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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골디락스 Jun 07. 2021

세상의 모든 경단녀에게

<라틴어 수업>을 읽고


4년 동안 징글징글하게 점심 김밥을 먹었다. 대학원 1층 매점에서 1500원짜리 김밥을 팔았다. 김밥 한 줄과 아메리카노를 마시면서 산더미 같은 과제에 허우적 댔다. 중국어 실력은 동기들 중에 가장 꼴찌였지만 나에게는 놀라운 능력이 있었다.


대학원 동기 선영언니는 김밥을 먹다가 사람이 지나가면 "진아 씨, 맞춰봐."라고 했다. 나는 지나가는 사람이 말을 하지 않아도 전공이 영어인지, 중국어인지, 일어인지 기가 막히게 맞출 수 있었다.


옷은 정장인데 백팩을 메고 다니면 영어전공이다. 살짝 부담스러운 레깅스도 영어일 가능성이 크다. 교수님과 단둘이 커피를 마시면 100퍼센트 영어다.


뭔가 묘하게 사뿐사뿐 걸어오면 일본어 전공자다. 신기하게 비만이 없다. 보통 체격에 사뿐히 앉아서 주변을 어지럽히지 않고 조심조심 교재를 꺼내면 어김없이 일본어 교재다.


그 모습을 보고 입에 김밥을 가득 문채로 푸하하 웃는 사람은 중국어 전공이다. 무리 지어 다니는 사람은 중국어다. 목소리도 크다.


사람은 언어를 닮는다. 언어는 사람을 닮는다.  사람이 쓰는 언어는 그 사람의 몸과 마음이 되어 행동을 바꾸어 놓는다. 4년 동안 김밥을 먹으면서 배운 것은 이것다. 그래서 4년이 소중하고 의미 있다.


아이를 낳고 완전히 전공과 담을 쌓았다. 무엇보다 실력이 별로여서 날 찾아주는 곳이 없었고, 중학생 때 시작하고 20살부터 10년을 중국어만 공부했는데 실력이 별로이니 중국어라면 지긋지긋했다.


아이 유치원에서 알게 된 엄마가 집에 놀러 왔다가 나의 전공을 알고 안타까운 표정으로 중국어 공부한 것이 아깝다고  이야기했다. "중국 여행 갈 때 말해요, 50프로 할인가로 여행 통역해줄게요."


지금 실력은 여행 통역도 못한다. 새까맣게 잊어버렸다. 나는 다시 중국어를 공부할 생각도 없고, 중국어를 공부하며 보낸 시간이 아깝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중국어 공부를 통해서 내가 얻을 수 있는 것은 모두 얻었기 때문이다.


사람이 쓰는 언어는 그 사람의 몸과 마음이 되어 행동을 바꾸어 놓는다는 것. 무엇인가 최선을 다하고 나서 그 끝에는 허무함이 있다는 것. 결과는 과정보다 큰 의미를 가지지 않지만 그래도 결과가 중요한 이유는, 내가 좋은 결과를 얻지 못했기 때문에 내가 하는 이런 이야기가 힘이 없다는 것. 나는 전문 통역사가 되어 빵빵 잘 나가는 선배가 아니기에 이런 멋진 말을 유치원 엄마에게 할 수 없었다.


여기 이런 나를 대신해서 '저 진짜 공부한 거 안 아까워요, 실력이 별로라서 핑계 대는 것이 아니고, 나 괜찮아요."라고 대신 말해주는 책이 있다.


한동일의 <라틴어 수업>이다. 저자는 언어 공부는 평범한 두뇌를 최적화시켜주고 무엇보다 사고체계를 넓혀줄 수 있음을 이야기한다. 언어를 공부한 다는 것은 지식을 쌓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세상을 보는 틀을 세우는 것이라는 점을 정확히 짚어준다. 한국인 최초 동아시아 최초의 바티칸 대법원 변호사가 된 그가, 공부라면 끝까지 해본 그가, 최고의 결과를 얻은 그가 이렇게 말했으니 나의 말보다는 훨씬 힘이 있다. 로마시대에는 널리 쓰이는 언어였지만 지금은 고어가 된 라틴어를 매개로 하여 인생 역시 죽음이 기다리고 있음을, 하지만 라틴어가 유럽 여러 나라의 언어의 기원이 되듯이 죽음은 그저 과정일 뿐임을 말하고 있다.


라틴어 한마디를 배워서 뭔가 있어 보이고 싶은 분에게, 옆집 아이는 벌써 영어를 읽어서 조바심이 나는 엄마에게, 지금 이 순간 사랑하고 내가 하고 싶은 것은 찾아갈 용기를 구하는 분에게, 영어공부 시작 동기를 얻고 싶은 분에게, 또는 죽도록 영어공부를 했는데 남은 게 하나도 없다고 자책하는 분에게,


나의 부족한 글을 읽어주는 당신에게  고마운 마음을 담아 선물하듯 자신 있게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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