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화된 주체 그 이상을 위해
나는 일기를 참 쓰지 않는, 사진을 잘 찍지 않는, 글을 잘 남기지 않는 사람이었다.
어렸을 때 나에게 일기란 밀리면 곤란해지는 '숙제'였고, 성인이 된 이후에는 더 다양한 이유로 일기 쓰기의 무가치함을 나 스스로에게 납득시켰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의 나는 '체화'된다는 개념에 너무나도 사로잡혀 있었던 것 같다. 몸속 어딘가에, 기억/세포 속 어딘가에 저장되어 결국은, 어떤 방식으로든 '내'안에 자리 잡아 '나'로 표출된다는 것. 그것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던 이유는, 삶에 대한 어떤 나의 태도도 한몫했던 것 같다. 드러나는 존재이기보다는 스며들어 있는 존재이고 싶었고,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는 존재이기보다는 내 주변 사람들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존재이고 싶었고, 그러다 삶의 끝에서는 사뿐하고 가볍게 공기 중으로 휘발되는 존재이고 싶었다. 이러한 생각에 지금도 큰 변화는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현듯 갑자기 무언가 기록을 시작해야겠다는 생각이 최근 무서우리만치 들기 시작했다.
기록을 해야겠다는 두려움은 앞으로 나아가지지 않는다는 생각과 그러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앞으로 더 나아가지지 않는다는 것은, 같은 수준의 생각과 사고를 반복하고 있는 것이었고, 나의 삶을 이끄는 기준과 가치와 방향이 일관성을 갖는지에 대한 판단을 머리로만 하기 어려운 시점이 왔다는 것이다. 휩쓸리듯 살지 않고 싶었고 온전한 나로서 나만의 방식으로 살고자 노력해 왔는데, 무엇이 나인지 무엇이 나만의 방식인지 다시금 헷갈리기 시작하는 시점이 왔고, 내가 풀어내는 생각과 판단이 단단하지 않다고 느껴지는 시점이 왔다. 분명 이와 같은 고민을 20대에도 아주 혹독하게 했던 것 같은데, 새로운 차원의 고민이 다시 찾아왔음을 느꼈다.
기록을 하지 않음에는 내가 갖는 특유의 '귀차니즘'도 한몫한다는 것을 참 부인하기 어렵다. 이게 다 무슨 의미인가 하는. 하지만 이제는 그 의미와 필요를 느낀다. 습관이라는게 참 무서워 한동안은 나를 끌어다 앉히는 것의 반복을 겪겠지만, 어떠한 방식으로든 스쳐지나가는, 정리되는, 불현듯 떠오르는 여러 생각들에 대한 기록을 이제부터는 시작해 보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