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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붐 Feb 25. 2020

#0 산티아고 순례길 - From 서울 to 산티아고

늦잠꾸러기,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늦잠이다. 또 늦잠을 잤다. 아침 일찍 파리에서 생장으로 가는 기차를 타야 하는데 또 늦잠을 자버렸다. 

천성 어디 안 간다. 낯선 곳에 와서도 긴장하나 없는 이 게으름이란.

허겁지겁 가방을 챙기고 버릴 것들을 쓰레기봉투에 담았다. 샤워는 고사하고 머리만 겨우 감았고 머리카락에서는 물기가 뚝뚝 떨어진다. 빠진 것이 없나 방을 둘러볼 여유도 없이 호스텔을 나섰다. 코가 시릴 정도로 추운 파리의 날씨에도 불구하고 기차를 놓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추위가 느껴지지 않았다. 일분이라도 벌어보고자 기차역을 향해 열심히 달렸다. 엄한길로 들어서 기차를 놓치는 불상사가 벌어지지 않도록 구글맵과 내가 가야 할 길을 번갈아 보며 열심히 달렸다. 

출처 - http://bitly.kr/BwLhAilg


이러니. 내가 긴장감을 가질 수가 없지. 행운은 결국 또 나의 편이었고 나는 기차를 놓치지 않고 무사히 나의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마치 기차는 내가 자리에 앉으면 출발할 예정이었던 것처럼 내가 자리를 찾아 앉자마자 바욘을 향해 출발했다. 기차역까지 한시도 쉬지 않고 뛰느라 거칠어진 숨을 가다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한국에서 보았던 후기에서는 바욘 가는 기차에서부터 본인과 같은 행색의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을 거라고 했는데,

 ... 없다. 

여기서 나와 같은 행색이란 누가 봐도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러 가는 행색 즉, 가진 거라곤 본인 몸집만 한 배낭이 전부인 사람들이다. 기차 안에서 첫 까미노 친구를 만날 수도 있지 않을까 기대를 했는데.. 내심 섭섭했지만 그 섭섭한 마음보단 드디어 순례길을 걸으러 간다는 설렘이 더 컸다. 차창 밖 풍경은 별다를 게 없었다. 그저 푸르렀고 녹색의 산들뿐. 그럼에도 너무나 설레는 이 기분은 뭐지. 절로 미소가 지어졌고 혹시나 혼자 히죽히죽 웃는 나의 모습을 보고 미친 사람인가 오해를 살 수도 있단 생각에 황급히 미소를 지웠으나 다시금 올라가는 입꼬리. 미소 -무표정 - 미소 -무표정을 반복하니 드디어 바욘에 도착을 했다. 


내가 한국에서 미리 검색해 온 바로는 바욘에서 생장 가는 기차를 타면 된다고 했다. 역에서 근무하는 직원에게 생장 가는 기차는 어디서 타는지 물어보니 그저 손짓으로 기차역 밖을 가리켰다. 오늘 너 같은 애 20번은 넘게 봤다는 심드렁한 표정과 함께. 그 손짓을 따라 밖으로 나가보니 웬 버스가 하나 있었다. 그러더니 한 외국인이 뛰어와 내 짐을 받으며 생장?이라고 물었다. 그리고 나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그는 내 가방을 버스 짐칸에 실었고 버스표를 주었다. 버스비를 주고 버스에 오르니 나와 같은 행색의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버스에 타 있었다. 드디어 만났다. 나와 같은 행색의 사람들! 다들 바람막이 아니면 플리스. 그마저 플리스는 동양인들만 입고 있었는데 아마 한국인들인 것 같다. 나 역시도 플리스를 입고 있었으니까.  자리를 잡고 앉으니 몇 분 뒤 버스가 출발했다. 내가 조금만 헤매었더라면 버스를 못 탔을 텐데 또 행운의 여신은 나의 편이었구나. 시작이 정말 좋네. 

한 시간 남짓 달렸을까? 버스는 생장에 도착했고 사람들이 하나둘씩 버스에서 내리기 시작했다. 나 역시 버스에서 내려 내 배낭을 메고 자연스럽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순례길의 첫 관문은 순례자 사무소에 가서 순례자 여권과 배낭에 매달 조개를 사는 거라고 했다.  그러니 다들 목적지가 같을 테니 그들을 따라갈 요량이었다. 그러나.. 다들 나와 같은 마음이었나 보다. 다들 어색하게 주위를 둘러볼 뿐 누구 하나 발걸음을 옮기는 이가 없었다. 눈이 마주친 외국인 순례자들과 어색하게 웃어 보이며 계속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때 용감하게 발걸음을 옮겨 어딘가로 향하는 이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바로 C와 J였다. C와 J를 선두로 10명남짓의 사람들이 그들의 뒤를 따랐다. 이거 어디서 본거 같아!라고 생각했는데 마치 우리는 피리 부는 사나이를 하염없이 따라가는 사람들 같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C와 J 역시 길을 몰랐었고 그저 용감하게 선두에 나서 우리들을 이끌어준 것이었다!! 리스펙트 브로!! 덕분에 10명남짓의 외국인 순례자들과 C와 J 그리고 나는 무사히 순례자 사무소에 도착할 수 있었고 간단한 안내사항을 듣고 순례자 여권을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너무나도 나의 배낭에 달고 싶었던 조개껍데기도 사서 바로 배낭에 달았다! 그제야 C와 J와 간단한 통성명을 하였다.  C와 J는 각각 세계여행 중이었고 순례길을 마지막으로 한국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순례자 여권을 발급받고 자연스레 C와 J와 함께 사무소를 나섰고 또 자연스레 오늘 묵을 우리의 첫 알베르게를 찾아 나섰다. C는 행동력이 참 행동대장급이다. 내가 J와 얘기하며 이 알베르게 괜찮은 것 같지 않아?라고 말할라치면 C는 그 알베르게에 들어가 방을 볼 수 있느냐, 가격은 얼마냐, 저녁과 아침은 제공하냐 등의 질문들과 함께 주인과 방을 둘러보았다. C의 솔선수범하는 행동력 덕분에 우리는 우리의 첫 알베르게로 적합한 곳을 찾을 수 있었다. 사실 호스텔을 가더라도 무조건 여성 전용만 찾던 나에게 혼성 알베르게는 너무 익숙하지 않았고 샤워실 또한 남녀 공용이라 이 또한 너무 불편했다. 

그러나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 했던가. 순례길의 모든 알베르게는 남녀공용이다. 첫 알베르게에서 남녀 공용 침실과 샤워실로 불편함을 느꼈던 게 무색할 정도로 순례길을 걸으며 이 모든 게 당연해졌고 나중에는 불편함 또한 느끼지 못했다. 그리고 내가 지금까지 묵어왔던 숙소들보다는 컨디션이 많이 떨어지네 라고 생각했는데.. 웬걸. 내가 첫날 묵는 알베르게는 순례길을 걷는 동안 묵은 알베르게 중 가장 최상급의 컨디션이었다. 


오늘 이방은 C, J 그리고 나만 묵는 건가 했더니 이후 외국인 남자 2명이 더 왔다. 그중 한 명은 미국에서 온 군인이었는데, 양쪽 팔을 사고로 잃었다고 했다. 그럼에도 순례길을 걸으러 온 그 친구를 보며 참 많은 생각이 들었다. 하나 둘 침대에 눕기 시작하니 자연스레 소등이 되었다. 시끌벅적하던 방이 어느새 고요해지고 나도 잠을 청하기 위해 눈을 감았다. 드디어 내일 순례길을 걷는다니! 줄곧 생각만 해왔던 일인데 그게 당장 내일이라니 실감이 안 났다. 이런저런 생각이 많이 들었지만 이러다간 뜬눈으로 밤을 새우고 첫 순례길을 걸을 것 같아 내일을 위해 억지로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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