 사냥꾼 일행들을 안내하고 있는 중이다. 가죽 수집에 여념이 없던 이들을 원주민들이 기습하고, 순식간에 수많은 동료들이 목숨을 잃는다. 상처뿐인 귀환 길, 원주민 포니 족 사이에서 혼혈 아들을 둔 글래스가 가뜩이나 못마땅한 동료 피츠제럴드(톰 하디)는 이런 상황으로 인해 글래스가 더더욱 눈엣가시로 여겨진다. 그러던 중 글래스가 새끼곰과 함께 숲을 지나던 어미곰의 습격을 받고, 수 차례의 몸싸움 끝에 글래스는 목숨이 붙어있는 것이 신기할 정도로 만신창이가 된다. 대위와 일행들은 중상을 입은 글래스를 들것에 싣고 힘겨운 여정에 오르지만, 더 이상 그와 함께 귀환하는 것이 어렵게 되자 고심 끝에 마지막 순간까지 글래스를 돌볼 인력 몇명만 남겨두고 귀환하기로 한다. 그리하여 남은 동료는 피츠제럴드와 그가 아끼는 소년 사냥꾼 브리저(윌 폴터). 그러나 동료애보다 한몫 챙기는 것에 더 정신이 팔려 있는 피츠제럴드는 급기야 숨이 붙어 있는 글래스를 산채로 땅에 묻고, 그의 아들 호크를 살해하고 만다. 숨쉬기도 고통스럽지만 이 모든 광경을 똑똑히 목격한 글래스는, 고통을 딛고 일어서 자신을 한번 죽이고 자신의 아들을 영원히 세상과 이별케 한 피츠제럴드를 향한 복수의 여정에 오른다.
작년 <버드맨>이라는 역작을 내놓으며 아카데미를 석권했던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감독은 불과 1년 만에 또 다시 만만치 않은 역작을 내놓았다. 하지만 <레버넌트>는 <버드맨>에 비하면 확실히 대중성이 두드러진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라는 압도적 인지도의 원톱 배우가 포진하고 있는데다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로 주가가 더욱 가파르게 상승한 톰 하디가 대립구도를 이루고 있다. 선과 악의 대립구도나 복수극과 생존이라는 컨셉도 명확하며, 이야기는 시간 순서대로 직선적으로 배열되어 있어 보는 동안 구태여 머리를 쓸 필요도 없다. 광활한 겨울의 대자연 위에서 펼쳐지는 스펙터클한 볼거리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냐리투 감독이 블록버스터 감독으로 노선 변경을 한 건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 자신의 또 다른 영화 세계를 풀어놓기 위해 블록버스터 대하드라마와 유사한 형태를 가져왔을 뿐, 이냐리투는 여전히 자신이 하고픈 이야기를 하고 있고, 자신이 보여주고픈 세상을 하고 있다. 그리고 촬영감독 엠마누엘 루베츠키가 <버드맨>에 이어 그의 좋은 동반자 역할을 하고 있다.
루베츠키 감독 덕분에 우리는 3년 연속으로 좀처럼 가기 힘든 곳을 직접 가본 듯한 경험을 만끽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비티> 때는 우주로, <버드맨> 때는 브로드웨이 무대 뒤편 구석구석으로 우리를 데려갔던 루베츠키 감독은 이번 <레버넌트>에서 서부 개척시대 이전 미국 대륙의 대자연으로 데려간다. 단지 항공사 광고 같은 비주얼로 시원하게 훅 훑는 수준이 아니다. 당신이 지금 이 곳에 두 발을 딛고 서 있다면, 여기서 몇날 며칠을 버텨야 한다면, 어떤 목적지를 가기 위해 이 끝모를 설원을 꾹꾹 즈려밟으며 걸어가야 한다면 대략 이런 느낌일 것이라고 알려주는 듯 하다. 그렇게 알려주는 느낌이란 때로 몹시 황홀하고 때로 몹시 혹독하다.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상영관을 에워싸는 시냇물 소리에 넋을 뺏기다 보면 카메라는 어느덧 무방비 상태에서의 전투 한복판으로 우리를 데려다놓는다. 땅바닥과 달리는 말 위, 물 속을 넘나들며 생사가 엇갈리는 풍경이 지나면 또 다시 망망대해와 견줄 만한 울창한 숲이 숨을 턱 막히게 한다. 그렇게 아름답고도 가혹한 순간이 반복되며, 루베츠키 감독이 전하는 눈과 물을 품은 대자연의 풍경은 그림 속 낭만어린 이미지를 넘어선 생동감 넘치는 모습으로 가슴 속에 아로새겨진다. 로케이션의 사실성을 위해 수많은 시간을 허비하는 것을 두려워 하지 않고, 내내 조명장치를 쓰지 않고 자연광만을 활용할 만큼 이냐리투 감독과 루베츠키 감독은 글래스를 비롯한 인물들이 겪었을 당대의 자연, 그 척박하고도 매혹적인 자연의 공기를 그대로 옮겨 오는 데 온갖 공을 들였다.
이처럼 자연을 재현하는 데 있어서 가장 톡톡히 활용되는 것이 루베츠키 감독의 전매특허인 '원테이크'다. <그래비티>나 <버드맨> 때보다는 컷이 좀 더 쪼개지는 느낌도 있지만 꼭 필요할 때에는 원없이 원테이크가 활용되는데, 그 필요할 때란 '치열하고 절박한 생존의 순간'이다. 현란한 편집의 기교 없이, 그저 눈 앞에 펼쳐진 고통스러운 사투의 순간을 눈도 깜박이지 않고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극도의 긴장감과 처절함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장면들이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죽음의 장막이 숲 전체에 재빠르게 드리우는 듯한 전투의 순간, 거친 숨 때문에 화면에 맺히는 입김의 온기까지 느껴질 정도로 상상하기 힘들 고통을 밀착해 비추는 회색곰 습격의 순간, 살갗을 파고드는 추위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범인은 엄두도 내지 못할 생존의 비책을 마련하는 순간까지. <레버넌트>가 전하는 '체험의 정서' 상당 부분은 이처럼 걸러내거나 다듬은 흔적 없이, 살기 위한 사투를 생생하고도 악착같이 목도하는 루베츠키 감독의 카메라에 빚진다. <마지막 황제>로 유명한 류이치 사카모토가 선사하는, 심장을 두들기다가도 웅장하게 가슴을 저미며 들어오는 음악까지 더해지고 나면 <레버넌트>는 시청각적으로 한편의 교향곡이라 해도 좋을 위용을 갖춘다.
그리고 이 가운데 자신의 얼굴을 거의 버리다시피 한 배우들의 연기가 있다. 전설적 생존기의 주인공이 된 실존 인물 휴 글래스 역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전심을 다해 인물에 몸을 맡긴다. 매 작품마다 보여주는 그의 에너지와 열정은 때로 '아카데미에 대한 불운'이라는 이슈와 겹쳐 농담거리가 되곤 하나, 빈말이 아니라 <레버넌트>에서 그의 연기는 지금껏 그가 쌓아온 필모그래피들 중에서도 특히 도드라진다. 나르시시즘에 빠진 재벌, 영리하고도 경박한 주식 범죄자, 악독한 노예 주인 등 평범한 역할을 좀처럼 맡은 적 없는 그이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각 인물의 기운보다는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라는 배우의 기운이 두드러졌던 것이 사실이다. 번뜩이는 눈빛과 폭발하는 에너지는 다양한 스펙트럼의 연기 속에서도 빛을 발하는 그만의 인장이 됐지만, 이것이 한편으로는 영화에 완전히 흡수된 한 캐릭터가 아닌 또 한번 활약하는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그 자신으로 비춰졌을 수도 있다. (어쩌면 그래서 아카데미가 그동안 그의 손을 들어주지 않았는지도 모르고) 하지만 <레버넌트>에서의 그는 다르다. (물론 덥수룩한 머리카락과 수염을 기른 채 자신의 외모를 철저히 숨기기도 했지만) 이번 영화에서의 그는 또 다시 역할을 초월하여 남다른 아우라로 우뚝 선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라기보다는, 망망대해처럼 웅대한 자연 앞에서 한없이 보잘 것 없기에 가혹하게 찢기면서도 조용하지만 악착같이 자신의 숨을 붙드는 휴 글래스 자체로 존재한다. 폭발하는 에너지 대신 속삭이고 이를 악물며 속으로 삭이지만, 아들에 대한 한과 생존에 대한 의지로 눈빛만은 여전히 반짝인다. 고통을 그대로 부둥켜안고서 불가능한 여정을 가지만, 그 속에서도 완벽히 자연에 동화된다. 이 영화에서 빛나는 외모를 버리고 누더기가 된 몸과 마음을 내내 안고 가는 디카프리오는 관객을 참혹하고 아름다운 대자연의 한가운데로 이끄는 가장 멋진 가이드가 된다.
인물로 등장했다 그 자체가 이야기로, 나아가서는 풍경으로 녹아드는 디카프리오의 명연기 곁에는 이를 보좌하는 다른 배우들의 밀도 높은 연기가 있다. 글래스를 산 채로 묻고 그 아들을 살해하는 천인공노할 짓을 저지르는 피츠제럴드를 연기한 톰 하디는 그 중에서도 강렬한 아우라를 뿜어낸다. 역시나 덥수룩한 수염 안에 감정을 철저히 숨긴 채, 원망과 조롱과 분노가 뒤엉킨 말투와 표정으로 동료를 사지로 몰아넣는 그의 연기는 너무나 부드럽고 유연해서 더욱 무시무시하게 다가온다. 앞서 언급한 디카프리오와 더불어 이 두 배우는 수염 속에 외모를 철저히 감춰서인지 후반부에서는 둘의 얼굴을 혼동하게 되는 순간도 있었다. 아울러 분명 '금수저' 대위겠지만 자신이 이끄는 사냥꾼들에 대한 책임감은 묵직하게 지니고 이쓴 헨리 대위 역의 돔놀 글리슨은, 확실히 <어바웃 타임> 때의 유약한 이미지를 말끔히 타파하며 강인하고 강직한 리더의 모습을 인상적으로 보여준다. <나니아 연대기: 새벽 출정호의 항해>, <메이즈 러너> 등의 영화에서 인상적이었던 윌 콜터도 생존의 기로 앞에서 저버린 인간적 도리로 인해 혼란을 겪는 젊은 사냥꾼 브리저를 말끔하게 보여주었다.
이렇듯 <레버넌트>는 말하자면 '고난의 교향곡'이다. '고난'이라는 말이 듣기 좋고 아름다운 '교향곡'이란 말과 함께 설 수 있을까도 싶지만 어쩌랴. '처절하고 비참하지만 숭고하고 아름답다'는 말은 이 영화가 전하는 정서에 정확하게 어울리는 것을. 좁게 보면 복수극이지만 결국 생존기라는 큰 틀 안에서 귀결되는 영화의 이야기부터 보자. 다른 사람 같았으면 골백번도 천당이나 지옥 문턱을 넘었을 상황 속에서 글래스가 끝끝내 숨을 놓지 않게끔 만든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아들의 죽음, 동료의 배신이었다. 글래스는 아들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친 것이 아니라, 죽은 아들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지켰다. 도저히 살아서 버틸 수 없을 것만 같은 이중의 고통이 그에게는 오히려 이대로 죽을 수는 없게 만든 결정적 동기였던 것이다. 결국 <레버넌트>가 쫓는 것은 '모든 것을 잃은 남자의 복수담'를 넘어선, '모든 것을 잃음으로써 비로소 자기 목숨을 붙들기 시작하는 남자의 생존기'이다. 행복과 희망만이 아닌, 불행과 절망이 삶을 더 질기게 할 수 있다는 헛헛한 역설과 만난다.
죽음의 문턱까지 간, 자신의 말에 따르면 '이미 한번 죽어봤기에' 죽음이 두렵지 않은 글래스와 겪어보지 않았기에 죽음이 두려운 피츠제럴드는 생을 향한 의지도 완전히 다른 태도로 품는다. 관객의 얼굴이 다 얼얼할 정도로 혹독한 추위 속에서 한시도 정신을 놓지 않고 갖은 방법으로 목숨을 붙들면서도, 발길 닿는 곳 마다의 풍경과 사람들을 받아들이는 글래스의 모습은, 살고자 하는 본능적인 의지가 이리도 고매한 인격체를 만들 수 있음을 보여준다. 반면 누군가의 삶을 희생해야만 자신의 삶이 보장되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부끄러워 하지 않고 떳떳하고 당연한 권리로 여기는 피츠제럴드의 모습은, 글래스를 숭고하게 만들었던 그 생의 의지가 저열한 짐승의 길로도 인도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레버넌트>는 이처럼 역동적인 생의 의지를 단지 두 사람의 경우, 현재 우리가 말하는 미국인의 경우, 사람의 경우에만 국한시키지 않는다. 잔혹하게 사냥꾼 일행들을 습격했던 아메리카 대륙 원주민들에게도, 심지어는 글래스를 만신창이로 만든 그 무시무시한 회색곰에게마저도, 그들을 혹독한 전사나 무자비한 폭군으로 만들 수 밖에 없었던 생의 의지, 살아남아야 할 이유가 존재함을 보여준다. 불가능한 여정을 가능케 하는 그 생의 의지라는 것이 '인간만이 지닌 특권'이 아니라 나아가 자연의 모든 생명이 지닌 당연한 가치임을 알게 되는 순간, 글래스가 우리에게 보여주던 그 생고생들은 더 이상 그냥 고생이 아니게 된다. 가혹하고도 아름다운 이 세계가 지닌 보편적이고도 위대한 가치, '생의 의지'에 대한 절박한 증명이 된다.
이야기는 사실 '개척'이라는 이름으로 숱하게 분포해 있던 아메리카 원주민들과 그들의 보금자리를 파괴한 미 대륙의 흑역사를 안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비단 미 대륙에만 있었던 것이 아닐 것이기에, 이러한 '파괴의 역사'는 어떤 먼 나라의 특수한 경우를 넘어선 인류 전체의 굴레가 된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무언가를 파괴하고 누군가를 죽여야 했던 역사 속 악순환으로부터 어느 대륙도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레버넌트>는 이런 인류의 필연적 굴레를 글래스처럼 받아들이고 참회할 것인지, 피츠제럴드처럼 당연한 특권으로 받아들일 것인지 묻는다. 자신은 이주해 온 미국인이지만 아내는 아메리카 원주민이고 그 사이에서 낳은 아들은 혼혈인 글래스는, 어쩌면 '파괴하는 자'와 '파괴당하는 자' 사이에 선 인물이었을 것이다. 그 결과 야만의 시대 위에 서서 떠나간 아내와 아들의 흔적을 절실하게 붙잡고 자신이 이 땅에서 지게 된 굴레를 참회하고 존엄을 지켜나가는 과정은, 어쩌면 파괴로 뒤엉킨 생의 가치를 비로소 발견하기 위해 거쳐야 할 필연적인 관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레버넌트>는 삶이라는 '위대한 고통'에 관한 영화다. 끔찍한 전투와 인정사정없는 피습, 숨쉴 틈을 주지 않는 추위 속에서 펼쳐지는 갖은 고난들을 똑똑히 지켜볼수록 그 속에서부터 삶의 빛은 더 강렬하게 발한다. 그것이 혈육을 향한 사무치는 한에서 비롯되었든, 누군가를 향해 불타오르는 복수심에서 생겨났든, 나를 짓누르는 슬픔과 분노와 원망이 오히려 나를 지독하게 살게 하는 심오한 순간을 만나게 된다. 글래스의 귓가를 늘상 맴돌던 "숨이 붙어 있는 한 싸워야 해. 그러니 계속 숨을 쉬렴"이라는 말처럼, 부싯돌을 세차게 맞부딪칠 때 불어올라가기 시작하는 불꽃처럼, 안전과 편안함이 보장된 곳보다 뜨거운 고통과 상처 위에서 더 깊고 단단한 뿌리를 내리는 삶을 만난다. 워낙 인생의 고달픈 면만을 들여다 봐 온 감독의 이야기라 선뜻 와닿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관객을 추위 앞에 치를 떨게 하다가도 아름다움에 넋을 잃게 만드는 이 오케스트라 같은 영화 앞에 서면, 그 위대한 고통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