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의 나는 어리광쟁이, 떼쟁이, 울보였다. 왜 그렇게도 울어댔는지, 밤새 우는 나를 달래느라 엄마가 진이 빠졌다는 사실은 전설처럼 때가 되면 회자된다. 울보로 태어나서 나는 사랑을 할 때도 대체로 울보였다. 나에게 감정이란 증폭되고 확장되고 너울지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감정들 중에서도 슬픔은 내가 가장 싫어하며 사랑하는 거대한 봉오리로 자랐다.
슬픈 감정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 내가 가진 최대의 모순이자 단점이자, 장점이었다. 그런 내가 남편을 만나면서 속이 타들어가기 시작한 것은 그가 지독히도 침묵을 지키는 사람임을 깨달았을 무렵이었다. 남편이 된 애인은 종종 침묵 속에서 게임을 한다. 생각을 비우기 위해.
남편은 롤러코스터 같은 감정 타기에서 벗어나 안정을 찾고 싶어 했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주길 바랐으며, 동시에 본인이 짊어지고 있는 무거운 그림자들을 털어놓긴 싫어했다. 걱정을 나누면 두 배가 되니까. 일초라도 빨리 잊어버리는 것이 그의 오래된 방법이었고 무엇이든 나눠야 직성이 풀리는 나는 아무것도 모른 채 덩그러니 섬이 된 남편을 바라봐야 했다.
땅끝마을에 도착해서야, 남편은 애인 때처럼 내게 말해주었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주면 안 되냐고. 일순간 나는 듣지도 않은 그의 무거운 짐이 파도처럼 밀려드는 것을 깨달았다. 방둑처럼 쌓아온 침묵 너머에 어떤 고됨이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내 염려를 막아주려고 내 슬픔을 키웠다. 서로는 서로를 가장 잘 아는 척하면서 각자의 방식으로 서로를 이해하려고 했다.
남편은 여전히 게임을 한다. 최근엔 부쩍 그 시간이 더 늘었다. 나는 이제 그것이 남편이 겪은 힘든 하루를 대변하는 것임을 안다. 차마 애인이었던 아내에게 말할 수 없는 슬픔에서 빨리 벗어나려고 하는 것임을. 나는 멀리서 섬이 된 남편을 바라본다. 보태지 않고 더하지 않는다.
연애 기간과 별개로 한 사람을 새롭게 가족으로 맞이하는 것은 안쓰러움과 애처로움, 그리고 애틋함이 동반된다. 그리고 각자에게 익숙한 최선이 아닌, 서로에게 최선인, 낯선 방법을 배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