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남편은 자석과도 같은 공생관계였다.
언제나 수동적이고 고분고분하게 남 기분을 맞춰주던 내게, 자기감정이 우선인 남자는 부족한 용기를 채워주고 앞으로 돌진할 명분을 주기도 했다. 그래서 우리는 연애를 시작했다. 서로 너무 달라서 시작된 만남이었다.
2년 간의 만남과 그 사이 겹쳐진 1년 간의 동거. 우리는 함께 산지 딱 1년째 되던 해 3월에 결혼식을 올렸다. 멀리서 볼 땐 희극인 것들도 가까이에서 보면 모두 비극이듯, 아무 문제없어 보이는 우리에게도 사실 크고 작은 다툼들이 있었다. 감정을 쌓는 방법부터 쓰는 방법, 해소하는 방법까지 우리는 모두 달랐다. 서로가 달라서 끌렸던 지점들이 너무 달라서 부딪히는 날들로 변하자 나는 생각보다 많이 울기 시작했다. 누군가 결혼 관련 이야기를 써달라고 하면 넘치는 애틋함에서 비롯된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를 기대했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사실 결혼은 너무나 현실이다. 내가 아는 그 남자가 내 남편이 아닐 수도 있다. 서로에게 가장 숨기고 싶었던 추잡한 모습과 최악의 모습까지 발견하거나 들키고 만다. 태생부터 같이 사는 가족들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서로의 모습을 다 큰 성인 남녀가 예쁘고 멋지게 차려입은 뒤에 헐벗는 모양새로.
5월엔 너무나 힘겨운 일들이 많았다. 그리고 6월이 시작되고 나서야, 나는 내가 느꼈던 슬픔의 크기와 남편이 느낀 슬픔의 크기가 달랐다는 것을 알았다. 그건 내게 꽤 충격적이었다. 적어도 내가 우울의 늪에 빠져 있을 때, 남편도 그런 내가 안쓰러웠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타인의 감정을 모두 수용하는 내게, 타인과 본인의 감정을 분리하는 남편은 어딘지 모르게 차가워보이기까지 했다. 부부는 일심동체라던데. 그 말은 낡은 말일지도 모르겠구나. 내가 고른 이 사람이, 사실 세상에서 가장 이해하기 힘든 사람이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니. '사랑'에 취해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는 순간, 가족이라는 또 다른 문이 열린다. 그러니까 어쩌면 가족이 되는 과정은 환상이 아니라 지독한 사실적 고통이다. 기쁨보다는 아픔이다.
외동으로 자라 냉정하리만치 이성적인 남편은, 지금 세상의 모든 더위를 껴안은 채 냉감 이불 위에 엎어져 있다. 그래서 그가 밉냐고? 그렇다. 그렇지만 싫다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지난 몇 달간 쌓아왔던 사랑의 형태가 변한다. 나는 그가 밤새워 일한 몇 주의 고통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봤다. 세상에서 가장 게으른 남자가 아침부터 일어나 꾸역꾸역 출근하는 모습을 배웅했다. 누구보다도 사람에게 스트레스받지 않는 사람이, 누군가로부터 고통받는 사실을 알게 됐다. 나는 나보다 한 살 어린 남편이 가장의 무게를 지고 세상밖으로 나가는 지겨운 순간들을 안다.
커가면서 쌓아온 그의 냉정함이 가엽다. 외로움으로 단련된 이성적 판단이 안타깝다. 지나칠 만큼의 개인주의와 다툼 앞에서 도망가버리는 철없음이 버겁다.
그렇지만 화해할 때마다 나를 안아주는 품, 민망한 듯 어색하게 받아들이는 표정들, 복슬복슬한 곱슬머리와 커다란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너스레, 예쁜 눈을 좋아한다. 쭈뼛거리며 다가와 약속을 억지로 지키는 아이처럼 뻘쭘하게 건네는 고마움의 표시도, 모두 내가 그를 선택한 이유가 된다.
우리는 연애와 결혼 사이에 드라마 한 편을 제대로 찍었지만, 결국 결혼은 현실이다. 연애의 달콤한 사랑의 형태는 변한다. 흐물흐물 유연하다가도 광이 나던 모양은, 이제 굳은살이 배긴 돌덩이처럼 딱딱하다.
나는 그 딱딱함을 단단함으로 하겠다. 한풀 꺾인 사랑 다음으로 앎이 온다. 알고 싶지 않았던 것들을 아는 순간, 상처 입은 모든 순간들이 우리가 가족이 되는 소리를 낸다. 그건 마치 지금 이 순간, 안방에서 들려오는 그의 코골이 소리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