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지나 Nov 03. 2023

꽃에 대한 예찬,
인류가 아름다움에 눈떴을 때

#삶으로다시 떠오르기 #에크하르트톨레

‘꽃, 아름다움, 예찬’이라는 말로 문장을 만든다면 어떻게 써도 진부할 확률이 높다. 글을 쓸 때 본능적으로 경계하려는 것 중 하나가 ‘진부하지 말 것’이다. 글은 뻔해지기 매우 쉽다. 지루하고 재미없고 새롭지 않은 낡은 표현이나 행동 등을 ‘진부하다’고 하는데, 그렇다고 모든 낡은 것이 다 진부한 건 아니다.  

아무튼 ‘꽃에 대한 예찬’이라는 제목을 떠올리면서 스스로 약간 황당했다. 꽃의 아름다움을 예찬하려면 적어도 윌리엄 워즈워스나 바이런, 키츠 같은 낭만주의 시인 정도는 돼야 진부함에서 벗어날 수 있을 텐데, 대체 어쩌자고….  그나마 고개만 돌리면 형형색색의 꽃이 반기는 봄과 여름이 아닌 게 다행이다. 

꽃이 지는 이 무거운 계절에 생뚱맞게 꽃에 대해 쓰고 싶어진 건, 얼마 전 읽은 다음과 같은 구절 때문이다. 


“인간 존재의 의식이 발달함에 따라, 꽃은 현실적인 목적에 관계없이, 즉 어떤 식으로든 생존과 연결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그 가치를 인정한 최초의 사물이 되었다.”


잠시 네안데르탈인이 살던, 아니다 사피엔스로 할까? 유발 하라리는 네안데르탈인과 사피엔스가 만나서 아이를 가지면 불임일 확률이 높을 만큼 둘의 유전적 격차가 크다고 했으니, 현재 인류와 가까운 사피엔스가 살던 태곳적을 상상해 보자. 

불을 써서 익혀 먹을 줄 알았고, 언어를 씀으로써 엄청난 인지혁명을 일으켰다고는 해도, 여전히 사피엔스는 자연으로부터 모든 것을 취하며 생을 영위했을 것이다. 사냥을 하고 채집을 하면서. 수많은 풀과 나무들 사이를 헤집으며 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쓸어 담았을 것이다. 당연히 먹을 수 있는 풀과 열매를 구분해 취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꽃은 어떤가? 나무나 풀에서 자라지만 유용성은 전혀 없는 꽃을 보고 잠시 멈칫하는 사피엔스를 상상한다. 사피엔스가 꽃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했다는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인류가 어느 시기에 햇살 속에 당당히 피어 있는 꽃을 보며 아름다움을 느꼈을지 짐작도 안 된다. 그냥 한순간이 떠올랐다. 무용한 꽃을 보면서 잠시 가슴 두근거렸을 최초의 어떤 한 인간과 한순간이. 

       

꽃의 아름다움이 인간 의식의 진화라는 해석


지금은 세상 모든 이들이 꽃의 아름다움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누군가에게 선물하려고 준비한 꽃다발을 화원 주인에게 건네받는 순간, 괜스레 기분이 들뜬다. 꽃다발을 주고받는 일이 꽤 있는데도 늘 한결같이 좋다. 꽃은 가까이 둘 수 있는 아름다움이다. 낡고 새롭지 않은 우리의 일상에 가끔 기쁜 날이 찾아오면 꽃도 함께 한다. 


화가들은 수많은 꽃을 화폭에 옮겼고, 시인들은 자신의 우아한 시어 속에 꽃을 꽂아둔다. 낭만주의 작가 노발리스의 《푸른 꽃》은 수많은 이들에게 신비감을 주어, 현대에 와서도 이를 테마로 한 외전을 계속 창작하고 있다.  


석가모니가 어느 날 연꽃을 들어 말없이 대중에게 내보였을 때, 오직 제자 한 사람 가섭만이 석가모니의 뜻을 깨달아 미소 지었다는 설화가 있다. 석가모니가 꽃을 들어 보인 것이 ‘염화’이고, 가섭이 웃음으로 보낸 화답이 ‘미소’여서 ‘염화미소’다. 염화미소는 이심전심을 뜻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불교 선종을 상징하는 설화라고 한다. 말로 전하지 않은 석가의 설법은 무엇이었는지 내가 알 길은 없다. 

 앞에서 말한 그 책에서는(책 제목은 글의 맨 끝에 남겨두겠다), 꽃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한 것이 인간의식의 진화라고 했다. 그게 대체 어떤 의미람?       


모든 것이 변하듯 행과 불행, 고통과 평안이 계속 엎치락뒤치락


인간이 무용한 꽃을 보고 아름다움이라는 가치를 발견한다. 이는 인간 내면의 기쁨과 연결된다. 그리하여 인간 본연의, 내면의 아름다움에 이르는 길로 이끈다는 의미로 이해했다. 목적이나 효용과 무관하게 현존 자체에 대한 자각이 고요로 이끈다는 영성적인 메시지다.  


항상 평온한 삶을 사는 사람이 있을까? 쉽지 않은 일이다. 어리든 나이 들든 크든 작든, 행과 불행이 번갈아 오가고, 고통과 평안도 끝없이 엎치락뒤치락한다. 그리고 가끔은, 고통의 크기가 도저히 짊어질 수 없는 돌덩이처럼 커서 심장을 납작하게 만들 때가 있다. 

어떤 예를 들어야 할까? 내 경우 최초의 두려움은 대학입시였다. 고3 때, 나는 두려움에 압박당해 고만고만하게 유지하던 성적을 오히려 뚝 떨어뜨렸다. 고통에 압도당한 최초의 기억. 그 이후엔 그보다 더한 일들이 너무 많아서 사사로운 예는 생략하겠다. 

며칠 전 라디오처럼 듣는 유튜브 콘텐츠에서 송길영(바이브컴퍼니 부사장, 빅데이터 전문가)이 한 말에 빙그레 웃었다. 어른들은 다들 내 인생을 쓰면 소설책 한 권이야, 라고 하신다고 했더니, 진행자였는지 송길영이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 그 내용들이 다 비슷할 것이라고 웃으며 말했다. 한 세대가 공통으로 경험한 고난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살다 보면 최악의 상황에 처해서 도저히 헤쳐 나가기 어려운 순간이 온다. 그 정도까지는 아니어도, 크고 작은 불안과 두려움에 자주 사로잡힌다. 이 불안과 두려움은 끝이 보이지 않는다. 입시가 끝나면 입사가 남아 있고 입사 후의 사회생활은 너무나 복잡해서 상처받을 일, 스트레스받을 일투성이다. 그러다 문득, 우리가 뭐 하러 이런 생을 사나, 하는 깊은 우울에 빠질 때도 있다. 


우리를 둘러싼 현실은 절대 우리를 그냥 내버려 두지 않는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평안을 찾아야 하지? 글쎄 말이다. 참 어려운 일이다. 

지금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덩어리와 내가 한 몸이 돼서 굴러다니지 말고, 그 고통과 나 사이에 공간을 좀 만든 다음, 고통은 고통대로 지켜보고 꽃(?)이 이끄는 내면의 고요를 틈틈이 찾아야 한다고 하자니, 돌팔이 약장수 같은 기분이다.


“풀과 나무에서 나타났지만 풀과 나무보다 더 덧없고, 더 신령하고, 더 섬세한 꽃은 다른 영역에서 온 메신저, 물질적인 형상으로 나타난 세계와 형상 없는 세계를 잇는 다리가 되었다.”


좋은 성적이 좋은 대학을 향한 티켓이 되고, 좋은 대학과 스펙이 좋은 회사로 가는 길을 열어주고, 좋은 능력을 바탕으로 값비싼 집과 차를 소유하고, 명품 같은 것들을 손에 넣는다고 해도, 절대로 불안과 두려움은 사라지지 않는다. 형상으로 나타난 것에 현혹될수록 더 불안하고 복잡하고 화가 날 확률이 오히려 더 높아진다.   


나는 가끔 햇살이 들이치는 창가에서 밖을 내다보다 눈을 슬며시 감곤 한다. 그러면 주황빛이 눈 속에 환상처럼 펼쳐진다. 물론 무엇이 내면이고 본연이고 현존인지 여전히 모르겠고, 평안함을 찾는 길은 요원하며, 결국엔 병들고 늙고 죽어간다는 사실이 문득문득 두렵다. 그런데 왠지 요즘, 모든 객관적 상황과 무관하게 가끔 이유 없이 평온할 때가 있다. 지금, 여기 있는 나, 이외에 더 굉장한 것이 있을 것 같지 않다고 생각하는 어떤 순간이. 

에크하르트 톨레의 《삶으로 다시 떠오르기A New Earth》를 읽으며 든 단상이다. 쓰고 나니 부끄럽다.

매거진의 이전글 어른의 세계로 오면서 이름을 잃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