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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진만 Oct 20. 2022

나 아니면 있을 수 없는 세상(들)이 있다

인상적인 영화리뷰 2022 -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 2022)


수많은 대작 영화들을 제치고 대담한 상상력과 훌륭한 완성도로 올해 전세계 영화 팬들을 열광시킨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는 과연 그 명성에 걸맞게 머리가 어질어질해지는 상상의 나래로 인종과 국적을 초월한 보편적 감정을 건드리는 기적을 일궈냅니다. 벌써 익숙해지고 어딘가에서는 식상해 할 '멀티버스'라는 소재의 본질을 우리의 삶과 직접적으로 연결시킨 기발하고도 따뜻한 이 영화는, 짓궂고 엉망진창이며 귀엽고 웃기며 파워풀하고 마침내 감동적인, 올해를 정리할 때 반드시 언급될 영화입니다.


중년의 이민 1세대 중국계 미국인 에블린(양자경)은 아버지(제임스 홍)의 반대를 무릅쓰고 남편 웨이먼드(키 호이 콴)와 함께 미국으로 건너와 가정을 꾸렸지만, 나이를 먹을 만큼 먹은 후의 현실은 꿈꿨던 바와 달리 여전히 버겁습니다. 운영중인 세탁소는 세금 문제로 가압류된 상태고, 가장인 아내 곁에서 잠자코 있는 듯 했던 남편 웨이먼드는 이혼서류를 준비중이며, 하나뿐인 딸 조이(스테파니 수)와는 조이의 여자친구 문제로 시작된 갈등이 좀체 아물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게 인생에서 최악의 최악에 이른 듯한 에블린이 세금 문제를 해결하러 힘없이 국세청으로 향하던 중, 어수룩하던 남편이 갑자기 전혀 딴판인 모습을 하더니 그녀에게 이상한 소리를 하며 난데없이 미션을 전합니다. 세상은 사실 수많은 다중우주로 이루어져 있고 자신은 지금 그녀가 알고 있는 남편 웨이먼드가 아닌 다른 우주에서 온 웨이먼드인데, 그 모든 우주를 파괴하려는 절대악이 현재 활개를 치고 있고 그 악에 맞설 자가 수많은 우주 중 바로 이곳의 에블린, 당신이라는 것입니다. 당장에 먹고 사는 것조차 힘겨운 에블린은 그런 자신이 이 우주만도 아니고 수천 개의 우주'들'을 구할 희망이라는 것에 놀라고, 자신이 맞서야 할 절대악의 정체에 또 한번 놀랍니다. 그렇게 그녀 생애 한번도 겪어보지 못한, 아니 누구도 겪어보지 못할 모험이 시작됩니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 2022)


국내 미개봉작이었던 장편 데뷔작 <스위스 아미 맨>에서부터 비범한 상상력을 뽐냈던 다니엘 콴, 다니엘 쉐이너트 감독은 다음 공동 연출작인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에 이르러 비로소 본격적으로 만개한 상상력을 널리 알림은 물론 관객을 감화시키기까지 합니다. 사실 영화가 다루는 '멀티버스'라는 소재는 이미 마블의 MCU에서 주요 소재로 다루었기 때문에 벌써 아주 새롭진 않은 소재가 됐습니다. 그러나 영화는 이 멀티버스라는 배경 위에서 '세계를 구하는 영웅'의 이야기가 아닌 '삶을 구하는 인간'의 이야기를 전개합니다. 영화 속 멀티버스는 주인공인 에블린이 지금의 선택이 아닌 다른 선택을 했을 경우로부터 파생되어 구축됩니다. '만약 에블린이 웨이먼드를 따라 아버지를 떠나지 않고 중국에 남았다면, 본래 꿈꾸던 배우가 되었다면' 같은 가정으로부터 출발하는 식이죠. 에블린 본인은 꿈에도 몰랐겠지만 철저히 에블린의 삶에 뿌리를 두고 뻗어나가는 멀티버스는 이 세계의 에블린과 소통도 가능한데, 그로 인해 에블린이 겪게 되는 세계를 초월한 모험, 에블린이 개인기를 획득하고 펼치는 방식에 대한 묘사가 대단히 신선하게 전개됩니다. 수많은 층위로 겹쳐진 세계의 혼돈을 시각적으로 스펙터클하게 전개하지 않아도 재기 넘치는 촬영과 편집, 배우들의 노련한 연기에 힘입어 마블도 미처 다 구현하지 못한 멀티버스의 무한한 가능성이 '배째라 정신'에 가깝게 구현되는 정신나간 상상력을 만끽할 수 있습니다. 종종 현실적인 다른 가능성과 아득하게 먼 곳에 있는 우주가 펼쳐질 때 맥락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저 세상 유머 감각을 과시하기도 하지만, 그렇게 무한대의 영역을 누비던 상상의 파동이 결국 수렴하는 종착지는 우리의 삶임을 알게 되며 가슴을 때리게 됩니다.


영화의 제목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는 이야기를 구성하는 세 장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1장 '에브리씽'(모든 것)에서 시작해 2장 '에브리웨어'(모든 곳)를 거쳐 3장 '올 앳 원스'(한번에)로 귀결되는 것이죠. 각 장의 이름처럼 에블린은 자신이 될 수 있었던 '모든 것'에 다가가 보고, 있을 수 있었던 '모든 곳'에 있어보는 경험을 합니다. 그 모든 우주는 에블린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만약 ~했더라면'이라고 가정할 때마다 하나씩 생겨났을 가능성의 공간들일 것입니다. 에블린에게는 그 많은 가능성들을 직접 탐방해 보는 매우 귀한 특권이 주어진 셈인데, 그렇게 체득한 '모든 것'과 '모든 곳'에 관한 경험을 '한 번에' 쏟아붓는 곳이 결국 어디로 향하는지 따라가면 느끼는 것은 가능성의 공간에서 부유하지 않고 비로소 존재하는 지금 이곳의 가치입니다. 살면서 끊임없이 머릿속에 그려봤을 수많은 가능성의 우주를 누빌 기회가 주어진대도 우리가 끝내 도착할 곳은 내 인생, 그리고 내 인상과 기꺼이 함께 해 온 이들과 있는 지금 여기라는 것. 그 모든 이루지 못한 꿈과 선택하지 않은 가능성들을 머금은 채 치열하게 움직이고 있는 우리의 우주가 은 그 '모든 것'이자 '모든 곳'의 에너지를 모두 품고 있는 '단 하나'라는 진실을 발견하게 되죠.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 2022)


영화는 수천 개의 우주를 넘나드느라 시끄럽고 뒤죽박죽이기 이를 데 없지만, 그 속에서 놓치지 않는 건 삶을 향한 긍정 어린 시선입니다. 에블린은 다른 우주에서 무술에 능한 액션스타가 될 수도 있었겠지만, 그런 '전사'이기 이전에 에블린은 '인간'임을 잊지 않으려 합니다. 세상과 맞서 싸우는 전사이기 이전에, 세상을 사랑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하는 보통의 인간 말입니다. 영화는 세상을 '나의 뜻을 거스르는 곳'이라 규정하고는 때로 투사가 되어 맞서 싸우려 들곤 하는 우리들에게, 귀기울이고 바라보는 다정함으로 세상을 지킬 수 있다고 말합니다. 무너뜨리거나 깨부수는 게 아니라 끌어안음으로써 말이죠. 모든 곳을 누벼보고 모든 것을 해본 다음에 깨달은, '지금, 여기, 당신'의 눈부신 존재가 오직 이 우주에만 존재한다는 깨달음은 언뜻 무척 철학적이고 종교적인 선문답처럼 느껴질텐데도 이 '대혼돈의 멀티버스' 모험을 겪은 후에는 가슴 시리게 다가옵니다. 영화가 그 모든 눈부시고 화려하고 당혹스럽고 드라마틱한 순간들을 지나 포착하는 삶의 작은 표정, 진실이 담긴 표정을 발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에블린의 그 우여곡절 모험은 사실 세상을 살고 사람들과 함께 하는 이 세상에서 줄곧 짓고 있었던 그 진실의 표정을 찾기 위함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이 엄청난 난이도의 모험을 홀로 너끈히 해내는 양자경 덕분에 혼란하고 소란스런 모험은 믿을 수 없게 단단한 심지를 지닌 이야기가 됩니다. 자신이 수십년간 걸어온 배우의 길을 스피디하게 되짚음은 물론, 평범한 여인이 짊어진 고단한 삶의 무게를 어머니의 얼굴로, 여자의 얼굴로, 인간의 얼굴로 섬세하게 그려내는 마스터피스급의 연기로 양자경은 긴 필모그래피의 정점을 비로소 찍습니다. 에블린과 갈등을 겪는 딸로 멀티버스를 따라 다양한 모습을 과시하는 조이 역의 스테파니 수는 미래를 기대케 하는 다채로운 연기를 선보이며, 소심한 남편이었다가 치밀한 비밀요원이었다가 낭만적인 신사가 되기도 하는 웨이먼드 역의 키 호이 콴도 잊지 못할 앙상블을 선보입니다. 국세청 직원 그 이상의 존재감을 여러 우주에서 뽐내는 디어드리 역의 제이미 리 커티스가 보여주는 뜻밖의 변신도 인상적이고요. 수많은 우주를 넘나들며 황당하고 갑작스런 변신마저 마다 않는 배우들의 앙상블 덕에 영화 속 멀티버스 모험은 더욱 현란하고 활기찹니다.


보고 난 뒤 세상이 달리 보인다면 좋은 영화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하는데, 그런 점에서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는 매우 좋은 영화입니다. 어떤 가정 하나만 다르게 작용했다면 원하는 대로 바뀌었을 삶이란 없다는 것을, 그 수많은 선택과 행운과 불운과 기회와 인연이 겹쳐 나를 데려다놓은 지금이기에 비로소 누릴 수 있는 대신할 수 없는 기쁨이 있다는 것을 안 뒤의 세상은 이전과 매우 달리 보일테니까요. 저 멀리 안드로메다로까지 상상의 말초신경을 뻗어나가는 와중에도 두 발만은 우리가 딛은 이 세상에서 떨어질 줄 모르는 이 영화에는, 한계를 모르고 상상력을 퍼뜨려 나가는 뇌와 우리 스스로를 향한 넓고 깊은 애정을 품은 심장이 모두 들어 있습니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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