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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진선 Dec 30. 2019

넓은 의미의 디자인, 좁은 의미의 디자인

나의 일을 무엇이라 정의할 것인가



'지적 자본'으로서의 디자인


오늘이 마지막 날이니까 얘기해줄게.


자, 특별히 널 위해서 책을 몇 권 가지고 왔어. 어제 물어봤잖아. 공부하고 싶은데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그래서 그와 관련한 얘기를 해주려고 준비해왔어.


일단 이 책부터. <지적자본론>이라는 책이야. 혹시 츠타야라고 들어봤니? 일본의 유명한 서점인데 일반적인 서점이랑은 좀 달라. 가장 눈에 띄는 부분부터 말해볼게.


서점에 들어가면 책들이 분류되어 있잖아? 소설, 경제경영, 예술, 마케팅... 뭐 이런 식으로. 그런데 그런 형태의 분류 방식은 독자 위주의 분류 방식이라고 할 수 없거든.


당장 디자인 섹션만 봐도 알수 있지. 서점에서 디자인을 굉장히 협소하게 정의하고 있다는 것을. 예술 카테고리 안에 디자인이 포함되어 있는데 내가 찾고 싶은 디자인 책은 그 안에 없고 전혀 다른 카테고리에 들어가 있는 경우가 많아. 때문에 서점 여기저기를 뒤지고 다녀야 할 때도 있고. 디자인이 예술의 하위 카테고리라니 그것부터가 문제지만!


츠타야는 기계적으로 장르를 구분하지 않고 나름의 테마를 정해서 독자한테 제안을 해. 무슨 말이냐면 '예술적 측면에서 마법의 도시 프라하를 안내합니다.'처럼 하나의 테마를 중심으로 관련 책을 모으는 거지. 소설일 수도 있고, 예술 책일 수도 있고, 어린이 책일 수도 있고.


여기서 더 특별한 점은 단지 책만 다루는 게 아니라는 거야. 츠타야를 만든 마스다 무네아키는 처음부터 책, 영화, 음악이라는 문화 상품 3가지를 한 곳에서 취급하고 싶어 했거든. 테마 중심으로 콘텐츠를 큐레이션 해서 일종의 라이프 스타일을 제안하는 거지. 그리고 그 테마에 정통한 전문가를 섭외해 담당자로 두는 거고.


츠타야는 공간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편안하고 자연친화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려고 신경을 많이 쓰고 있어. 차를 마실 수 있도록 카페도 함께 있고. 음, 츠타야라고 검색 좀 해볼래? 봐봐. 엄청나지. 벽 전체가 책으로 꽉 차 있는 압도적인 비주얼로 사람들에게 경이감을 불러일으키는 것 또한 이 사람이 의도한 디자인의 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어.


책 표지에 보면 '모든 사람이 디자이너가 되는 미래'라고 쓰여 있거든. 뒷 표지를 보면 '나는 기획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쓰여 있고. 이 사람이 말하는 디자인이란 무엇을 말하는 걸까? 흔히 생각하는 포토샵으로 예쁜 그림 그리기를 말하는 건 아닌 거 같지?


시각적으로 보기 좋게 하는 심미성도 당연히 디자인에 포함되지만 단지 그것만을 디자인이라고 하는 건 아니거든. 이 사람은 기획하고, 선택하고, 구조를 짜고, 편집하고, 시각화하고, 실제로 구현하고, 반응을 살피고, 피드백을 받아 반영해 더 좋게 만드는 그 모든 것을 통틀어 디자인이라고 말하고 있어.


디자인은 사람의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작용이야. 공장이나 사무실 같은 물질적이고 돈이 들어가는 실물 자본이 아니라,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그것, 바로 '지적 자본'으로서 디자인의 중요성을 말하는 책이지.


앞으로 기업은 지적 자본을 갖추고 있는 인재들을 얼마나 많이 보유하고 있느냐에 따라 성패가 갈린다고 말하고 있거든. 디자인은 다른 말로 기획력이라고 할 수 있고, 기획력은 또다시 제안하는 능력이라고 할 수 있어.


내가 이 말을 하는 이유는 '나의 일을 무엇으로 정의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보기를 바라기 때문이야. 내 일을 좁은 범위로 설정하면 그만큼 앞으로의 가능성도 좁아질 수밖에 없고, 넓은 범위로 설정하면 그만큼 가능성도 넓어지게 되겠지. 관련해서 참고할 수 있는 책이 있는데 바로 이거야.




디자인이란 무엇인가


자, 두 번째 책 <디자인 경영 핸드북>. 책을 보면 이런 개념이 나와. 스웨덴산업디자인협회에서 만든 '디자인 사다리'라는 건데. 기업에서 차지하는 디자인의 역할 범위에 따라 여섯 단계로 구분하거든.




* 1단계 : 디자인 없음

- 디자인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음.

- 누구든 제품을 고안할 수 있다고 주장.

- 기존에 있던 대로 오랜 기간 개선 없이 유지하며, 이미 시장에 나와 있는 예를 모방하고 표절로 비난받지 않을 정도의 변화만 추구.


* 2단계 : 치장으로서의 디자인

기술팀에서 제품 설계가 끝난 후 마무리 단계에서 최종 형태를 입힐 때 디자인 활용.


* 3단계 : 절차로서의 디자인

- 제품 개발 시작 단계부터 디자이너가 필요함을 이해.

- 내부에 디자인팀을 두기도 하며 제품이 시장에서 성공을 거두기도 하지만 디자인에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으려고 하지는 않음.

- 영업팀, 마케팅팀, 생산팀이 주도권을 가짐.

- 현 시장에 적절한 제품을 내놓지만 경쟁 환경 자체를 바꾸지는 못함.


* 4단계 : 혁신으로서의 디자인

- 시장 기회를 빠르게 포착하고 경쟁사보다 제품을 빨리 출시.

- 정교하고 복잡한 과정을 거친 제품을 소비자가 쉽게 이해하고 적응할 수 있도록 돕는데 디자인 활용.


* 5단계 : 전략으로서의 디자인

- 완벽한 브랜드 정체성 보유.

- 가격이나 품질로 경쟁하지 않음. 품질은 기본이며 가격은 최우선 사항이 아님.

- 고객이 제품을 구매하는 이유는 브랜드 철학을 지지하기 때문.


* 6단계 : 경영방식(철학)으로서의 디자인

경영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디자인 사고 체계를 활용


디자인 경영 핸드북 p.27


쉽게 말하면 6단계 쪽으로 갈수록 조직 안에서 디자인의 역할이 중요해진다고 보면 되는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일을 할 때 저마다 '디자인'이라는 말의 의미를 다르게 사용한다는 점이야.


예를 들어 어떤 작은 회사를 다닌다고 해보자. 실 작업을 하는 디자이너는 2단계 치장으로서의 디자인을 디자인이라고 생각하고, 대표는 3단계 절차로서의 디자인을 디자인이라고 생각한다고 가정하면 어떤 갈등이 일어날까? 대표는 디자이너가 기획부터 시각화 그리고 이후 관리까지 다 해주기를 바라는데 디자이너는 시각화만 자기 일이라고 여기니 이런 생각을 하겠지.


'왜 대표님은 자꾸 나한테 이런 일까지 시키는 거지? 월급을 많이 주는 것도 아니면서 이것저것 자꾸 부리는 거야?'


반대로 디자이너는 3단계를 디자인이라고 생각하고 대표는 2단계를 디자인이라고 생각하다면 어떨까?


'겨우 이런 일이나 시키려고 나를 뽑은 거야? 디자인이 무슨 그림만 그리는 일인 줄 아나. 기획 회의할 때 디자이너는 왜 안 부르는 거야. 무시하는 건가? 이 회사는 비전이 없군.'


작업자, 상사, 타 부서 관계자, 고객 등 디자인과 관련한 사람들의 머릿속에 디자인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공통된 이해가 없으면 의사소통에 혼선이 일어날 수밖에 없어.


조직문화와 대표의 철학이 중요한데, 어떤 회사에 들어갔을 때 이 곳의 디자인은 몇 번째 단계에 위치하고 있구나를 파악하는 게 중요해. 자신이 지향하는 디자인은 몇 단계인지 아는 것도 당연히 중요하고. 그 두 가지가 잘 맞으면 제일 좋지만 맞지 않더라도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으면 내가 있는 곳에서 어떻게, 어디까지, 언제까지 일하며 다음 스텝을 준비할 것인가를 구상해볼 수 있거든. 윗단계의 디자인 실력을 갖출수록 디자이너로서 더 오래, 더 의미 있게 일할 수 있겠지? 관련해서 비슷한 얘기를 하는 다른 책이 있어.


바로 세 번째 책 <서비스 디자인 이노베이션>!!! 이 책을 보면 디자인 개념의 범위를 4가지로 구분하는데 아까 말한 디자인 사다리랑 상당히 유사해. 자, 봐봐.


디자인 개념의 범위, 2008 ( 서비스 디자인 이노베이션 p.17 )


* 제1개념 : 시각적 개념 (Visible)

- 하드웨어적, 물질적, 기능적, 외형적, 표면적 기능

- 디자인을 말할 때 가장 흔히 쓰이는 개념


* 제2개념 : 이미지적 개념 (제1개념 + Invisible)

- 비물질적, 비가시적, 소프트웨어적, 이미지 구축

- 비가시적 개념까지 포함. 기업의 무형적 가치를 나타내는 브랜드 등


* 제3개념 : 조화적 개념 (제1,2개념 + Harmony)

- 융합, 조화, 통일체의 창조, 조화로운 창조와 비전 제시, 다른 다양한 분야와 유기적으로 협동하는 방향


* 제4개념 : 혁신적 개념 (제1,2,3개념 + Innovation(Value))

- 새로운 가치 창출, 가치 있는 목적을 가지고 계획하여 행하는 모든 행위

- 인간이 목적을 가지고 행하는 모든 행위. 가치를 부여할 수 있는 모든 것. 광의의 디자인

- 혁신을 현실화하는 방법론으로서 디자인. 기업에서 실행하는 모든 비즈니스 과정을 디자인적 시각으로 사고




디자인은 구체적인 실물 세계에서 추상적인 정신세계까지 포괄할 수 있어. 한마디로 '이 세상에 디자인이 아닌 것이 없다'라고 까지 나는 생각하고 있거든. 아까 말한 츠타야를 만든 마스다 무네야키의 디자인은 <제4개념 : 혁신적 개념>의 디자인란 무엇인지 알려주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 음, <로고와 이쑤시개>라는 디자인 책을 보면 이런 말이 나와.


디자인이란 디자인을 만드는 디자인디자인하는 것이다.

Design is to Design a Design to produce a Design.


세상에 디자인이라는 단어만큼 많은 의미를 담고 있는 단어가 있을까 싶어. 이 문장에 등장하는 각각의 디자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말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디자인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다고 볼 수 있지.


디자인이라는 말은 정말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어. 누가 누구에게 어떤 맥락에서 사용하느냐에 따라 의미가 다 달라지거든. 디자인을 누군가는 모양을 인지하는 시각적인 개념으로 여길 수도 있고, 누군가는 사회, 과학, 인문 등의 다양한 분야와 통합하는 광범위한 개념으로 여길 수도 있다는 말이야. 시대에 따라서도 달라지는데 지금도 계속 그 의미가 확장되고 있다고 보면 돼. 1개념 쪽으로 갈수록 예전 디자인의 개념이라고 보면 되고 4개념으로 갈수록 이 시대의 디자인에 가깝다고 볼 수 있겠다.




나의 일을 무엇이라 정의할 것인가


다시 한번 말하지만, 디자이너가 하는 일은 생각을 가시적으로 표현하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야. 제품의 외관은 당연히 중요하지만 디자인에는 더 중요한 역할이 많이 있어. 아무리 여러 번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 말이지. 이 말이 체화되어 있어야 디자이너로서 앞으로의 비전을 그려나갈 수 있거든.


디자이너가 아닌 사람들과 대화를 하다 보면 대다수가 디자인을 <디자인 사다리의 2단계, 디자인 범위의 제1개념>으로 생각한다는 걸 알 수 있어. 그리고 그 기준으로 디자이너라는 직업을 정의하고 대우하거든. 어떤 사람들은 콘텐츠, 기능, 브랜드가 중요하지 디자인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기도 해. 사실은 그 모든 게 디자인 안에 포함되는 건데.


어렵지? 일단은 스스로 '나의 일을 무엇이라고 정의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가슴속에 품고 답을 찾아가면서 일정 기간 지내는 게 첫 번째야. 이건 비단 디자이너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에게만 해당하는 질문이 아니야. 자신이 속한 분야에서 실력을 쌓으며, 지속해서 성장하고, 오래오래 일하려면 누구나 자신에게 던져야 하는 공통의 질문이라고 생각해.


어디서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으면 일단 서점을 가봐. 디자인 섹션 앞에 서서 꽂혀 있는 책들을 쭉 훑어봐. 그리고 서점에서 어떻게 책을 분류하고 있는지를 보고. 한 권 한 권 책의 내용을 보는 게 아니라 디자인이라는 분야의 전체 상을 그려보는 거지. 그리고 지도를 그려. 대략적으로 디자인 안에는 이런 이런 카테고리로 구성이 되는구나 라는걸 스스로 눈에 보이게 한번 펼쳐볼 필요가 있어. 


아까 말한 것처럼 당연히 서점에서 정해 놓은 디자인이라는 섹션 안에는 빠져 있는 것들이 엄청나게 많지만 일단은 <사다리의 2단계, 디자인 범위의 제1개념>에 해당하는 작은 지도를 먼저 그려보자고 생각하는 거지. 그렇게 지도를 그린 다음에 '나는 이 부분은 좀 잘 알아. 이 부분은 전혀 모르고 있네. 이 부분은 알긴 알지만 띄엄띄엄 알고 있어.'라는 식으로 나 자신을 대입해서 현 상황을 파악하는 거야. 지도라는 게 내가 지금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지를 알려주는 것이니까 거칠어도 최초의 지도를 그리고 거기서부터 시작하는 게 좋아.


참고할 수 있는 게 이 글이야. 예전에 쓴 <멘토는 어디에 있는가>라는 글인데 여기에 내가 아주 오래전에 그린 최초의 지도가 있어. 그 지도를 10년이라는 시간을 통과하면서 서서히 정교화시켜왔지. 내가 요즘 하고 있는 활동들은 그냥 하는 게 아니라 이 지도를 바탕으로 방향성을 가지고 나아가고 있는 거거든.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정교화 된 지도


이런 것들은 하루 만에 당장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고 매일 아주 조금씩 만들어가는 거니까 조급하게 생각할 필요 없어. 지금 엄청나게 젊잖아. 세상에서 가장 비싼 시간이라는 자산을 가지고 있으니까 지금부터 시작하면 돼. 그러니까 2020년에는 제발 공부해. 내가 도와주고 싶어도 티끌만 한 뭐라도 있어야 도와주지.


내가 너 정말 좋아하는 거 알지? 그런데 아무리 좋아해도 일이든 스터디든 나랑 같이 하려면 공부해야 돼. 진짜 제발 부탁이다. 생각하지 말고 일단 뭐라도 시작해. 빨리 배우는 방법이나 효율적으로 실력이 느는 방법이나 그런 거 없어. 요령부터 찾는 게 제일 문제라는 걸 알아야 해. 지금까지는 늘 막내라서 어떻게든 잘 넘어왔겠지만 이제 슬슬 막내라는 특권을 활용할 수 있는 나이도 지나고 있으니까.


마지막 날이라서 특별히 이 얘기들을 선물해 주는 거야. 지도 그리기 하고 나면 나한테 보여줘. 꼭 하는 거다. 알았지?






참고 도서

마스다 무네야키 <지적자본론>

표현명, 이원식 <서비스 디자인 이노베이션>

제니아 빌라다스 <디자인 경영 핸드북>




멘토는 어디에 있는가 : https://brunch.co.kr/@jin-lab/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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