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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진선 Aug 14. 2019

진짜가 된다는 것

이쪽과 저쪽, 경계선에 서 있는 디자이너




이름 값하며 살고 싶은 어느 디자이너 이야기


내 이름 '이진선' 세 글자 중에 '이'는 성이고 '선'은 동생과 같이 쓰는 돌림자다. '진'만이 유일하게 가족과 공유하지 않고 나만 가진 글자다. 별나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오래전부터 나는 내 진짜 이름이 '진' 한 글자뿐이라고 생각했다.


언젠가 엄마는 미스코리아처럼 유명해지라는 의미로 내 이름을 '진선'이라 지었다고 말했는데, 이름의 기원(?)을 듣고 난 이후로 몇 가지 의문이 따라왔고 '진'이라는 글자에 대한 애착은 더 심해졌다.


‘미스코리아 진선미 중에 진이 1등인 이유는 뭘까?’

‘왜 예쁘고(美), 착한 것(善) 보다 진실한(眞) 것이 더 큰 가치가 있는 걸까?’


사전에서 찾아본 '진'이라는 글자에는 생각보다 다양한 의미가 담겨 있었다.


[ 眞 참진 ]의 사전적 정의

1. 참
2. 진리(眞理)
3. 진실(眞實)
4. 본성(本性)
5. 본질(本質)
6. 참으로
7. 정말로
8. 진실하다(眞實--)
9. 사실이다
10. 참되다
11. 명료하다(明瞭--)
12. 또렷하다
13. 뚜렷하다
14. 똑똑하다


중복되는 의미를 걷어내니 '진실, 본질, 명료'라는 3개의 단어로 정리가 됐다. 놀라웠다. 내 이름에는 나 자신이 디자이너로서 추구하는 이상적인 모습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진선미(眞善美)는 철학의 주요 명제 중 하나라고 한다. 진은 지성(인식능력), 선은 의지(실천능력), 미는 감성(심미 능력)을 말하는데, 의지와 감성보다 지성이 앞선다는 게 무척 마음에 들었다. 철학은 잘 모르지만 구현력과 심미성보다 '문제 정의'가 더 앞서야 하는 디자인 프로세스와 다르지 않아 보였기 때문이다. 어느 순간 평범하게만 느껴지던 내 이름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또한 이름 값하며 살 수 있기를 바라게 됐다.


나는 진실한 디자인, 본질을 추구하는 디자인, 명료한 디자인을 할 수 있을까. 지성 있는 디자이너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진짜'가 되는 것은 가능한 일일까?




'진짜' 디자이너란 무엇인가


대학시절 나에게 크게 충격을 준 한 권의 책이 있다.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디자인 고전, 빅터 파파넥의 <인간을 위한 디자인>이다. "산업 디자인보다 더 유해한 직업들은 존재하지만 그 수는 극소수이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이 책은 시작부터 끝까지 디자인에 대한 강렬한 문제의식을 드러낸다. 만일 전체 내용을 함축하는 하나의 문장을 골라보라고 한다면 나는 이 문장을 꼽을 것이다.


디자인은 인간이 도구와 환경, 더 나아가 사회와 자아를 만드는 가장 강력한 도구가 되어 왔으며 그렇기 때문에 디자이너에게는 높은 사회적, 도덕적 책임이 요구된다.

빅터 파파넥 <인간을 위한 디자인> p.10


이 책을 읽기 전까지만 해도 나에게 디자인이란 '재밌는 것, 멋있는 것, 독특한 아이디어로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것'이었다. 창의적이어야 한다는 말은 여기저기서 질리도록 들었지만 누구도 디자이너의 도덕적 책임 따위는 말해주지 않았다. 대체 디자인을 하는데 무슨 윤리가 필요하단 말인가? 페이지를 넘길수록 마음이 무거워졌다. 당장 취업이 코앞인 햇병아리 취준생이었던 나는 환경 문제와 제3세계 이야기 같은 전 지구적인 문제를 떠안는 것이 너무 부담스러웠다. 겨우 간장종지 정도밖에 안 되는 작은 그릇을 가진 나에게는 디자인 거장의 단호한 말들이 지나친 엄중함으로 다가왔다.


자신의 결과물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빅터 파파넥의 말은 취업을 하고 현장에서 일을 하는 동안 마음 한 구석 어딘가에 자리 잡고 늘 나를 따라다녔다. 짧으면 6개월, 길어봐야 1년 만에 리뉴얼을 반복하는 온라인 서비스들을 디자인하는 과정에서 예쁜 쓰레기를 만들고 있다는 죄책감과 공허함에 순간순간 빠져들곤 했다. 내 일에서 소명 같은 것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나마 위안이었던 것은 온라인 상의 디자인은 생성하고 폐기하는 과정에서 지구를 파괴하는 유해물질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0과 1로 만들어진 디지털 세계에선 그저 Delete 버튼 하나만 누르면 그만이니까.




웹디자이너 마이크 몬테이로는 40년 전 빅터 파파넥이 했던 말을 빌려와 다시 한번 디자이너의 책임을 말한다.


디자이너라면, 아니 어떤 종류의 기술을 가진 사람이든 간에 자신이 세상에 내놓는 것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 당신이 디자인한 제품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준다면, 그 사람을 해코지한 것과 같다.

마이크 몬테이로 <디자이너, 직업을 말하다> pp.72~73


디자인은 크게 공업 디자인(사물), 환경 디자인(장소), 커뮤니케이션 디자인(메시지) 이렇게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오프라인 세상을 기반으로 한 공업 디자인과 환경 디자인에 중점을 두었던 빅터 파파넥의 말들은 불편하긴 했지만 애써 외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동시대에 온라인을 기반으로 커뮤니케이션 디자인을 하는 마이크 몬테이로의 말은 더 크고 더 가깝게 들려 차마 모르는 체할 수가 없다.


'메시지를 디자인한다'는 것은 나머지 분야와는 다른 의미에서 사람들에게 크고 작은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이제는 인정할 수밖에 없다. 빅터 파파넥의 말마따나 환경을 파괴하는 산업 디자인보다 불필요한 소비를 조장해 정신을 어지럽히는 광고 디자인이 더 나쁠지도 모르니까.


앞에서 나는 '진'의 의미가 진실, 본질, 명료라고 말했다. 본질과 명료는 디자인에서 흔히 다루는 주제다. 하지만 진실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다루지 않는다. 본질과 명료에 진실까지 더할 수 있다면, 혹시 그럴수만 있다면 우리는 '진짜' 디자이너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감히 커뮤니케이션 디자이너의 윤리에 대해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자신의 결과물에 책임을 지라고 말하는 선배 디자이너들




커뮤니케이션의 두 가지 종류


데이터 디자인 전문가 알베르토 카이로는 커뮤니케이션을 두 가지로 분류한다. 하나는 가치 있는 정보 제공을 목적으로 하는 진솔한 커뮤니케이션이고, 다른 하나는 상품, 서비스, 아이디어 판매를 목적으로 하는 전략적 커뮤니케이션이다.



두 가지 커뮤니케이션의 가장 큰 차이는 '데이터 분석 후 메시지를 발견하느냐' 아니면 '메시지를 정해놓고 뒷받침할 데이터를 찾느냐'에 있다. 대다수의 기업, 정치, 사회, 미디어는 전략적 커뮤니케이션을 한다. 이때 데이터와 디자인은 의도적으로 특정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효과적인 상업적 도구로 활용된다. 우리는 디자인이 세상에 어떤 기여를 했는가가 아니라, 인간이 자신의 목적을 위해 디자인을 어떻게 이용하는가라는 관점으로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 지난 몇 년간 전략적 커뮤니케이션(광고, PR, 마케팅 등)에 '인포그래픽'이란 말이 강탈당했다. 이 단어는 본래 보도할 가치가 있는 정보를 전파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데이터가 풍부한 그래픽 표현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 오늘날 '인포그래픽'이란 대부분의 사람에겐 클릭 유도를 위해 쓰이는 유치한 포스터들을 의미한다. (...) 대개 불확실한 데이터로 만든 밋밋하고 지나치게 단순하며 극단적인 화면일 텐데, 이들의 목적은 웹 트래픽을 끌어오기 위한 것이지 정보를 주기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 특수 이익 집단들이 수백만 달러를 써가며 그들의 아젠다를 밀어붙이고, 이념을 홍보하며, 거의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은 채 근거 없는 주장을 파는 세상에 살고 있다. 인터넷과 소셜 미디어 덕분에 그들은 전례 없이 효율적으로 우리에게 닿을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은 사람들이 몇 마디 말보다 데이터, 인포그래픽, 시각화를 더 신뢰한다고 믿기 때문에 이러한 것들을 애용하곤 한다.

알베르토 카이로 <진실을 드러내는 데이터 시각화의 과학과 예술> p.13, p.24


당장 오늘만 해도 회사에서 게임용 모니터를 팔기 위한 프로모션 페이지를 온 힘을 다해 만들고 온 나에게 알베르토 카이로의 말은 너무 아프다. 진솔한 커뮤니케이션을 지향하는 그에게 있어 전략적 커뮤니케이션은 지극히 불편한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진실'이다.




만들어진 진실, 편집의 기술, 사악한 디자인


전략적 커뮤니케이션의 문제는 단지 클릭수를 유도하기 위해 부실한 데이터와 질 낮은 그래픽으로 온라인 생태계를 지저분하게 만드는 것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인지적 약점을 이용해 잘못된 정보를 퍼트리고, 오해와 편견을 조장하며 사고방식에 영향을 끼친다는 데 더 큰 문제가 있다.


진실은 수만 조각으로 깨진 거울과 같다. 하나의 대상이 관점에 따라 여러 가지 얼굴을 드러낸다. 영국의 유력지 '가디언'은 1986년에 관점에 따라 달라지는 진실을 잘 보여주는 광고 캠페인을 했다. 어느 각도에서 보느냐에 따라 같은 사람이 차를 피해 도망가는 사람, 가방을 빼앗는 사람, 쏟아지는 벽돌 더미 밑에서 신사를 구출하는 사람이 된다. 이 영상은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기 위해서는 전체 그림을 봐야 한다'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화제가 되는 메시지일수록 여러 측면의 진실을 품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그중 무엇을 선택할지는 발언자의 마음에 달려있다.


The Guardian's 1986 'Points of view' advert


<만들어진 진실>의 저자 헥터 맥도널드는 메시지를 퍼뜨리는 발언자의 유형을 3가지로 구분한다.


발언자 유형

옹호자 Advocate : 건설적인 목표 달성과 정확한 현실 인식을 위한 진실을 선택하는 사람

오보자 Misinformer : 악의는 없지만 의도치 않게 현실을 왜곡하는 진실을 퍼뜨리는 사람

오도자 Misleader : 일부러 잘못된 현실 인식을 만들어내는 편향된 진실을 선택하는 사람


오도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이 보고 있는 것에 그다지 집중하지 않으며, 잘 모르는 주제에 대해서는 쉽게 주변의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특정 대상에 대한 관점이 한 번 형성되면 바꾸기가 쉽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있다. 형성된 관점과 대치되는 정보는 무시하거나, 의심하거나, 묵살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인지 오류인 확증편향(Confirmation bias)이다.


오도자는 굳이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다면적인 진실을 편집하는 것으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몇 가지 대표적인 기술이 있다.


편집의 기술

생략

편향된 선택

프레이밍 (맥락 제시)

스토리텔링


만들어진 진실에 복잡한 수식을 포함한 데이터와 세련되고 화려한 그래픽이 더해지면 사람들에게 더욱 설득력 있게 다가간다. 메시지를 송출하는 사람과 수신하는 사람, 그 경계선에 서 있는 디자이너는 의도치 않게 오도자를 도와 현실을 왜곡하는 오보자가 될 위험이 있다. 악의가 있고 없고에 상관없이 오보자의 디자인은 사악한 디자인이다.





이쪽과 저쪽, 경계선에 서 있는 디자이너


철저하게 상업 디자이너로 성장한 나는 불필요한 소비를 조장하고, 사람들의 판단을 흐리게 한다는 디자인 대선배들의 비난을 피할 재간이 없다. 기업에 소속되어 자본주의 시스템에 맞춤한 디자인을 하는 평범한 한 명의 디자이너가 감히 '책임'에 대해 무엇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써 말하고자 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소극적이지만, 어떻게 보면 조금 더 현실적이고, 그렇다고 누구나 실행하지는 않는 아주 작은 실천이다.


전략적 커뮤니케이션 안에서 디자이너가 가질 수 있는 최소한의 책임이란 무엇일까. 마이크 몬테이로의 말을 빌리자면 디자이너는 일종의 게이트키퍼(Gatekeeper)다. 최종 단계에서 콘텐츠를 다루는 사람으로서 필요한 만큼의 문해력과 수리력을 갖추고 검증하는 것이다. 오보는 많은 경우 의도보다 무지에서 발생한다.


통계 조작의 대부분은 사람을 속이기 위한 사기꾼의 심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무능 때문이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 통계학자의 책상 위에서 도출되는 순진한 숫자들이 영업 사원이나 광고 전문가, 언론의 기자들 또는 카피라이터들에 의해서 왜곡되고, 과장되고, 극단적으로 생략되며 임의로 선택되기 때문이다.

대럴 허프 <새빨간 거짓말, 통계> pp.141~142
청중을 호도할 목적으로 일부러 형편없는 시각 모델을 고안하는 사람들도 존재하기는 하지만, 대개의 경우 모델의 결함은 선의를 가진 디자이너가 데이터에 충분히 주의를 기울이지 못했을 때에 발생한다.

알베르토 카이로 <진실을 드러내는 데이터 시각화의 과학과 예술> p.75


대선 기간이면 영락없이 뉴스에서 송출되는 왜곡된 그래프가 논란이 된다. 이런 결과물이 빈번하게 목격되는 원인 중 절반은 언론사의 의도에 있을 것이고, 나머지 절반은 별다른 생각 없이 그림만 그려낸 디자이너의 무지에 있을 것이다. "몰라서 그랬어요."라는 말을 편하게 내뱉는 디자이너는 자신의 결과물에 책임을 다하지 않는 사람이다. 디자이너는 시각 언어 읽을 수 있는 사람이지, 시각 언어 읽는 사람이 아니다.


디자이너도 사람이기 때문에 모든 것을 알 수 없고, 인지 오류에 의해 실수를 저지르기도 한다. 어쩌면 디자인 과정에 관여하는 다양한 사람들(의뢰인, 기획자, 사수 디자이너, 수신자)에 의해 불가피하게 오보자의 역할을 떠맡게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자신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 어떤 맥락 위에 서 있는지, 내가 만드는 결과물이 이후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 인지하는 것과 아닌 것은 비교할 수 없는 큰 차이를 가져온다.




전문가의 첫 번째 기둥 '태도'


전문가의 여섯 기둥 중 첫 번째는 태도이며, 정체성을 만들어가기 시작하는 초보자 단계에서 가장 먼저 할 일은 자신의 결과물에 책임을 지기로 마음먹는 일이다. 책임지는 태도에는 시각적 완성도와 더불어 콘텐츠의 왜곡이 없도록 노력하는 것이 포함된다. 여기에 의뢰인이 심각한 오도자일 경우 디자인을 거부할 수 있는 용기까지 포함하기를 바란다면 너무 큰 욕심일까.


진짜가 된다는 것은 적어도 이것만은 안된다는 최소한의 자기 기준을 세우고, 이를 바탕으로 가짜들을 하나씩 걷어내는 과정을 되풀이하는 일이다.


전문가의 첫 번째 기둥 '태도'




내가 만든 1인 디자인 스튜디오의 이름은 진랩이다. 이름 값하며 살고 싶은 마음을 담았다. 아직은 보통의 프리랜서와 다르지 않은 방식으로 일을 하고 있지만, 서서히 진짜가 되는 법을 고민하며 나아가다 보면 좀 더 넓은 범위에서, 좀 더 적극적인 책임을 질 수 있는 큰 그릇을 갖게 될지도 모른다.


그때 다시 빅터 파파넥의 말을 빌려 글을 써보고 싶다.


이름 값하며 살고 싶어 결국 회사 이름도 '진랩'






참고 도서

빅터 파파넥 <인간을 위한 디자인>

마이크 몬테이로 <디자이너, 직업을 말하다>

노먼 포터 <디자이너란 무엇인가>

알베르토 카이로 <진실을 드러내는 데이터 시각화의 과학과 예술>

찰스 윌런 <벌거벗은 통계학>

대럴 허프 <새빨간 거짓말, 통계>

헥터 맥도널드 <만들어진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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