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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엔 내가 만들어달라 해야지

팔순 엄마의 파김치

by 햇님이반짝

휴무일이었다. 오전에 도서관 다녀와서 아침 겸 점심을 먹고 노트북을 열었다. 오후 두 시, 현관문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가 들린다. 이 시간에 들어올 사람 둘째인가? 시어머니?


"누구?" 친정엄마다. "어무이 왔으예"

작은언니가 파김치를 담가달라 하여 지나가는 길에 우리 집에도 한통 주려고 잠시 들렸단다.

팔순 된 엄마는 4층 올라오는 것을 숨차했다. 나는 우리 엄마가 팔순이 되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나도 나이를 먹지만 내가 늦둥이라서 억울하다. 시어머니는 친정엄마보다 아래로 띠 동갑이니까.


엄마는 요즘 자주 깜박한다고 한다. 아파트 카드키를 놔두고 내려왔는데 현관문 비밀번호가 생각이 나지 않아 다른 사람이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들어갔단다. 자식들 일한다고 전화도 안 한다. 폰은 왜 들고 다니는지 모르겠다.


친정과 우리 집은 걸어서 대략 35분이다. 마집에서 대도로변을 따라 걷다가 큰 사거리에서 오른쪽으로 한 번만 꺾어 쭉 걸으면 우리 집이다. 엄마는 이 날따라 평소 오던 길이 아닌 다른 길로 갔단다. 사거리 신호등을 건너 우측으로 꺾지 않고 계속 위로 올라가다가 이 길이 아님을 알았단다. 다른 사람에게 물어 물어 우리 집에 왔다고 한다. 내가 길치인건 엄마를 닮은 게 분명하다.

엄마는 이름이 퍼뜩 생각나지 않는단다. 나도 그렇다고 첫째 부를 때 둘째 이름 나오고 조카부를 때 우리 아이 이름 부른다 했다. 답답한 마음에 자꾸 기억 안 난다고만 하지 말고 적으라고 했다. 팔순 엄마가 내 말을 들으려나 모르겠다.




아이들 어린이집 다닐 때 내가 직장에 나갔다. 그때부터 친정엄마가 돌봐줬다. 작년 봄까지만 해도 거의 매일 우리 집에 출근하다시피 했다. 집안일은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해도 세탁기를 돌리고 개고 설거지를 해놓았다. 감사하지만 편치만은 않았다.


6개월 넘게 아빠의 거동이 불편했다. 그동안 아빠 옆을 지키느라 우리 집에 오지 못했다. 와도 아이들이 늦게 귀가해 얼굴 볼 겨를도 없다. 다행히 아빠는 혼자 외출할 만큼 많이 좋아지셨다. 엄마의 숨통이 트였다. 두 분 같이 계시니 안심도 되지만 걱정도 늘어간다. 아빠가 일주일에 두 번 물리치료를 받으러 갈 때 엄마도 같이 간다. 옆에서 기다린단다. 심심하지 않으냐고 하니 사람들과 대화하다 보면 시간 금방 간다고 한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잠시도 집에 안 계시는 시어머니와 달리 집에만 계시는 친정엄마의 생활이 무료해 보인다. 아빠는 매일 친구들이 있는 아지트로 나가시지만 이제 우리 집도 오지 않는 엄마는 적적할 것 같다. 언니는 일부러 엄마에게 파김치를 담가달라고 했을지도 모르겠다.

남편도 아이들도 맛있다고 손이 간다. 이거 다 먹으면 이번엔 내가 만들어달라 해야지. 파김치 만드는 법 잊지 않게 오래도록 기억하라고. 그래야 우리 집 안 잊어버리지. 비밀번호도 자주 눌러봐야 기억한다. 언제든 볼 수 있게.

해야 할 일, 하고 싶은 일이 있다는 건 감사한 일이다. 엄마가 그런 일이 생겼으면 좋겠다. 그때까지 계속 귀찮게 해 드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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