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시절 기록 한 장
내가 생각하는 행복에는 매우 평온한 표정으로 채소를 씻는 내가 있다.
한 줌의 볕이 있고, 아득한 곳에서 들리는 모르는 어린아이의 웃음소리와 개 짖는 소리가 뒤섞이는 공간에 있는 나. 그리고 더 꿈꿔본다면 높낮이 다른 파 도소리를 이따금씩 들으며, 갑자기 생각난 메뉴를 따라 냉장고를 뒤적이고 본격적인 요리를 앞두고 있는 모습이다.
오늘은 아침부터 회의를 했다. 재택이기 때문에 번거로운 화장도, 불편한 옷도 입지 않았다. 그래도 사회에 적당히 녹아들려면 널뛰는 감정을 숨길 줄은 알아야 한다. 스피커 너머 상사의 불편한 어휘와 지나친 지시를 피해 억지웃음소리도 흘릴 줄 알아야 하고, 때로는 죽어도 싫은 맞장구도 칠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그러는 와중에도 나를 잃지 않도록 적당히 귀에 꽂히는 소리를 흘려보내고, 조금은 차가운 심장을 갖는 것이다.
여태 글을 쓴답시고, 글 쓰는 것과 엇비슷한 풀에서 논답시고 (별 관계성도 없는 변명이지만) 롤러코스터처럼 왔다 갔다 하는 감정을 가라앉히는 법은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 뒤죽박죽 한 '감정'이 있어야 글을 매만질 수 있다는 아집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감정이 사회생활에서 발현되면 꽤 골치가 아프다.
상처도 쉽게 받고 해석도 크게 하고, 결국 내가 나를 괴롭히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이게 B를 만나기 전까지의 일이다.
B는 나보다 훨씬 이성적인 사람이다. 그래서 가끔 정 없어 보이는 순간도 있지만, 대체로 B가 자신의 이성적 의견을 강하게 피력할 때는 내가 생각이 지나치거나, 감정이 지나치거나, 극도의 감정적 사고를 할 때다. 그 애는 그럴 때 나를 붙잡아 두곤 더 깊이 파고들지 않도록 나를 단단히 묶어둔다. 그러면 나는 널뛰는 감정을 끌어내리고 최악의 내 모습과 마주할 위험을 피한다. (사실 여 즉 몇 번 마주하긴 했지만, 많이 좋아졌다.)
지난 이십여 년을 '-다워야 한다는 것'에 길들여져 내가 꿈꾸는 내 모습이 되기 위해 고군분투했지만 B는 실은 그런 게 중요하지 않음을, 내게서 발현되는 모든 것이 나 다운 것임을 알려주기도 했다. 그래서 본인보다 훨씬 감정적인 나를 참아주고, 받아들여준다. 단지, 그 과정 속에서 나 스스로 무언가 느끼기를 바라는 것 같기도 하다. 뭐 여하튼, 오늘 회의를 하면서 나는 옆에 없는 B에 대해서 생각했다. 상사의 적당히 무례한 말에도 나는 실없이 웃을 수 있게 되었고 동시에 적당히 어설픈 이성적 사고로 나를 지킬 수 있었다. 예전처럼 담아두거나, 의미를 파악하려 애쓰거나, 해석하지 않았다. 엄청난 발전이 아닐 수 없다.
B는 어디에서 나타난 걸까? 그 애는 지금까지는 잘 깨닫지 못했던 것들을 (사실 그래도 별 탈 없이 잘 살아왔다고 믿었던 것들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오늘은 비록 화장도 안 하고 부스스한 머리였지만, 회의를 끝마친 후의 내 모습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이대로 계속 가다간, 나는 정말 평온함 한가운데서 채소를 씻을 줄 아는 사람이 될 것만 같다. 사실 주변은 모두 시끄럽지만 나 홀로 평온을 유지할 수 있는 그런 캄하고 담백한 사람이.
B는 참 대단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_B가 가진 '이성적' 재능에 대한 건 [24년 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