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지나 Oct 12. 2016

조셉 콘래드, <암흑의 핵심>
혹은 <어둠의 심연>

20_문명을 가장한 야만적 식민주의를 고발하다


“‘상아’라고 하는 낱말이 허공에서 울리고 있었어. 그 말은 속삭여지기도 했고 또 더러는 한숨 속에 섞여 있기도 했지. 자네들이 그 광경을 보았다면 그 사람들이 상아를 향해 기도라도 드리고 있나보다고 생각했을 거야. 백치 같은 탐욕의 색채가 마치 시체 썩는 냄새가 확 풍기듯이 모든 것 속에 번지고 있었다네.

지금도 검은 대륙 아프리카는 전쟁과 기아로 비탄에 잠겨 있다. 슬픈 아프리카! 그 땅이, 그 밀림이 그곳 사람들에게 풍요로운 삶의 터전이었던 때가 대체 언제였던가. 19세기 후반, 산업혁명이 절정에 달해 나라 밖으로 제국의 힘을 뻗쳐나가던 시절, 유럽은 검은 아프리카 대륙에 문명을 선물하겠다고 공언하며 검은 땅을 밟았다. 하지만 그것은 탐욕에 들떠 무자비한 살육과 약탈을 서슴지 않는 제국주의 경쟁일 뿐이었다.

말로는 아프리카의 심장 콩고를 향해 간다. 그 여정에서 말로가 본 것은 무엇이었나. 모든 면에서 탁월한 능력을 소유한 상아 수집상 커츠는 어떤 사람이며, 그는 어떤 연유로 반미치광이가 되었던 것일까. 



>>

‘바다를 좇아다니던’ 사람들이 템즈 강 하류에서 바다 쪽을 지켜보며 서 있다. 그들 선원들에게는 바다에서의 삶이 맺어준 결속감이 있었다. 그 배 안에서, 그들 가운데 한 사람, 말로가 들려주는 모험담이 소설 <암흑의 핵심>의 내용이다.  

말로의 체험담은 너무나 간단하다. 젊은 시절, 그는 유럽 대륙에 있는 한 무역회사에 소속된 기선 선장이었고, 그때 그가 우여곡절 끝에 콩고 강 상류의 오지로 배를 몰고 가서 상아 수집상이며 그곳 주재원이었던 커츠라는 사람을 데리고 나온 이야기다. 하지만 그 체험은 말로의 일생에서 일종의 분수령을 이루었는데, 작가 콘래드의 전기를 살펴보면, 말로의 이야기가 실은 콘래드 자신의 체험담이나 다름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어린 시절 아직 비어 있는 중앙 부분을 가리키며 ‘내가 자라면 이곳에 가봐야지’라고 하던 주인공 말로, 아프리카의 콩고를 항해하는 기선 선장이 된 말로는 바로 콘래드 자신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때의 일이 내게 끼친 영향을 자네들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내가 어떤 경위로 그곳에 가게 되었으며, 거기서 무엇을 보았고, 어떻게 강을 따라 올라가서 그 가엾은 친구를 처음 만난 곳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알고 있는 것이 좋겠네. 그건 내 항행(航行)의 끝이요 내 체험의 절정이기도 하지. 그 체험은 내 주위의 모든 것에 대해, 그리고 내 자신의 사상 속에, 일종의 빛을 던져주는 듯했어.”

그래서 말로의 이 말은 콘래드의 육성으로 들어도 무방할 듯하다. 콘래드는 콩고 체험 후 비평가 가네트에게 보낸 편지에서 콩고에 가기 전에는 자기 머릿속에 아무런 생각도 들어 있지 않았으므로 ‘한 처절한 짐승’ 같은 존재에 불과했노라고 말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대체 말로는, 콘래드는 콩고로 가는 항행에서 무엇을 보았던 것일까?





식민주의를 고발한 반(反)제국주의 메시지를 담다


소설의 배경은 19세기 후반으로, 당시 유럽 열강들은 식민지 쟁탈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기계문명과 공업화로 요약되는 유럽의 산업혁명은 상품을 대량생산했고, 서구 열강들은 이 상품의 판로를 찾아, 원료 공급지를 찾아 식민지 건설에 혈안이 돼 있었다. 특히 벨기에의 식민지로 편입된 콩고에서는 원주민에 대한 갖은 수탈과 잔혹 행위가 횡행해, 유럽인의 빈축을 샀다. 

처음 말로가 콩고로 가기 위해 프랑스 상선에 오를 때만 해도 유럽의 아프리카 진출은 비록 경제적 목적이 있다고 해도 효율성과 합리성을 바탕으로 식민지 미개인을 문명화하여 인간답게 해줄 것이라는 이념을 견고하게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말로의 눈으로 확인한 아프리카 현실은 이와 전혀 달랐다. 유럽 제국은, 문명화시키겠다던 원주민들을 강제 노동에 동원해 노예보다 못한 처지로 만들어버렸고, 식민지 땅을 수많은 원주민들이 기아와 질병으로 죽어가는 지옥과 같은 곳으로 변모시켜 버렸다. 

처절한 노예사냥이 횡행하는가 하면, 재미 삼아 살육이 저질러지고, 방화와 파괴가 일상적이었으며, 사소한 과오에 대해 잔인한 형벌을 가하는 식민지의 참상. 이를 목격한 말로는 식민주의에 대한 극심한 혐오와 회의에 빠진다. 문명화한 유럽 열강이 식민지인들에게 문명의 빛을 전달하기는커녕 본래 그들이 가지고 있던 자유와 희망마저 앗아간 것이다. 말로의 시선을 좇아 목격하고, 말로의 육성을 듣고 있노라면, 제국주의의 야만적 본질이 어떻게 ‘문명’이라는 허울을 뒤집어쓰고 있는지 분명하게 알게 된다. 

소설에는 말로의 경험이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는데, 커츠를 만나러 가기까지 식민지 현실을 보게 되는 과정이 하나고, 다음은 커츠를 만나고 그의 죽음을 목격하는 과정,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시 브뤼셀로 돌아와 커츠의 약혼녀를 만나는 과정이다. 콘라드는 말로를 내세워 이 각각의 과정에서 제국주의 위선과 잔학성, 비효율성을 비판하고, 제국주의 이념이 가진 허구성과 제국주의 본토인 유럽 사회에 대한 비판으로 점점 강도를 높여 제국주의에 대해 근본적인 비판을 가하고 있다. <암흑의 핵심>은 이처럼 제국주의의 모순과 허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반(反)제국주의 메시지를 담은 작품이다. 

 미국의 영화감독 코폴라는 <암흑의 핵심>에서 영감을 얻어 <지옥의 묵시록>이라는 작품을 탄생시켰다. <지옥의 묵시록>은 전쟁(베트남전)의 광기와 공포, 인간의 잔인성을 섬뜩하게 그린 영화로, 소설에서는 말로가 콩고 강을 따라 상아 수집광 커츠를 귀환시키지만, 영화에서는 미군 특수부대원 월러드 대위가 캄보디아 밀림 속에 독자적 제국을 세운 전설적 군인이자 전쟁광 커츠 대령의 제거를 지시한다. 

 콘래드의 <암흑의 핵심>을 읽는 내내 코폴라가 자신의 영화에 붙인 ‘묵시록’이라는 제목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잔인한 약탈과 야비한 백인들의 위선, 피와 전쟁과 광기가 아프리카 대륙을 휩쓸지만, 저 깊은 밀림만은 요지부동 묵묵히 인간들을 제압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말로의 사변적 어투, 밀림과 바다와 아프리카 대륙에 대한 장엄한 묘사, 인류에게 던지는 숱한 물음들…. 마치의 요한의 계시록처럼, <암흑의 핵심>이 유럽 제국주의에 신랄한 계시를 던지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물론 일각에서는 이 작품이 제국주의 실상을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데에는 어느 정도 성공하고 있지만, 당대의 지배적 이데올로기였던 제국주의와 인종주의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여러 가지 점에서 이러한 비판으로부터 자유롭기 어려운 작품이다. 하지만 이러한 한계 속에서도 <암흑의 핵심>이 유럽 제국주의에 준엄한 비판의 칼을 휘두르고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말로, 제국주의 잔학상을 목격하다


이 소설은 여느 모험담과 많이 다르다. 모험 자체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자신의 경험이 불러온 깊은 사색과 성찰이 주를 이룬다. 말로는 이야기가 진행되는 내내 제국주의의 광기와 위선을 비꼰다. 우리는 이미 소설 전반부에서 제국주의에 대한 상징적인 비판을 발견하게 된다. 말로가 꿈에 그리던 콩고 행 기선의 선장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전임 선장이 원주민들과 싸우다가 살해되었기 때문이었는데, 두 마리의 검정색 암탉 때문에 일어난 싸움은 식민주의가 갖는 본질적인 속성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암탉을 흥정하다가 부당한 대접을 받았다고 생각한 선장은 다짜고짜 육지에 상륙해 마을 추장을 몽둥이로 때리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 선장은 가장 점잖고 가장 조용한 사람’이었다. 추장의 아들은 비명소리에 선장을 찌르고, 사소하게 시작된 비극적 사건은 마을 자체를 폐허로 만들어버린다. 이 일을 두고 말로는 이렇게 조롱한다. 

“어쨌든 우리가 발전이랍시고 내세우는 그 대의명분이 그 암탉들에게까지 힘을 뻗치고 있었던” 모양이라고. 

이러한 경멸적 태도는 자신을 무역회사에 소개시켜 준 숙모에 대한 묘사에서도 드러난다. 

제국주의 무역회사들이 사실은 이익을 내기 위해서 운영되고 있는데도 당시 신문기사들의 영향을 받은 숙모가 제국주의 무역회사가 하는 일을 ‘숭고한 대의명분을 위해 무지몽매한 수백만의 야만인을 지독한 생활풍습에서 건져내는 일’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그 훌륭한 숙모께서는 그런 사기성이 있는 말들의 홍수 속에서 살다보니 그만 그 속에 홀딱 빠지게 되었던 거야. 그녀는 ‘수백만에 달하는 원주민들을 그네들의 무시무시한 풍습으로부터 떼어내야 한다’고 떠들었는데, 결국은 그런 말을 듣다가 보니 정말이지 내 마음이 불편해지고 말더군. 그래서 나는 회사라는 곳은 무엇보다 이윤을 위해서 운영되고 있다는 암시를 해보이기도 했지.”

말로의 항해는 한 달 남짓 계속되었고, 커츠를 만나게 되는 3장에 이를 때까지 말로가 목격한 아프리카의 현실은 그때까지 지니고 있던 말로의 신념을 여지없이 무너뜨린다.   

프랑스 상선을 타고 콩고 내륙으로 가던 길에 말로는 해안에 정박 중이던 프랑스 군함과 마주친 적이 있었다. 그 프랑스 군함은 마치 전쟁을 치르듯 정글 속에 광적으로 함포 사격을 가하고 있었다. 광기에 들떠 쏘아대는 6인치 대포. 검은 땅에 하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작은 불꽃이 터지지만, ‘가면처럼 표정의 변화’도 없고, ‘닫혀 있는 감옥의 문’처럼 무거운 숲은 그저 잠잠히 침묵할 따름이다. 두려움과 광기에 휩싸여 쏘아대던 함포 사격, 하지만 그 모든 소란스러움 속에서도 침묵하는 거대한 빈 공간. 이 선명한 대조는 애처로운 익살감마저 느끼게 한다. 

우여곡절 끝에 주재소에 도착한 말로는 그곳에서 “모종의 탐욕에 젖어 무자비한 우행(愚行)을 범하고 있는 어떤 맥빠지고 눈빛이 흐리면서 잘난 척하는 악마 같은 인간과” 만나게 되리라는 예감을 갖는다. 그늘을 찾아 들어선 말로. 그곳에서 말로는 ‘연옥의 암흑 단계’를 경험한다. 음울한 정적이 감도는 나무 사이에 굶주림과 질병에 시달리며 천천히 죽어가고 있는 원주민들이 웅크리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어떤 학살 행위나 전염병이 휩쓸고 지난 곳같았다. 무거운 발길을 돌려 주재소로 향한 말로는 건물 근처에서 한 백인을 만난다. 하얀 커프스와 하얀 바지, 광택이 번쩍이는 구두며 풀 먹인 하이칼라. 무역회사의 회계담당인 그의 차림새는 말로의 눈에 일종의 환상으로 보일 만큼 비현실적이었다. 

잔인한 이기심의 소유자인 이 회계주임뿐 아니라 주재소의 총 지배인 역시 그에 못지않은 인물이었다. 총지배인은 다른 모든 사람들이 보내오는 상아를 합친 것보다 많은 상아를 보내오는 커츠 때문에 자신의 지위에 위험을 느끼고 그를 제거할 음모마저 꾸미는 인간이었다. 커츠를 구하러 갈 배를 강에 침몰시킨 것도, 배를 수선할 나사못을 가져오는 것을 지연시킨 것도 모두 그의 소행이었던 것이다. 다른 사람을 파멸시킴으로써 자신의 탐욕을 채우는 ‘악마 같은 인간’이었던 것이다. 문명화의 이상과 신념을 상실한 채 물질적 탐욕에 가득 찬 이 유럽인들을 보며 말로는 회의한다. 

“우리가 무슨 자격으로 그 세계로 들어오게 되었단 말인가? 우리가 그 말없는 세계를 지배할 수 있을까 아니면 그 세계가 우리를 지배하게 될 것인가? 그 세계 속에는 무엇이 들어 있을까?”


커츠의 마지막 외침


온통 무질서로 범벅이 된, 본래의 목적은 이미 자취를 감춰버린 혼돈 속에 있는 주재소 상황을 목격한 후 말로는 마지막으로 커츠와의 만남에 기대를 건다. 왜냐하면 커츠는 뛰어날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말로 미루어 짐작컨대, ‘동정, 과학, 진보의 사도’가 틀림없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커츠는 “각 출장소는 보다 나은 것을 향하는 노상의 등대 같아야 합니다. 물론 출장소는 교역의 중심일 뿐 아니라 교화와 개선과 지도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라고 강조했었다.  

소설 내내 커츠에 대한 사람들의 언급은 과연 그를 신비한 인물로 느끼게 한다. 그리하여 말로가 그 지난한 여정을 거쳐 드디어 만나게 될 인물, 커츠에 대한 독자의 호기심도 증폭돼 있다. 커츠는 어떤 인물인가. 

커츠는 회사를 위해 최대의 능률적 성과를 올리는 주재원이며, 따라서 원주민에게는 가장 잔혹한 상아 수집상이었다. 커츠는 이처럼 상업적 목적과 문명의 이상이 서로 맞물릴 수 있다고 믿었고, 상아 수집 무역 대리인인 그는 어떤 분야에서든 성공할 수 있는 좋은 자질과 양식을 갖추고 있다고 평가받는 인물이었다. 그리하여 아프리카 오지에 뛰어들어 자신의 풍부한 지식과 기민한 적응력을 발취하여 자신의 사명을 완수해 왔던 것이다. 

하지만 커츠는 침몰하고 있었다. 교역할 상품마저 떨어진 이후에도 그는 문명의 이기인 총을 앞세워 능률적인 상아수집가로 변모했고, 원주민들에게 신적인 존재로 군림하게 되었던 것이다. 커츠를 숭배하는 러시아 청년과 말로가 나눈 대화를 보자. 

“쉽게 말하자면, 그가 이 지방에서 약탈을 하고 있었던 셈이군요?... 커츠가 이 지방 부족으로 하여금 자기를 추종하게 했군요, 그렇죠?” 
“이곳 사람들은 그를 우러러보고 있었어요. 그분은 마치 천둥과 번개처럼 원주민들 위에 군림했던 겁니다. 원주민들은 일찍이 그런 걸 본 적이 없었어요. 그래서 아주 무서워했던 겁니다.”

급기야 말로는 자신의 눈으로 커츠가 즐겨 했던 살인의 제전을 목격한다. 그가 거처하는 캠프 앞 말뚝에 꽂혀 있는 것이 나무로 다듬은 덩어리가 아닌, 원주민들의 머리였던 것이다. 말로는 기둥 꼭대기에 꽂혀 뜨거운 햇볕 아래에서 이빨을 드러내고 있는 두개골을 보면서 지옥의 심연에 와 있는 느낌을 받았다. 이미 그의 영혼은 미쳐 있었던 것이다. 

영민한 능력을 소유하고 도덕적 이념도 갖춘 커츠는 오랫동안 식민지에서 수탈에 몰두하는 동안 정신적 타락을 겪게 된 것이었고, 그 결과 자신의 탐욕을 충족시키는 데 있어 자제력을 상실한 나머지 인격적으로 심각한 결함을 보이게 되기에 이른 것이다. ‘속이 텅 빈 인간’은 다름 아니라 바로 커츠이며, 소설의 표제인 Heart of Darkness가 가리키는 것도 결국 커츠의 타락한 심성을 말하는 것이다. “이 많은 상아가 사실 내 것이지요. 회사는 그 값을 치르지 않았어요. 내가 신병의 큰 위험을 무릅쓰며 손수 이 상아를 모았다구요. 하지만 회사에서는 마치 자기네 소유물인 것처럼 이 상아를 차지하려 하겠지요. 참 어렵게 되었군요. 내가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요? 항거할까요?…”

말로에 의해 구조되어 증기선에 오른 커츠는 자신이 저지른 죄악의 그 끝없는 깊이에 경악하여 “무서워라! 무서워라!”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말로에게 이 외침은 커츠가 자신의 타락을 인정하는 회한의 뉘우침으로 받아들여졌으며, 나아가 도덕적 이념을 상실한  유럽인들의 탐욕성과 만행 등이 빗어낸 오류를 인정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뿐만 아니라 커츠의 외침은 위선적이고 잔혹한 제국주의에 대한 혐오감과 고발인 것이다. 


제국주의 비판의 한계


제국주의의 상업적 목적과 관련해 보면 문명이라는 허울을 쓴 커츠의 야만적 행동은 저주와 비난을 받아 마땅하다. 커츠가 죽음의 순간에 자신의 과오를 뉘우쳤다고 하지만, 캠프 앞 말뚝에 장식처럼 꽂혀 있는 많은 해골들이 증언하듯 살인의 유희자로서 그는 잔인하고도 악의에 찬 파괴를 서슴지 않았던 인물이다. 작가 콘래드는 커츠를 통해 제국주의 정책이 인간을 철저히 비인간적인 모습으로 변형시켜 놓는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콘래드가 말로라는 화자를 내세워 제국주의를 철저히 비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으며, 이 작품이 반제국주의적인 작품임을 부인하기 어렵다. 하지만 커츠라는 인물에 대한 말로의 평가가 갖는 모호성은 과연 <암흑의 핵심>이 제국주의 문제를 본질적으로 비판하고 있는지 의구심을 갖게 한다.  

말로는 커츠의 광기에 가까운 타락을 도덕적으로 정당화하면서 커츠를 자신의 존재의 심연에 다다른 영웅으로 간주한다. 또한 문명화되지 못한 아프리카에서의 타락은 어느 정도 이해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처럼 커츠의 야만 행위를 아프리카라는 고립된 지역에서 있을 수 있는 한 개인의 타락으로 몰고 갈 때, 이 작품은 제국주의를 본질적으로 비판하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 말로는 커츠를 숭배하던 러시아 청년에게 커츠의 명성을 끝까지 지켜주겠다고 맹세하는가 하면, 커츠의 약혼녀에게 거짓말을 함으로써 커츠의 실체를 묻어버렸다. 

또한 <암흑의 핵심>은 아프리카를 배경으로 하지만 정작 아프리카 자체나 아프리카인은 다루어지고 있지 않은 백인 위주의 작품이며, 고립과 질병으로 인한 한 유럽인의 정신적 타락을 다룬 작품으로 아프리카인에 대한 작품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제국주의 문제를 식민지 내부에서 보는 시선은 존재하지 않으며, 식민지 지배자와 식민지인 간의 정치적 투쟁도 찾아볼 수 없다. 

게다가 화자 말로의 시선 역시 인종적 편견으로 가득 찬 것이었다. 흑인 원주민들을 알아들을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존재로 파악하고 있으며, 미지의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은 장소에 마치 괴물이라도 대하고 있는 듯한 말로의 목소리에는 깊은 인종적 편견이 배어 있는 것이다. 

콘라드가 살았던 세계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와 달랐다. 지금의 입장에서 보면 <암흑의 핵심>이  제국주의에 대한 보편적인 진실을 담아내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그는 그 시대를 대표하는 제국주의의 이념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오히려 거기에 내재한 불안감을 감지하고 제국주의의 진상을 문학 작품으로 형상화해낸 위대한 작가임에는 틀림없다. 

말로도, 콘래드도, 커츠도 19세기 후반에 살았던 인물이다. 제국주의는 이미 구시대의 산물이며, 문명과 야만의 대립도 전시대의 유물로 보이는 21세기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어떤가? 검은 대륙 아프리카도 그렇고, 남미를 비롯한 저개발국가의 현실을 둘러보면, 새로운 형태의 우월한 제국이 분명 어딘가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세계의 정복이라고 하는 것이 대부분 우리들과는 피부색이 다르고 우리보다 코가 약간 낮은 사람들을 상대로 자행하는 약탈행위가 아닌가. 그러므로 그 행위를 곰곰이 들여다보면 아름다운 것이 못된다구.”

말로의 이 말이 여전히 우리에게 의미 있게 다가오는 이유는 대체 뭐란 말인가.  


eurekaplus.co.kr |문의 02 558 1844

>>> 

조셉 콘래드(Joseph Conrad 1857~1924)

콘래드는 폴라드에서 태어났고 아버지는 독립에 헌신한 애국자였으며, 어머니는 교양 있고 감수성 예민한 여성이었는데, 유형지에서 콘래드가 아홉 살 때 짧은 생애를 마감하였다. 이후 극도로 나빠진 건강 때문에 아버지는 유형지에서 풀려나지만 얼마 후 사망, 야심이 크고 현실주의적 성향이 강한 외숙의 손에 자란다. 

열여섯 살에 선원이 되기 위해 프랑스 항구로 떠났고, 스무 살에는 영국의 상선을 타게 되었다. 그후 선원으로서 경력을 쌓으며 동남아, 아프리카 등지를 항해하면서 영어를 배웠고, 1886년 영국으로 귀화한 후, 항해와 작품활동을 함께 하기 시작했다. 대표작으로는 <암흑의 핵심><로드 짐><노스트로모> 등이 있다. 


지식검색2

벨기에 국왕 레오폴드 2세는 호화 생활로 재정을 탕진했고 이를 메우기 위해 콩고의 상아와 고무를 대대적으로 수탈했으며, 대리인들은 왕의 비호 아래 더 많은 상아와 고무를 거둬들이기 위해 원주민에게 대한 온갖 잔혹 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 콩고는 제국주의적 착취가 이뤄진 지역 중에서 가장 큰 이윤을 제공했던 곳이며 동시에 가장 악명이 높았던 곳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보이지 않는 순간, 인간의 정체성을 잃은 '투명인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