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상적인 영화리뷰 2022 - BIFF 2022 <이니셰린의 밴시>
이번 제27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영국 출신 마틴 맥도나 감독의 신작 영화 <이니셰린의 밴시>를 보았습니다. 연극계에서 큰 성공을 거둔 후 영화감독으로 데뷔한 마틴 맥도나는 <킬러들의 도시>, <세븐 사이코패스> 등의 영화에 이어 2017년 <쓰리 빌보드>로 비평과 흥행 양면에서 큰 성공을 거두며 주목받는 거장 감독이 되었습니다. 지난 베니스 영화제에서 공개되어 각본상과 남우주연상을 받은 <이니셰린의 밴시>는 그런 감독의 명성을 더욱 드높여 줄 걸로 예상됩니다. 외딴 섬마을에 사는 두 남자의 우정이라는, 언뜻 사소하고 개인적이어 보이는 소재로 만들어 나가는 예측불허의 이야기와 그 이야기가 뿜어내는 카리스마, 전하는 묵직한 담론까지 또 한편의 빼어난 영화가 나왔기 때문입니다.
내전이 한창 일어나고 있는 본토와는 멀찌감치 떨어진 아일랜드의 외딴 섬마을에는 파두익(콜린 파렐)이라는 남자가 살고 있습니다. 그가 교류하는 이라고는 함께 사는 여동생 시오반(케리 콘돈), 마을 유일 경찰관의 아들 도미닉(배리 케오간), 그리고 날마다 함께 펍에 가서 맥주를 즐기는 큰형님뻘의 절친 콜름(브렌단 글리슨) 뿐입니다. 그런데 어제까지도 아무렇지 않던 콜름이 어느날 갑자기 파두익에게 절교를 선언합니다. 펍에서도 멀리 떨어져 앉으라면서요. 자신이 무슨 잘못을 했거나 말실수라도 했는지 파두익은 묻지만 콜름은 그런 건 전혀 없다고 합니다. 납득할 만한 이유도 말해주지 않으니 답답하기만 한 파두익은 콜름 곁을 맴돌며 영문도 모른 채 돌아선 그의 마음을 돌리려 하는데, 그러자 콜름은 앞으로 자기한테 말을 걸 때마다 자신이 갖고 있는 양털 깎는 가위로 손가락을 하나씩 잘라서 너에게 주겠노라 선언합니다. 두 남자의 잠시동안의 불화, 찰나의 오해인 줄 알았던 사건은 생각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합니다.
마틴 맥도나 감독이 전작 <쓰리 빌보드>를 통해 만방에 과시했던 능력은 작은 이야기에서 시작된 큰 풍파를 그려내는 솜씨였습니다. 방향이 빤해 보였던 이야기의 흐름이 생각지 못한 곳으로 뻗어나가고, 그 속의 인물들이 전혀 빤하지 않은 방식으로 상호작용을 하며, 그 갈등과 혼돈의 소용돌이가 끝내 보는 이가 납득할 수 밖에 없는 감동의 결말로 귀결되는 과정은 놀라웠습니다. 이번 영화 <이니셰린의 밴시>에서도 역시 감독은 시놉시스만 봤을 때는 도통 감이 잡히지 않는 이야기를 절도 있고 유려하게 휘두릅니다. '콜름이 왜 파두익에게 절교를 선언했는가'라는 궁금증으로 시작하는 이야기는 전개될수록 이야기의 내막, 인물의 선택 등 여러 면에서 '왜, 어떻게' 같은 의문부호를 한두개도 아니고 수없이 자아내며, 결국 관객은 국지적인 이슈에 매몰되지 않고 인물들의 선택과 그로 인해 요동치는 이야기를 두루 살피게 되며 결국 어떤 종착지에 다다르게 될지 넓은 시야로 지켜보게 됩니다. 두 남자의 우정이라는 소재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 의아한, 뜻이 쉽게 헤아려지지 않는 영화의 제목부터가 보통이 아닐 이야기임을 예고합니다. 제목에서 '이니셰린'은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아일랜드의 마을 이름이며, '밴시'는 죽음을 예고한다고 알려져 있는 아일랜드 신화 속 요정입니다. 이 이야기가 두 남자의 지극히 개인적인 불화에 관한 것이자, 동시에 꽤나 근원적인 우화일 수도 있다는 걸 내포하는 듯합니다.
콜름이 파두익에게 선언한 우정의 단절은 그 이유를 알아내고 잘못을 바로잡는다면 복원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마치 그저 때가 되었다는 듯, 살다보면 친교를 끊어내야 하는 순간이 언젠가는 오게 되는데 그게 바로 지금인 것처럼요. 한 사람은 오랫동안 돈독해져 있던 관계까지 끊어내며 스스로 고독 안으로 들어가려 하는 반면, 다른 한 사람은 사람이 아니면 기르는 가축이라도 집안에 들여보내야 안심될 만큼 끊임없이 자신과 세상을 연결하려 합니다. 이렇게 극과 극, 그리고 그 사이에 저마다 서 있는 사람들 간에 과연 영속적인 관계가 가능할까 하는 의문이 문득 생겨납니다. 마을 사람들이 공인한 절친 사이에서 생겨난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모두가 어리둥절해 하고 사건은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지만, 아일랜드 섬마을을 품은 드넓은 자연의 풍광 앞에서는 그 소란한 혼란마저도 티끌 같은 잡음처럼 느껴질 따름입니다. 바다 건너 본토에서 들려오는 내전 속 포탄 소리에 무감각해지듯, 멀리서 보면 관계에 찾아오는 뜻밖의 반전과 파국은 백이면 백 다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어쩌면 일상일지도 모르는데 그 가운데 있는 우리들에게만은 온 세상이 흔들리는 일인 셈이죠. 이니셰린이라는 작고 폐쇄적인 마을에서 밴시 요정이 예고하고 다니는 것은 아마도 이처럼 피할 수 없는 '관계의 종말', '관계의 죽음'이 아닐까요.
그러나 마틴 맥도나 감독은 이번에도 이런 불가항력적 재앙(?) 앞에서 허둥대는 작은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애정을 드러냅니다. 당장의 성장을 기대할 수 없는, 혼돈 속에서 쭈뼛거리고 더듬거리는 인물을 사람이라면 그러는 게 당연하다는 눈빛으로 바라보죠. 때문에 이야기가 예상할 수 없는 방향으로 불쑥 우리를 데려놓는 와중에도 작은 웃음이 끊임없이 일어납니다. 소용돌이의 중심에 있는 파두익 역의 콜린 파렐은 과연 베니스 영화제 남우주연상에 걸맞은 커리어 최고의 연기를 보여줍니다. 그가 그리는 '지루한 멍청이'같은 남자는 과연 그 평가에 값하는 인물이면서, 인간적으로 마음이 갈 수 밖에 없는 애처로움과 절박함을 수반합니다. 거부할 수 없는 재앙처럼 다가온 관계의 종말 앞에서 때로 허둥대고 때로 분노하며 때로 탄식하는 인물로 이야기의 정수를 완성합니다. 파두익에 갑작스런 절교를 선언하는 콜름 역의 브렌단 글리슨 역시 끊임없이 극에 긴장감을 불어넣는 연기로 좌중을 휘어잡습니다. 과거엔 파두익이 인간적으로 가장 친밀하게 교류했던 인물이었고 지금은 마치 재앙과도 같은 자로 남은 인물의 양면성을 납득되게끔 그려냅니다. 이밖에 오빠의 혼란을 중간에서 지켜보며 매듭지어보려 노력하는 동생 시오반 역의 케리 콘돈, 실없는 듯 때로 정곡을 찌르는 경찰 아들 도미닉 역의 배리 케오간 또한 호연을 보여주며 캐릭터극으로서 영화의 완성에 일조합니다.
<이니셰린의 밴시>에서 들리는 인물들의 대사는 영어임에도 구수함이 느껴지는 아일랜드 억양이 인상적입니다. 그 말투에서 느껴지는 수더분하고 구수한 감성, 대부분의 경우 헐렁하고 무던한 성격에 피식거리다가도 일순간 살벌하게 얼어붙고 마는, 관객을 갖고 노는 다크 코미디로서 <이니셰린의 밴시>가 지닌 카리스마는 기대 이상으로 대단합니다. 이번에도 명쾌한 결론을 내기보다 닫히지 않은 길로 이야기와 인물이 계속 나아가기를 택하는 감독의 스토리텔링과 연출을 따라, 관객은 쉽게 답을 낼 수 없으나 끝내 벗어날 수는 없는 세상에 관한 중대한 질문과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질문은 한껏 부풀린 몸집과 무거운 표정이 아니라, 헐렁하고 다급한 걸음걸이와 안갯속을 헤매는 듯한 표정으로 다가올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