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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진만 Nov 03. 2022

진짜 '좋은 간호사'의 얼굴을 확인하다

인상적인 영화리뷰 2022 - <그 남자, 좋은 간호사>

<그 남자, 좋은 간호사>(The Good Nurse, 2022)


비공식적으로 400여명의 환자를 살해한 것으로 알려진 미국의 간호사 연쇄 살인범 '찰스 컬렌'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넷플릭스 영화 <그 남자, 좋은 간호사>는 연쇄 살인범이 주인공인 영화이지만 서스펜스에 주력하는 범죄 스릴러라기보다 스릴러를 가미한 드라마처럼 다가옵니다. 물론 배우들의 출중한 연기 덕에 긴장감을 절로 자아내긴 합니다만, 그보다 더 짙게 영화에 드리워져 있는 것은 '좋은 간호사'의 얼굴을 한 악마의 얼굴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곁에 엄연히 존재하는 진짜 '좋은 간호사'의 얼굴입니다. 


싱글맘 간호사 에이미(제시카 차스테인)는 삶이 버겁습니다. 심장병을 앓고 있지만 어디 얘기했다간 두 딸을 키우게 할 일자리를 잃을 수도 있기에 어디 말도 못한 채 어려운 집중치료실 야간 근무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직장에서 일정 기간을 채워야 건강보험 혜택을 받고 그걸로 자기 병도 치료할 수 있기에 더더욱 감내해야만 합니다.) 그렇게 생계를 위해 아픔을 감내하는 와중에도 아이러니하게도 그로 인해 아이들과 보내는 시간은 점점 부족해지죠. 환자들 앞에서는 늘 따뜻하고 사려깊은 모습을 잃지 않으려 노력하지만 육체적, 정신적으로 점점 한계에 다다르려는 그녀에게 야간 근무를 함께 할 새 동료 간호사 찰리(에디 레드메인)가 나타나고, 그의 따뜻하고 친절한 모습에 에이미는 위안을 얻게 됩니다. 세심하고 살갑게 챙겨주는 찰리와 야간 근무를 버티며 에이미는 조금씩 마음의 짐을 덜어가고 잊고 있던 희망을 품어갑니다. 그런데 어느날부턴가 집중치료실에서 환자들의 의문사가 이어지고, 커리어가 베일에 싸인 찰리가 용의선상에 오릅니다. 좋은 간호사라 믿었던 찰리에 대한 에이미의 '혹시나' 했던 의심은 '역시나' 하는 확신으로 바뀌어 가는데, 진상규명보다 이윤과 평판이 먼저인 병원에서는 병원에서 일어나는 의문사를 소극적으로 조사하며 쉬쉬하려 합니다. 결국 에이미는 직장, 가족 등 소중한 것을 잃을지도 모를 큰 위험을 감수하고 사건을 수사하는 경찰과 접촉합니다.


<그 남자, 좋은 간호사>(The Good Nurse, 2022)


연쇄 살인범의 이야기를 그린다고 하면 보통 형사나 검사 같은 사건의 추적자들이나 살인범 본인의 시선을 견지하곤 하는데, <그 남자, 좋은 간호사>는 조금 색다르게도 연쇄 살인범의 동료였던 사람의 시선으로 이야기를 전개합니다. 이는 찰스 컬렌이 철저히 간호사라는 자신의 직업적 정체성에 기반하여 살인을 저질렀다는 특수성 때문이기도 하겠습니다만, 아마도 찰스가 정말 주변 사람들 눈에 '좋은 간호사'같이 보였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이기도 할 것이고, 더불어 주인공인 에이미 로크런 같이 찰스와 함께 일했던 진짜 '좋은 간호사'를 보여주기 위해서이기도 할 것입니다. 연쇄 살인이라는 엄중한 주제가 간호사라는 직업이 연결되어 있는 이 사건을 자칫 자극 위주로 다룬다면, 간호사라는 직업이 지닌 본질적 가치마저 훼손될 우려가 있기에 이런 스탠스는 결과적으로 꽤 적절했습니다. 이미 세상에 널리 알려진 연쇄 살인범 이야기를 다룸에 있어 그를 둘러싼 드라마를 키우는 데 집중하기보다, 가치관적으로 그와 대척점에 서 있는 인물을 함께 세움으로써 사건의 악마성과 직업정신의 숭고함을 함께 상기시키니 말입니다.


사람을 살리는 직업인인 간호사가 사람을 죽인다는 설정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섬뜩하긴 합니다만, <그 남자, 좋은 간호사>가 살인에 대한 직접적 묘사나 살인범에 대한 서사 부여, 살인범 캐릭터에 대한 극적인 연출 없이 비교적 차분한 전개를 이어가면서도 큰 긴장감을 자아내는 이유는 주인공 에이미의 처지 때문입니다. 영화는 살인을 저지르는 찰스 컬렌에 관해서는 그 어떤 납득할 만한 사연, 몰입할 만한 개성을 나타내지 않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다정하고 친절한 간호사의 모습과 완전히 상반되는 습관과도 같은 살인의 이유에 대해서 끝까지 알 길이 없습니다. 반면 팍팍한 생계와 양육, 아이들과의 관계, 자신의 건강까지 돌볼 것이 너무나 많은 에이미의 사연에는 한껏 몰입하게 됩니다. 그 모든 것들을 하루아침에 잃을지도 모를 위험을 감수하고서 동료의 실체를 추적하는 과정은 조마조마하면서도 한편은 절박합니다. 그녀가 자신의 가족을 위해서, 자신이 돌보는 환자를 위해서 일에 성심을 다해 투신하는 태도가 아마도 반영되었을 그 추적은, 당연한 윤리보다도 이윤을 우선시하며 비정하게 서 있는 사회 뒤에 숨어 끝까지 그 속을 이해할 수 없게 하는 '백의의 악마'의 서늘함과 대비되며 직업적 윤리와 개인적 책임감을 모두 놓치지 않으려는 진정한 '백의의 천사'의 고달픈 진심을 더욱 또렷이 느끼게 합니다.


<그 남자, 좋은 간호사>(The Good Nurse, 2022)


범죄에 인간성을 부여하는 게 아닌, 범죄에 대한 반면교사로서 인간성을 깨닫게 하는 이 드라마에서 아카데미 남녀주연상을 수상한 두 배우가 나란히 주인공을 연기하는 걸 지켜보는 것은 그 자체가 커다란 즐거움입니다. 거의 모든 영화에서 선량하고 따뜻한 인물을 연기해 온 에디 레드메인은 바로 그 선량하고 따뜻한 그 이미지를 역이용해 납득 불가능한 범죄와 평행선을 이루는 외적 캐릭터의 대비로 무척 인상적인 살인범 캐릭터를 완성했습니다. 아예 새로운 캐릭터 연기에 뛰어들기보다 널리 알려진 캐릭터를 오버랩시키는 영리한 방식으로 확실한 임팩트를 줍니다. 한편 에이미 역의 제시카 차스테인은 그에 비하면 생활연기에 보다 가깝다고 할 수 있는데, 그 또한 진심어린 울림을 줍니다. 비범한 시민 영웅이라기보다 자신의 건강과 가족의 행복에 대한 두려움 속에서도 힘겨운 용기를 내어 진실을 밝히는 '조금 더 용감한 보통 사람'으로서 영화가 보여주고자 하는 진정 '좋은 간호사'의 모습을 진정성 있게 보여줍니다.


잘 알려진 충격적인 사건을 소재로 굵직한 배우들이 연기 격돌을 펼치는 <그 남자, 좋은 간호사>는 예상만큼 야심찬 영화는 아닙니다. 탄탄하게 짜인 스릴러나 범죄에 대한 심도 있는 탐구를 기대한다면 다소 실망스러울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범죄자에 대한 불필요한 연구보다 같은 사람이라면 공감할 수 밖에 없는 직업인의 이야기를 들여다 봄으로써, 때로 불가항력처럼 엄습하는 범죄의 기운 속에서도 더는 길을 잃지 않고 최악을 막아내는 인간의 조용한 힘을 이야기하는 영화입니다.

<그 남자, 좋은 간호사>(The Good Nurse,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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