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래 2020년 개봉 예정이었다가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해 2년이나 연기된 끝에 비로소 개봉하게 된 영화 <자백>은, 국내 영화 팬들에게도 높은 평가를 받은 스페인의 스릴러 영화 <인비저블 게스트>를 리메이크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원작 영화가 워낙 탄탄한 전개와 충격적인 반전으로 잘 알려져 있는 터라 이를 리메이크한다는 것은 매우 위험부담이 큰 시도였을 것입니다. 원작을 그대로 따른다면 다시 만들 명분이 없는 싱거운 결과물이 될 것이고, 새로운 반전을 창조하여 원작을 넘어서는 것 또한 쉽지 않겠죠. 다행히 <자백>은 영리한 재해석과 재구성에 힘입어 원작을 안 본 이는 물론 원작을 본 이들도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영화가 되었습니다.
촉망받는 IT 기업가이자 재벌가의 사위인 유민호(소지섭)가 하루아침에 내연녀 김세희(나나)를 살해했다는 혐의를 받습니다. 상황인즉슨, 불륜 사실을 폭로하겠다는 협박을 받고 향한 호텔에서 유민호는 김세희와 약속되지 않은 재회를 하게 되는데, 난데없이 의문의 습격을 당한 후 깨어나 보니 김세희는 죽어 있고 현장엔 유민호만 남아있었던 것이죠. 외부 침입 흔적을 발견할 수 없기에 자연히 유민호가 사건의 가장 유력한 용의자가 된 것인데, 불구속 입건으로 잠시 풀려난 사이 유민호는 재판을 앞두고 누명을 벗을 완벽한 알리바이를 위해승률 100%로 알려진 변호사 양신애(김윤진)와 외딴 산골 별장에서 비밀리에 접견을 합니다. 양신애는 빈틈 없는 진술을 위해서는 사건의 자초지종을 처음부터 파악하고 재구성해야 한다고 하고, 이에 따라 사건에 관한 유민호의 진술이 시작되는데, 그 과정에서 전혀 새로운 사건이 수면 위로 떠오릅니다.
<자백>(Confession, 2020)
원작을 보지 않은 이들이 느낄 <자백>의 가장 큰 매력은 시공간의 제약을 두고 인물들의 진술로만 전개되는 서사의 긴장감입니다. 영화는 액자식 구조를 띄는데, 양신애가 유민호의 진술을 검증하는 외딴 별장 장면이 액자 바깥 이야기라면 유민호의 진술 혹은 양신애의 재구성에 따라 재연되는 사건의 양상이 액자 안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별장 속 두 인물의 서술에 따라 그들이 서술하는 사건의 그림이 다르게 묘사되는 등 이 두 이야기 축이 긴밀한 연결성을 갖죠. 유민호의 양신애의 합작 혹은 대치로 볼 수 있는 별장 장면은 대사와 표정, 작은 움직임만으로 상당한 긴장감을 자아냅니다. 자신의 미래를 좌우할 재판을 (실력은 믿을 수 있다지만) 처음 보는 변호사에게 맡긴 유민호의 경계심과,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림 없는 진술을 위해 유민호를 압박하는 양신애의 도발이 대립하며 관객도 그들의 저의를 의심하게 만듭니다. 한편 이들의 진술에 따라 재연되는 사건 양상은 진술 방향성에 따라 상황과 인물을 전혀 다르게 해석하며 미스터리를 심화시킵니다. 앞서 이야기하고 있던 것이 사건의 진상이라고 받아들이며 보다가 같은 시공간을 배경으로 전혀 다른 버전의 진실이 전개되면서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이 일어난 그대로의 사건과 저마다에게 유리하게 해석되는 사건 사이, 어디쯤에 있을지 의문에 휩싸이게 됩니다. 그렇게 네 명 남짓 제한된 등장인물들이 제한된 배경 속에서 각기 다른 진실과 그에 따른 각기 다른 입장을 보여주다, 마침내 하나의 명백한 진실로 귀결되며 드러나는 인물들의 진짜 얼굴을 포착하는 재미가 살아있습니다.
그러나 원작 영화가 알음알음 입소문이 많이 났기에, 원작과의 유의미한 차별화 또한 <자백>의 큰 과제였을 것입니다. 이를 위해 영화가 선택한 것은 원작에 충실하게 복종하거나 반대로 정면 도전하는 대신, 원작의 공백을 메우는 것이었습니다. 원작에선 반전의 충격을 위해 진실이 드러나는 순간을 최대한 뒤로 미루었는데, <자백>은 이 타이밍을 좀 더 앞당기는 시도를 합니다. 때문에 결말의 충격파는 상쇄될 수 있겠지만 그보다 내러티브의 내실을 위한 선택이었고, 결과적으로 바람직한 선택이었습니다. 반전을 꽁꽁 숨기다 보면 인물들에 몰입할 시간이 주어지지 않아 자칫 인물이 서사 트릭을 위해 소모될 수 있는데, 진실을 예상보다 앞당겨 드러내고 이후 그 진실 앞에 나타나는 인물들의 진짜 얼굴에 초점을 맞추면서 영화는 사건 이전에 인물이 주도하는 보다 현실성 있는 전개, 보다 견고한 드라마를 획득하게 됩니다.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비단 진실이 무엇이냐 뿐만이 아니라 드러난 진실 앞에서 인물들이 드러내는 민낯은 무엇인가일텐데, 원작 영화에서도 결말의 충격에 가려 물음표로 남았던 이 부분을 <자백>은 간과하지 않은 듯해 만족스러웠습니다.
<자백>(Confession, 2020)
탄탄한 스릴러, 더구나 이 영화처럼 시공간의 제약을 둔 진실 공방을 다루는 스릴러라면 배우들의 연기가 무척 탄탄해야 할 것입니다. 이번 <자백>으로 첫 스릴러 도전을 했다는 유민호 역의 소지섭 배우는 인상적인 변신을 보여줍니다. 그가 연기해 온 대부분의 캐릭터들은 속이 빤히 보이는, 즉 본래 성정이 어떤 사람인지 대변에 느껴지는 인물들이었는데 이번 영화에서는 진실한 자인지 기만으로 가득찬 이인지, 선량한 자인지 위선자인지 알 수 없는 캐릭터를 유려하게 연기합니다. 한편 자타공인 '스릴러 퀸'인 양신애 역의 김윤진 배우는 이번에도 스릴러 장르의 힘과 긴장감을 배가하며 명불허전의 활약을 보여줍니다. 이번에는 보다 정적인 캐릭터로서 치밀한 대사 전개와 감정 컨트롤을 통해 임팩트를 줘야 할 때 정확히 주며 관객의 감정을 건드립니다. 김세희 역의 나나는 기대 이상의 빼어난 연기를 보여주며 앞으로 스크린에서의 활약을 기대케 합니다. 이미 사망한 인물이므로 타인의 진술에 따라 스탠스가 달라질 수 밖에 없는 인물인데, 그 변신이 무척 매끄럽고 능숙합니다. '김세희는 원래 이런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 누구의 진술에 따라서도 그 진술대로 보일 수 있는 상반된 성격을 안정되게 연기했습니다. 더불어 사건의 중요한 키를 쥐고 있는 또 다른 인물인 한영석을 연기한 최광일 배우의 절제되고도 진한 감정 연기 또한 인상적이었습니다.
이처럼 <자백>은 인물들의 드라마를 좀 더 보강해 한국 관객들이 보다 선호할 만한 '현지화 각색'을 잘 이루어낸 경우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물들의 감정에 과하게 몰입하며 차가운 스릴러의 질감을 지난한 감정의 늪에 빠뜨리는 우를 범하진 않았습니다. 이야기 측면에서 원작이 지닌 메리트를 적절히 계승하는 한편 사건과 인물, 이성과 감정의 비중을 균형 있게 맞춤으로써 놀랍고 신선한 결과물까지는 아니더라도 탄탄한 즐거움을 주는 오락영화가 된 웰메이드 리메이크작으로서, <자백>은 원작을 안 봤다면 당연히 재미있게 볼 만한 영화이고, 원작을 봤대도 꽤 기특하게 볼 만한 영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