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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짐니 Feb 23. 2016

어제도 오늘도 술

프롤로그. 진정한 술 맛을 알기 위해 쓰는 주류 에세이

마법의 묘약을 처음 접하는 경건한 자세


처음 술을 마신 건 고등학교 1학년 때인 2006년(엄마는 스무 살 인 줄 알고 있으니까 사뭇 비밀). 바야흐로 독일 월드컵이 한창이었고 나와 친구들은 스위스전을 맞이하여 부모님이 여행 가신 친구 집에서 치밀하게 계획해두었던 비밀 맥주 파티를 했다. 그래 봤자 세 명이서 맥주 한 병을 종이컵에 따라 사이좋게 삼등분으로 나눠 마시는 파티였지만, 술을 입에 대기 전까지의 그 설렘이란! 마치 인어공주에게 두 다리를 선사하는 마법의 묘약처럼 금단의 영역을 넘나드는 신비하고 두려운 존재. 그것을 처음 접하는 나의 자세는 꽤 경건했다.


설레는 마음을 겨우 붙잡고 한 모금씩  꼴깍꼴깍 넘겼는데, 웬걸! 너무 써서 눈물이 났다. 탄산은 왜 이렇게 세고, 이 밑도 끝도 없는 쌉사름은 무엇이란 말인가. 게다가 '이걸 무슨 맛으로 먹지?'라고 조잘거리며 각자 두 모금 정도 마셨을 때, 친구 한 명이 취해서 울며 아파트 복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친구의 미약한 알콜 분해능력 덕분에 우린 옆집 아줌마에게 현행범으로 검거되었고 다음 날 여행에서 돌아신 친구 부모님께 연행되어 실컷 혼났다. 애매한 추억만 남긴 첫 음주는 '이렇게 쓴걸 어른들은 왜 먹지?'라는 모호함만 남긴 채 수능 끝날 때까지 봉인되었다.



금단의 묘약이라 여겨던 첫 술, 맥주




수능 후, 술은 내게 '해방'의 상징이었다.


중2병이 늦게 와 심각한 고3병을 앓던 나는 '그동안 나를 억압했던 그 모든 것 대신 너를 마셔주겠어!'라는 허세 가득한 마음가짐으로 술을 마셔댔다. 불행히도(?) 주량이 꽤나 쌨던 나는  쓰디쓴 소주와 맥주를 아주 많이 마셔야 취했다. 무슨 맛인지도 모르겠지만 같이 먹는 안주가 맛있어서 그냥 무턱대고 먹고 마셨고, 취해서 헬레레한 무절제의 상태가 신이 났다. 새내기 때 학교 수업은 안 가도 술을 먹으러 학교에 갔고, 수업이 끝나면 고량주를 먹고 잔디밭에 누워 풍류를 즐겼다.  


술 먹고 넘어져 얼굴에 생긴 큰 멍자국, 10kg 불어난 몸무게 등 몸의 부정적인 변화와 함께 이상한 주사가 눈에 띌 즈음 경각심이 들었다. '이거 영화에서나 보던 주정뱅이의 삶 아닌가?' 마침, 고3병과 새내기 폭주병이 시들시들해져 갈 때였다.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단 생각이 들었고, 술을 끊었다. 술을 끊고 나니 술자리를 기피하기 시작했고 즐거움이 덜 해졌다. 뫼비우스의 띄 같았다.


무턱대고 마셨던 술이 어느 순간 인생에 즐거움을 제공하는 짙은 수단 중 하나가 되어있었다. 술 한잔을 기울이며 친구들과 진솔한 이야기를 나누는 법을 배웠고, 함께 추억을 쌓았다. 당연히 얼마 못가 다시 술을 마셨다. 대신, 정말 마시고 싶을 때만 마셨다. (그게 좀 많았지만.) 어른들이 말하는 '술 맛'을 알게 된 것 같았다. 아르바이트를 시작하면서는 저렴한 소주, 맥주가 아닌 새로운 종류의 술에도 눈을 떴다. 맛집과 함께 맛있는 술을 파는 집들도 찾아다녔다. 인생의 또 다른 즐거움에 눈을 뜬 것 같았다.



애주가였던 내가 다시 한 번 술맛을 잃었다.


나는 정말 꽤나 애주가'였'다. 과거형으로 얘기하는 이유는  얼마 전, 술맛을 잃었기 때문이다. 길어지는 취준생 기간과 그에 따른 내면의 짙은 불안, 작고 사소한 실패 등 삶의 즐거움의 빈도가 낮아졌고 그 빈자리를 술로 채우려 했다. 즐겁지 않은 기분으로 술을 마시니, 다시 술이 나를 마시기 시작했다. 술 먹고 사고를 치기 시작했다. 몸과 마음이 짓이겨졌고  또다시 살이 10kg 이상 미친 듯이 불어나기 시작했다. 이러면  안 되겠다 싶어 한 동안 술을 끊으며 '절주와 금주의 미덕'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술에 대한 고민은 '술이란 무엇인가?'라는 원론적인 부분까지 흘러들어갔다. 술이 무엇이기에 내가 술을 먹는 게 아니라 술이 나를 먹고 있는 것인가! 술이 그동안 나에게 어떤 즐거움을 주고 있었는지, 어떻게 술을 마셔야 술을 내 인생에 즐거움의 공급체로 남겨 둘 수 있을까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인생의 다양한 색깔을 더하게 한다는 '진정한 술맛'이란 존재하는 것인가?


사실, 디오니스가 실수로 포도를 밟아 포도주를 만든 그 순간부터 술은 항상 그대로였던 것 같다. 술은 가만히 있는데 자꾸 내가 변하고, 나약한 인간인 내가  이것저것에 술'탓'이라며 변명을 붙이는 것 일 수도 있다. 나는 이 고민에 대한 답을 찾으려 한다. 술과 함께 했던 나의 지난 나날들을 돌아보며, '술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나름의 정의를 내리는 것.  이것이 현재 비(非) 주(酒)류 상태인 내가 주(酒)류 에세이를 쓰고자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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