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상적인 영화리뷰 2022 - BIFF 2022 <본즈 앤 올>
이번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본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의 신작 영화 <본즈 앤 올>은 티모시 샬라메를 스타덤에 오르게 한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이후 감독과 티모시 샬라메의 두번째 만남으로 화제를 모은 영화입니다. *(그러고 보니 지난 2015년 <비거 스플래쉬>로 감독이 틸다 스윈튼과 함께 부산을 방문했을 때 직접 GV로 만나기도 했네요.) 잊지 못할 호흡을 보여준 배우와 감독이 카니발리즘(식인)이라는 충격적 소재로 다시 만난 영화라 더욱 더 관심을 모은 영화이지만, 영화는 소재의 파격성에 매몰되는 우를 범하지 않고 불안한 처지에 놓인 두 청춘의 복잡미묘한 감정에 다가가는 매개로 잘 활용한 덕에 '로맨스를 가미한 호러'가 '호러를 가미한 러브스토리'로서 소재의 장벽을 뛰어넘는 여운을 남깁니다.
아버지와 단둘이 사는 16세 소녀 매런(테일러 러셀)은 넉넉치 않은 형편 속에서 조용하고 차분하게 살아가는 평범한 청소년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학교 친구들과 어울리러 나간 자리에서 그녀는 오랫동안 숨겨왔던 자신의 본성을 드러내니, 바로 사람을 먹는 습성입니다. 기호나 취향에 따른 것이 아니라, 사람을 먹어야만 생명력을 이어갈 수 있다는 점에서 이 본성은 위험할 뿐만 아니라 불가항력적입니다. 매런의 하나뿐인 가족이었던 아버지는 더 이상 감당할 자신이 없어 매런을 떠나며 얼굴도 모르는 엄마에 대한 정보를 매런에게 남깁니다. 혼자 살아나갈 엄두가 나지 않는 매런은 무작정 엄마를 찾아 길을 떠나고, 그 길에서 자신과 같은 식성을 가진 소년 리(티모시 샬라메)를 만납니다. 평범한 삶을 어떻게든 지켜내려는 매런과 달리 리는 정처없이 떠도는 지금에 만족하는 듯 하면서도 여동생을 향한 각별한 애정을 드러냅니다. 잃어버린 삶을 회복하기 위해 시작했으나 금지된 욕망을 채워야만 이어갈 수 있는 둘의 여정은 로맨틱한 한편, 설리(마크 라이런스)를 비롯해 그들과 같은 식성을 지닌 이들을 뜻밖에 자주 만나게 되는 이 여정은 한편으로 위험하기도 합니다.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은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의 애틋하고 절절한 로맨스로 전세계 영화 팬들을 매료시킨 다음 형이상학적이기까지 한 호러 <서스페리아>를 내놓으며 전세계 영화 팬들을 열광 혹은 당혹스럽게 했는데, 그 이후 내놓은 이번 <본즈 앤 올>은 그러한 로맨스와 호러 감수성의 확실한 그리고 이상적인 결합이라 할 만합니다. 카니발리즘이라는 소재 자체가 주는 충격이 상당해서인지, 영화는 의외로 이 소재에 대한 묘사를 (예상보다는) 비교적 절제하는 느낌입니다. 매런과 리와 같이 (마치 뱀파이어처럼) 식인을 향한 본능적인 욕구를 참을 수 없는 부류의 사람들을 영화에서는 '이터(eater)'로 지칭하는데, 이들은 이 욕망을 거부할 수 없으면서도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이들로서 저마다의 고충을 안고 있습니다. 무차별적인 살육으로 세상을 공포에 몰아넣기보다, 피할 수 없는 자신들의 잔혹한 습성을 세상의 그림자 속에 숨어 해소하는 이들이죠. 두 주인공과 함께 또 다른 주요 인물인 설리가 오랜 세월을 '이터'로 살아오며 자기 나름의 원칙을 세운 인물이라면, 두 주인공인 매런은 이제 막 자기 정체성이 확립되려는 소년소녀들이라는 점에서 이러한 본성의 발현이 더욱 큰 파문을 일으킬 것입니다. 즉 매런과 리의 여정은 살기 위해선 사람을 먹어야만 한다는 것만 제외하면, 불확실한 미래를 찾아 방황하는 여느 청춘의 그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영화의 방점은 확실히 두 사람의 식성이 세상에 드리우는 공포보다 그 공포를 헤치고 풋풋하게 피어나는 두 사람의 사랑 쪽에 찍혀 있습니다. 매런과 리의 교감은 노골적이고 자극적인 노출 묘사가 아닌 친밀한 대화와 가까운 호흡으로 나타나며 한층 순수한 성질의 것으로 그려지죠. 그럼에도 이 청춘의 러브스토리에 난데없이 이런 공포스런 설정이 끼어드는 것은, 어쩌면 괴물처럼 솟구치는 욕망과 흔들리는 내면을 딛고 인간다운 (혹은 세상이 용인할 만한) 삶을 꿈꾸는 보통의 청춘에 대한 다소 극단적인 비유가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자신의 본성에 대해 안고 있는 두 사람의 고민은 두 사람의 남은 일생을 뒤흔들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두 사람만의 것이기도 합니다. 어디 가서 이게 내 고민이라고 절대 떠벌릴 수 없는, 거대하지만 은밀해야 하는 고민이기 때문이죠. 때문에 선택지는 이 본성을 가만히 떠안고 가든, 혹은 떨쳐내거나 최대한 멀어지려 조용히 몸부림치든 둘 중 하나로 나뉘게 됩니다. 그들이 품은 끔찍한 고민의 배경이라곤 믿기 어려울 만큼 고요하고 평화로운 미국 대륙의 곳곳을 비추며, 영화는 그들이 품은 내적 갈등의 절박함과 서로에게 향하는 마음의 애틋함을 더욱 극적으로 강조합니다. 거부할 수 없기에 끔찍하고 동시에 아름다운 시절을 지나고 있는, 위험한 여정 위 두 사람을 향한 감독의 시선을 그래서 더없이 로맨틱합니다. 이성으론 선뜻 받아들일 수 없는 욕망을 지닌 이들의 모습임에도 그 외면을 넘어서는 절실한 감정에 관객 또한 어느덧 몰입하게 됩니다.
동물적인 욕망과 세상에 융화된 삶 사이에서 치열하게 갈등하면서 동시에 치열하게 사랑하는 연인을 연기하는 매런 역의 테일러 러셀과 리 역의 티모시 샬라메는 영화가 끝까지 '호러'가 아닌 '러브스토리'로 향하게 하는 방향추와도 같습니다. <이스케이프 룸> 시리즈의 주인공으로 익숙한 테일러 러셀은 이번 영화에서 정형화된 연기 양식을 벗어나 때로 미세하게 떨리고 때로 야수처럼 포효하는 불안한 청춘으로서 매런의 내면을 대단한 에너지로 보여줍니다. 감독의 전작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에서 복숭아처럼 손대면 터질 듯 무르익은 소년의 감정을 연기하며 아카데미 후보에까지 올랐던 티모시 샬라메는 이번 <본즈 앤 올>에서 대담하고 야성적인 외면과 깨질 듯한 내면을 동시에 지닌 인물을 연기하며 역시 강렬한 인상을 남깁니다. 여기에 두 사람이 만나는 또 다른 '이터'인 설리 역의 마크 라이런스가 기묘한 긴장감과 광기를 불어넣으며 극의 텐션을 팽팽하게 강화합니다.
<본즈 앤 올>은 흥건한 피를 보면서도 반짝이는 사랑을 느끼게 되는 기이하고 매혹적인 경험을 선사하는 영화입니다. 청춘이라는 축복이자 통과의례의 시간 속엔 가장 고통스럽고 혼란스럽지만 동시에 철저히 우리만의 것일 수 밖에 없는 불안과 방황이 존재합니다. 막을 수 없는 욕망과 그 결과 흥건하게 번지는 피는 마치 그 불안과 방황의 여파를 투영하는 듯 하지만, 그 피칠갑을 하고도 서로를 '본즈 앤 올', 즉 '뼈까지 다' 갈망하는 연인의 모습에선 일말의 찬란한 순간이 엿보이는 듯 합니다. 한 가지 색깔의 감수성으로 정의할 수 없이 없는 셈 치고픈 고통과 영원히 간직하고픈 환희가 함께 하는, 긴장을 놓을 수 없는 이야기 속에서 피어나는 빛나는 사랑을 목격하며 이것이 바로 청춘임을 실감하게 하는 <본즈 앤 올>은 대담한 접근과 사려깊은 시선을 동반하여 완성된 청춘의 강렬한 초상과 같은 영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