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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진만 Oct 14. 2022

[BIFF 2022] 다음은 없다, 오직 지금뿐

인상적인 영화리뷰 2022 - BIFF 2022 <다음 소희>

<다음 소희>(Next Sohee, 2022)


이번 제27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본 한국영화 신작은 정주리 감독의 <다음 소희>였습니다. 지난 칸영화제 국제비평가주간 폐막작이기도 했던 이 영화에서 감독은 전편에 이어 또 한번 현대 한국 사회 속 어린 여성의 안부를 묻습니다. 감독은 전작의 제목에 들어갔던 '도희'라는 이름에 이어 이번에는 제목에 '소희'라는 이름을 넣었는데, 이번 제목에 그 '소희'라는 이름 앞에 '다음'이 붙는 것은 이것이 개인이 아닌 시스템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영화는 어린 노동자의 가혹한 착취 현실을 침착하게 담아내며, 분노하면서 동시에 아이들을 지켜야 할 어른들의 책임을 다시금 확인시킵니다.


특성화고 졸업반인 소희(김시은)도 졸업을 위해 필수로 거쳐야 하는 업체 현장실습을 피해갈 순 없습니다. 얼마나 좋은 회사, 좋은 환경에 배치되느냐가 중요할텐데 소희가 배치된 곳은 (그런 하청 아니라는데 딱 봐도 그런 하청 같은) 통신사 콜센터입니다. 소희가 맡은 일은 단순 질의응답이 아닌 '해지방어', 즉 서비스를 해지하려는 고객의 마음을 돌려세우는 일입니다. 서비스 해지가 목적이기 때문에 다수가 잔뜩 격앙되어 있는 소비자들을 응대하는 것 자체로도 스트레스인데, 그들의 해지를 막아내고 심지어는 연장 또는 추가 상품 가입을 이끌어내는 것이 이곳의 실적이자 목표가 되어 있습니다. 특히 잦을 수 밖에 없는 고객들의 폭언, 그런 고객들을 상대로 제대로 응대 못하면 들이닥치는 실적에 대한 압박, 그렇다고 또 잘 하면 덕분에 목표치 올라간다고 동료들이 보내는 눈총, 매일 같은 야근과 연수생은 무조건 깎고 들어가는 인센티브 문제까지, 일에 관한 모든 것이 소희를 힘들게 하지만 학교마저도 업체에 학생들 보내고 취업으로 이어지게 하는 '실적'을 쌓기에 급급합니다. 위태로운 처지에 있던 소희에게 결국 어떤 사건이 발생하고, 과거 소희와 아주 잠깐 마주친 적 있는 형사 유진(배두나)이 사건을 쫓기 시작합니다. 


<다음 소희>(Next Sohee, 2022)


<다음 소희>의 러닝타임은 135분으로 꽤 긴 편인데, 그럴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현장실습생 소희와 형사 유진, 두 사람이 극의 전반부와 후반부를 명확히 나누어 이끌고 가기 때문입니다. 영화는 특성화고 학생들을 현장실습생으로 쓰는 시스템을 경험하는 소희 중심의 전반과 시스템을 추적하는 유진 중심의 후반으로 이루어집니다. 소희의 시스템 경험을 통해 영화는 비인간적인 대기업 하청 시스템의 단면을 생생하게 경험케 합니다. 해지 고객을 응대하는 것만으로도 스트레스가 동반될 수 밖에 없는 팀에까지도 고객 유치 실적 목표를 들이미는 맹목적 실적주의, 인력 교체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그런 고난도의 콜센터 업무에 베테랑도 아니고 소희와 같은 어린 연수생들을 집중 배치시켜 놓는 비열함, 일하는 사람들을 '노동자'가 아니라 닳으면 교체하면 그만인 '노동자원'으로 취급하는 무자비함이 골고루 느껴집니다. 영화제에서 '12세 이상 관람가' 등급으로 상영되는 만큼 노골적이고 과격한 묘사가 들어가지 않음에도 인간미라고는 좀체 느껴지지 않는, 파티션을 두고 앉아 있는 직원들을 마치 기계 속 부품처럼 보이게 하는 싸늘한 풍경은 소희와 이외 수많은 현장실습생들이 느꼈을 중압감과 무력감을 관객도 고스란히 느끼게 하며 분노를 불러일으킵니다.


그리고 유진이 사건의 내막을 캐나가며 시스템을 추적해 나갈 때 비로소 거대한 시스템의 구조를 알아채게 됩니다. 시스템의 끄트머리에서 분투하던 소희는 미처 짐작도 못했을, 드높게 구축된 시스템의 철옹성을 실감하게 되죠. 회사는 물론이거니와 회사에 학생들을 보내는 학교, 그 학교를 감사하는 기관까지도 실적주의에 물들어서는 비정한 노동환경 앞에서 소리치는 학생들을 낭떠러지로 몰아 입을 막아버리고 마는 시스템의 현실에 분노는 슬픔과 뒤섞입니다. 그렇게 실적주의에 몰두하는 세상의 다그침과 몰아세움 앞에 아이들이 꿈꾸는 것을 행하며 살아있음을 느낄 기회를,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길 반복한 끝에 느낄 반짝이는 성취감을 잃어가는 과정을 묵묵히 지켜봐야만 합니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계속 실수하고 넘어지면서도 춤추기를 멈추지 않던 소희의 생명력이 갈수록 사라져 가듯이 말이죠. 유진이 그렇게 소희의 사건을 치열하게 추적하는 것은, 어쩌면 침묵과 방관 속에 수많은 다른 '소희'들이 그렇게 떠나가는지도 몰랐을 어른의 뒤늦은 죄책감과 책임의식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다음 소희>(Next Sohee, 2022)


정주리 감독이 어디서부터 고쳐 나가야 할지 까마득하기만 한 특성화고 현장실습 제도와 그 속에서 희생당하는 청소년들의 실상을 집요하게 그려나가는 가운데, 영화의 두 축을 단단하게 이루는 두 주연배우의 연기가 특히 인상적입니다. 소희 역의 김시은 배우는 추구하는 바가 확실하고 할 말은 할 줄 알았던 소희가 좌절하고, 순응하고, 무기력해지는 과정을 촘촘하게 표현하며 관객이 보다 현실적으로 공분하고 슬퍼할 수 있는 바탕을 만들어 줍니다. 한편 유진 역의 배두나 배우는 <도희야> 속 경찰 영남을 언뜻 떠올리게 하면서도, 개인의 사연을 드러내거나 감정을 분출하기보다 그럴 시간에 사건을 더 면밀히 추적하고 내막을 밝혀나가는 침착함과 책임감을 보여주며 극의 중심을 잡아줍니다. 영화가 세상의 어른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책임과 보호의 메시지를 구현하는, 기댈 언덕과도 같은 캐릭터를 든든하게 그려냅니다.


사건의 내막이 밝혀질수록 관객은 이게 개인이 어떻게 해결하고 바꿔나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다음 소희>는 그 거대한 시스템 앞에서 무력감에 주저앉고 이야기를 끝내려 하지 않습니다. 시스템을 바꿀 수 있을 만큼 개인이 충분히 강하지 않음을 안다면, 어른들은 그것에 순응하고 주저앉을 것이 아니라 적어도 아이들에게 버티라고만 하지 말고 말하라고, 삼키라고만 하지 말고 뱉어내라고 할 의무가 있다고 말합니다. 이처럼 <다음 소희>는 소름끼치도록 현실적인 묘사 위에서 현실적인 조언과 응원을 전하는 하이퍼리얼리즘 노동인권고발극입니다.


<다음 소희>(Next Sohee,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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