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가 복잡할 땐 곤지암으로 가자
조지아에게 카를로비 바리가 있다면, 나에겐 곤지암이 있다.
곤지암에 가면 할아버지를 만날 수 있다.
동생과 나는 제법 나이 차이가 있는 편이다. 성향이 정 반대라, 작은 걱정도 종일 붙들고 있는 나와 달리 그 애는 간단명료하고 화끈하며, 어떤 면에선 나보다 성숙된 영혼을 소유하고 있다. 그래서 답답할 때마다 그 애에게 걱정을 털어놓곤 하는데 그럴 때마다 돌아오는 질책은 한결같다. '언니는 너무 복잡하게 사는 것 같아. 제발 인생을 좀 단순하게 살아.'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사람이 죽어가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래서 삶에 의연하고 싶다가도 제대로 살아내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 그 간극은 가끔 나를 한없이 주저앉힌다. 최근엔 주저앉힘에 호락호락하게 당하지 않으려고 어떤 상황을 가정해보는 데 재미가 들렸다. 이를테면, '만일 내가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면?' 하는. 이 방법은 꽤 쓸만하다. 예로,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나 공공장소를 이용할 때 내가 세운 도덕적 기준에 미달되는 이에게도 이 가정을 적용해 볼 수 있다. 그러면 당장에 가서 도덕 교과서를 들이밀고 싶었던 마음이 누그러진다. 초면인 그 사람의 얼마 남지 않은 삶을 응원하면서, 죽기 전에 한 번쯤 화끈한 행동을 해보고 싶었겠거니 하는 알량한 자비로움이 생기는 것이다.
이 가정을 그대로 영상화한 것이 <라스트 홀리데이>라고 할 수 있다. 주인공 조지아는 시한부를 선고받고 그대로 카를로비 바리로 떠난다. 그곳은 그가 아주 오랫동안 버킷리스트에 품어왔던 장소이자 늘 속박되어 있던 안정성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인생을 심플하게 살도록 돕는 버라이어티 한 안식처다. 지금껏 열심히 모아두었던 돈을 모두 챙겨 떠난 곳에서 그는 기약 없이 나중으로 미뤘던 것들을 원 없이 한다. 단순히 '지금'의 행복을 위해서.
2006년에 개봉된 영화라 뻔한 전개임을 부정하진 않겠다. 그렇다고 16년이 지난 지금, 그 뻔한 전개를 실천하고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하는 질문엔 모두가 슬퍼질지도 모른다. 우리는 왜 영원을 믿을까? 왜 다음이 있을 거라 확신할까? 무모하고 답 없는 용기가 필요할 때도 있다. 그리고 사실 그런 용기를 지닌 사람들이 더 크게 성공한다. 아이러니다.
영화라 당연히 영화 같은 이야기이고, 그래서 나는 조지아처럼 용기를 실천으로 옮길 깡도 없지만 그래도 인생을 단순하게 살자고 다짐하게 되는 장소는 있다. 곤지암이다. 곤지암에는 할아버지가 있다. 추모공원은 매우 높은 산 아래에 있어서 주변엔 오직 그 공간뿐이고, 사람의 기척이나 도시의 냄새 같은 건 없다. 나무와 벌레, 새와 꽃만이 유일하다. 공원에는 영영 잠든 이들의 공간이 분리되어 있고 이름과 생년월일, 그리고 세상을 떠난 날짜가 적혀 있다. 나는 그곳에서 최근에 죽음을 맞이한 자와 나와 비슷한 또래의 사람들을 심심치 않게 만날 수 있다.
그래서 곤지암에 가면 모든 것이 단순해진다. 내게 엉겨 붙은 덧없는 것들을 털어낼 수 있다. 개인의 삶은 큰 갈래로 나누었을 때 오로지 삶과 죽음뿐이다. 나머지는 모두 부차적인 것. 쓸데없는 고민들로 나를 괴롭혔던 순간들이 부끄러워진다. 그리고 위안받는다.
작은 일에도 전전긍긍하는 나를 진정시키고 싶다면 <라스트 홀리데이>를 추천한다. 엄청나고 단순한 용기를 얻을 수 있다. '당신의 남은 삶이 한정되어 있다면?'이라는 질문은 어쩌면 모든 것을 도전케 하는 마법 주문일지도. 나 역시 이번 주에도 슬쩍 <라스트 홀리데이>를 틀어놓곤 곤지암으로 떠나왔다. 내 인생은 지금, 여기에 있다는 것을 가장 확실하게 볼 수 있는 방법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