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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나 Aug 23. 2016

보이지 않는 순간,
인간의 정체성을 잃은 '투명인간'

20_웰스, <투명인간>

“너도 이제 내 처지가 얼마나 불리한가를 좀 알겠지.” 투명인간이 말했다. “내겐 몸을 피할 은신처도 몸을 가릴 옷도 없었어. 옷을 입으면, 나만이 가진 장점이 사라질 뿐 아니라 나는 이상하고 소름끼치는 괴물이 되어버리지. 그리고 나는 음식을 제대로 먹지도 못했어. 음식물을 먹는 것이, 그러니까 내 몸과 동화되지 않는 물질을 배 속에 채우는 짓이 나를 괴상하게 보이게 만들거든.”

과학적 지식에 대한 지칠 줄 모르는 열정을 지닌 젊은 과학자 그리핀은 마침내 자신을 ‘보이지 않는 존재’ 투명인간으로 만들었다. 그리핀은 투명인간이라 가능할 기상천외한 이점을 꿈꾸었지만, 정작 세상에 발을 내딛는 순간, ‘보이는 사람들’ 다수의 세계에 내던져진 ‘괴물’일 따름이었다. 인간의 밑바닥에 숨어 있는 은밀하고 사악한 본능을 들춰낸 ‘투명인간’. 고독하고 참혹한 그의 최후를 보며 자꾸 우리의 맨얼굴, 우리 인간사회의 맨얼굴을 돌아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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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의 기원>을 쓴 찰스 다윈의 동료이며, <멋진 신세계>의 작가 올더스 헉슬리의 할아버지였던 유명한 생물학자 토마스 헉슬리는, 과학적 지식에 상상력이라는 날개를 단 걸출한 작가 허버트 조지 웰스의 스승이다. 뭐, 이 사실이 그렇게 대단히 중요하냐 물으면 딱히 할 말은 없지만, 웰스라는 작가의 도드라진 탁월함과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이 스쳐서고, 그의 작품을 읽는 것만으로도 과거의 위대한 과학자들과 호흡을 함께 하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어서다. 아니, 그보다는 흔히 ‘SF 소설의 아버지’로 불리는 웰스가, 그 닉네임을 넘어서 얼마나 문학적으로 탁월한 작가이며, 과학적 지식에 기반해 세계사의 흐름을 간파한 깊이 있는 사상가인지 알아줬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존재, ‘투명인간’이, 보이는 사람들 속을 활보하고 다닌다는 이야기는 상상만으로도 충분히 기괴한 재미를 선사한다. 많은 사람들이 웰스의 <투명인간>을 굳이 펼쳐보지 않는 이유는, 완역에 앞서 동화책으로 너무 많이 소개되었고, 영화로, 만화로 알려진 탓이리라.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가 아는 것은 그것이 전부다. 보이지 않는다는 익명성에 숨어서 은밀하고 사악한 내밀한 본능을 여과 없이 드러내는 괴물 이야기. 사람들은 ‘투명인간’이 젊은 과학자 ‘그리핀’이었다는 사실에 주목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리핀이 왜 투명인간이 되었는지, ‘보이지 않는 존재’이기 이전에 한 인간이었던 ‘투명인간’이 막상 ‘보이지 않게 된’ 자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서도. 

<투명인간>은 우리가 짐작하는 것 이상으로 문제적 작품이다. 어찌 보면 대단히 심오할 것 없는 단순한 줄거리지만, 책 속으로 빠져들다 보면 크고 작은 물음에 부닥치게 된다. 젊은 물리학자 그리핀이 투명인간이 되는 과정을 보다보면 앎(과학적 진리)에 대한 인간의 지나친 추구가 몰고 온 파국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또한 ‘투명인간’으로서 그리핀이 겪은 고초들은 소수자에 대한 다수자의 매몰찬 횡포와 폭력도 연상시키고, 자신의 비밀을 숨김없이 털어놓은 대학시절의 친구 켄트 박사의 배신을 보면서는 과연 그의 행동이 정당했는지 묻게 된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강렬한 물음은 이것이다. 만일 당장 우리가 투명인간처럼 보이지 않음으로써 ‘멋대로 할 수 있는 자유’를 손에 넣게 된다면 과연 우리는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이 물음을 찬찬히 곱씹다보면, 우리 안에 ‘투명인간’의 은밀한 욕망과 동일한 것이 숨어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결국 투명인간 그리핀은 알몸인 채 허공 속으로 숨어들지만 사람들에게 발각돼 처참한 최후를 맞는다. 그리고 모든 이성적 물음보다 앞서는 것은, 소설 속으로 들어가 허공을 더듬고 있는 그의 한 손을 잡아주고 싶다는, 그의 춥고 상처 난 맨몸을 따뜻한 외투로 감싸안아주고 싶다는 연민이다. 


투명인간 그리핀, 정체성을 잃다

한 수상쩍은 사내의 출현으로 소설은 시작된다.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의문투성이의 사내. 우리는 그가 바로 ‘투명인간’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아이핑이라는 작은 시골마을에 그가 도착했을 때 누구도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아니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아는 것 역시 그가 투명인간이라는 사실 하나뿐이다. 그가 코치 앤 호시스 여관에 숙박했을 때 여관 여주인이 그의 이름을 물어보려고 할 때마다, 우리는 은연중에 그의 이름을 아는 것이 뭐가 중요할까 하는 생각이 스친다. 그가 누구건 ‘투명인간’이라는 사실만이 중요할 뿐이다.  

비밀과 의혹, 불가사의한 이 사내의 정체가 조금씩 드러나면서 마을에 소동이 인다. 하지만 소설 속 ‘투명인간’은 카리스마 넘치는, 위력적인 존재로 느껴지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이 괴물’이 보여주는 악행은 그동안 영화나 만화에서 보아온 ‘투명인간’의 이미지와는 동떨어진 것이다. 무소불위의 능력을 갖춘, 지독히 이기적이며 냉혹한 심장을 지닌 악마적이며 절대적인 존재라기보다는, 다수의 보이는 인간들에게 내몰려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악행을 할 수밖에 없는, 나약하고 참담한 존재일 뿐이다. 

보이는 사람들의 사냥감이 된 투명인간은 알몸에 상처 입은 채 켐프 박사의 집에 피신하게 된다. 하지만 놀랍게도 켐프 박사는 ‘투명인간’과 함께 대학을 다녔던 친구였고, 그제야 ‘투명인간’의 정체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켐프 박사와 함께 대학을 다녔던 젊은 과학도 그리핀. 키 180센티미터에 대학 때 화학상 메달을 수상하기도 했던, 색소결핍증 환자. 평범한 과학도 그리핀은 과학밀도에 관한 수수께끼에 사로잡혀 오로지 연구에만 몰두하다 자신도 투명해질 수 있다는 사실에 도달해 마침내 ‘보이지 않게’ 된다. 연구를 하는 동안에는 물론 투명인간에게만 가능한 놀라운 이점에 매혹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투명해진’ 그리핀이 맞닥뜨린 현실은 그의 생각과 전혀 다른 것이었다. 


“켐프, 나는 생각하면 할수록 투명인간이 얼마나 무력하고도 바보 같은 존재인지를 깨닫게 되더군. 춥고 사나운 기후와 사람들로 북적대는 문명화된 도시에서 말이야. 이 미친 실험을 하기 전까지만 해도 투명인간이 지닌 수많은 능력을 꿈꾸었지. 그날 오후 접어들자, 극도의 절망감이 엄습하더군. 나는 인간이 욕망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섰던 거야. 물론 투명성으로 인해 인간으로서는 얻을 수 없는 것들을 얻을 수 있었지. 하지만 그것들을 얻는 순간 그것들을 마음대로 향유할 수 없게 되었어.”


자신의 몸이 투명해진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제대로 모르고 세상에 던져진 그는, 세상에 나오자마자 금세 ‘춥고 지치고 고통스러운’ 참혹한 상태에 처한다. 그는 이제  그저 보이지 않게 된 한 인간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괴물’이 돼버린 것이다. 


“나는 너와 대학을 함께 다녔던 그리핀이야. 나는 투명인간이 되었어. 하지만 나는 보통인간과 다름없어. 그저 네가 알던 한 인간이 보이지 않게 된 거라고.” 


그리핀이 대학동창인 켄트에게 아무리 네가 알던 그리핀이 단지 보이지 않게 된 것뿐이라고 말해도, 켄트의 두려움을 사그라지게 하지 못한다. 켄트에게 그는 대학 때 알던 그리핀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괴물’일 따름인 것이다. 그는 보이지 않게 된 그 순간, 익명성이라는 자유를 얻었지만, 더 이상 그리핀일 수 없었던 것이다. 순진한 목동 기게스가 반지를 손에 넣은 순간, 평범한 목동으로 돌아갈 수 없었듯이. 그리하여 투명인간이 된 그 순간부터 정체성을 되찾기 위한 그리핀의 고된 투쟁이 시작된다. 투명인간이 된 그리핀의 바람은 단 하나다. 사람들의 눈을 피할 수 있는 안식처를 구해서 자신의 몸을 가려 추위를 면한 다음, 자신의 연구를 완성해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 하지만 그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못하고, 죽고 나서야 인간으로 되돌아올 수 있었다. 

켐프가 몸을 일으킬 수 있도록 사람들이 물러섰을 때 마침내 땅바닥에 쓰러진 벌거숭이의 처참한 몸뚱이가 드러났다. 온몸이 시퍼렇게 멍들고 골절상을 입은 몸뚱이는 서른 살가량 되어 보이는 젊은이였다. 머리카락과 수염이 하얀색이었다. 나이 탓에 샌 것이 아니라 색소 결핍증 때문인 듯했다. 그리고 그의 눈동자는 마치 석류석처럼 보였다. 양손을 꽉 쥔 채 두 눈을 동그랗게 뜬 그의 표정에는 분노와 절망이 깃들어 있었다.  


‘기게스의 반지’의 현대판 우화

웰스의 ‘투명인간’이 수많은 버전의 악마적 위력을 갖춘 다른 ‘투명인간’과 어떻게 다르든 간에, 모든 ‘투명인간’이 사람들을 매혹시키는 지점은 동일하다. 보이지 않음으로써 멋대로 할 수 있는 자유를 손에 넣는 것! 


나는 이루 말할 수 없이 기뻤어. 발소리를 내지 않고 걸으면서 스치는 소리조차 내지 않은 옷을 입은, 시력을 지닌 사람이 장님의 도시에 들어온 기분이었어. 나는 내가 가진 비상한 이점을 이용해서 사람들을 우롱하고 겁주고, 뒤통수를 갈기고, 모자를 빼앗아 던지고 싶은 강한 충동을 느꼈어. 그리고 보통은 한껏 즐기고 싶었어.


사실 투명인간에 대한 생각은 플라톤의 <국가>에 언급된 ‘기게스의 반지’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하데스의 모자’(하데스는 그리스어로 ‘보이지 않는 자’라는 뜻. 죽음의 세계를 지배하는 신 하데스는 모자를 쓰면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된다)처럼 아주 오래전부터 존재해왔었다. 그리고 여전히 놀라울 정도로 환상적인 코드다. 스산하고 음산한 마법학교 호그와트에서 숙적 볼드모트에 관한 실마리를 찾아나선 해리포터의 손에 들린 ‘투명망토’를 떠올려봐도,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게 몸을 숨길 수 있음으로 해서 생기는 무한대의 자유는 매혹, 그 자체다.


그렇다면 웰스의 ‘투명인간’ 역시 마법과 신화 혹은 그저 재미있고 기이한, 보이지 않는 존재에 대한 고만고만한 이야기의 한 유형일 뿐인가? 만일 그렇지 않다면 무엇이 어떻게 다른 것일까?

웰스의 ‘투명인간’은 마법과 신화의 옷을 벗고 ‘현실성’이라는 옷을 입고 있다. 그것은  투명인간을 가능하게 하는 과학적 논리를 예시하고 있기 때문은 아니다.(여기엔 피할 수 없는 과학적 허점도 있다)  그보다는 ‘기게스의 반지’의 현대판 우화로서 사람들의 은밀한 욕망을 그리고 있는 데다, 우리가 사는 사회가 여전히 ‘기게스의 반지’의 위력이 통하는 사회라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리디아의 왕을 섬기던 순박한 목동 기게스는 어느 날 우연히 신비한 반지를 손에 넣는다. 천둥 번개가 치던 날 지진으로 갈라진 구멍 속에서 청동말을 발견했는데, 청동말에 있는 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몸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는 거인의 시체가 나왔고, 그 거인의 손에서 반지 하나를 발견한다. 기게스가 반지를 껴보니 자신의 몸이 보이지 않게 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고, 투명인간이 되자 기게스는 몰래 왕궁에 숨어들어가 왕비를 유혹하고, 왕을 죽인 후 왕국을 차지한다. 플라톤은 기게스의 반지를 익명성 속에 숨어서 나쁜 짓을 할 수 있는 ‘은밀한 자유’의 상징으로 해석했다. 그리고 현대에 올수록 익명성 속에 몸을 감춘 ‘투명인간’들이 사이버 공간에서 활개치고 있다. 

잠시 상상해보자. 기게스의 반지든, 투명망토든, 도깨비감투든 손에 넣었다고 하자. 내 육체를 감쪽같이 사라지게 만든 다음, 세상을 활보하게 된다면 여러분은 무엇을 하고 싶은가? 

전지전능한 존재인 양 그리핀처럼 사람들을 우롱하고 겁주고 뒤통수를 갈기고 장난을 걸고 싶을 거다. 아니지, 그보다는 ‘돈’의 가치가 빛을 발하는 시대니 가장 먼저 은행으로 달려가 돈을 훔칠까? 시험지 정답을 알아내 1등을 해볼 수도 있고, 백화점으로 가서 몰래 갖고 싶었던 물건을 가져와 봐? 남몰래 어려운 처지의 사람을 돕는 상상을 하는 사람은 없으리라. 

그러고 보면, 자신의 과학적 탐구를 통해 ‘보이지 않는 능력’을 얻게 된 그리핀이 처음에 사악한 본능에 휘둘린 것은 특별히 그가 악한 품성을 지녀서는 아닌 것 같다. 투명인간이 된 그리핀의 이야기는, 우리가 이처럼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유를 얻게 되었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윤리적인 문제를 제기한다. 


투명인간과 보이는 인간 사이의 팽팽한 대립

소설 <투명인간>을 읽고 나니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된다 한들, 인간인 한 웬만큼 주도면밀하지 않고서는 제 맘대로 자유를 누리기가 수월해보이지 않는다. 웰스의 ‘투명인간’은 영화 ‘할로우맨 1,2’에 나오는 위력적인, 날렵한 투명인간과는 거리가 멀다. 그리핀은 투명인간이 되었지만 멋대로 할 수 있는 자유를 손에 넣은 것 같지 않다. 오히려 보이지 않기 때문에 자유에 더 많은 제한을 받는다. 보통의 인간처럼 보이려고 하지만 쉽게 허점이 노출되고, 사람들 속에 완벽하게 몸을 감추려면 벗고 다녀야 하는데, 투명인간이지만 보통의 사람이라 알몸일 때는 추위와 싸워야 한다.(소설 내내 투명인간 그리핀은 재채기 때문에 곤욕을 치른다) 또 먼지나 비에도 모습이 드러나고, 사람들이나 마차 같은 것에 부딪칠 위험에 항상 노출돼 있기 때문에 불안하다. 몸에 들어간 음식물을 소화되기 전에는 보이기 때문에 맘대로 먹을 수도 없다. 

보이지 않는다는 능력을 이용해 온갖 악행을 일삼는 존재라기보다, 그저 자신이 처한 곤경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는 가엾은 한 인간일 뿐이다. 그래서 소설을 읽다보면 투명인간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보이는 사람, 혹은 보이는 것들이 투명인간에게 가하는 위협이 더 크게 보일 지경이다. 게다가 그는 혼자다. 


“그놈은 나를 두려워했던 거야. 나를 두려워한다는 걸 알 수 있었지.” 투명인간은 몇 번이고 반복해서 말했다. ”그놈은 나를 속이고 달아날 작정이었던 거야. 언제나 달아날 궁리만 했던 거지! 정말 내가 바보였어!“


심부름꾼으로 삼았던 마블이 두려움에 떨다 달아난 것은 한편으로 이해할 법하다. 하지만 제대로 된 자유를 손에 넣지 못한 약점투성이 투명인간에게는 조력자가 꼭 필요하다. 조력자가 있어야만 그는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올 수 있다. 투명인간이 켄트 박사를 만날 때 독자들은 혹시나 하고 기대한다. 그의 도움으로 원래대로 되돌아올 수 있으려나. 

사실 그리핀이 완벽해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자유자재로 투명인간이 되었다가 원래대로 돌아왔다가 할 수 있는 ‘약’이다. 기게스는 반지를 끼고 벗는 것으로, 해리포터는 투명망토를, 하데스는 모자를 벗었다 입었다 하는 것으로 무한의 자유를 획득했지만, 웰스의 투명인간은 ‘보이지 않는’ 인간일 뿐이다.    

이 불완전한 투명인간은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하게 혼자다. 켄트 박사마저도 그의 존재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배신한다. 아직 투명인간으로서의 정체가 탄로나기 전에도, 이미 그는 아이핑 마을의 이방인이었다.  


그러나 그 이방인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든 간에 아이핑 사람들 모두가 그를 싫어한다는 사실만은 대체로 일치했다. 그의 과민한 성격은 도시의 정신노동자는 이해할 수 있는 것인지 몰라도 조용한 이곳 서섹스 마을 사람들에게는 놀랄 만한 것이었다. 


웰스가 투명인간이라는 존재를 통해 탁월하게 묘사한 것은 ‘보이지 않는 존재’에 대한 혐오감과 두려움, 그리고 그리핀의 ‘보이는 존재에 대한, 두려움을 동반한 미묘한 적대감’이다. 이에 대한 옮긴이 임종기가 쓴 ‘작품해설’은 상당히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우리는 사람들의 그리핀에 대한 반감과, 그리핀이 놓인 처지 및 그의 심리를 그가 선천적인 색소 결핍증 환자였을 수도 있다는 사실에서 암시적으로 알게 된다. 그는 애초에 자신을 괴물 보듯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 그리고 보인다는 것 자체 때문에 고통을 겪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래서 그는 아예 사람들의 시선에서 사라지는 길을 선택했을지도 모른다. … 그렇게 볼 때 투명인간은 단순히 사람들에 대한 가해자나 기게스의 반지를 손에 넣은 양치기가 아니라 오히려 소수자와 타자의 위치에 머무는 존재가 된다. 


우리가 켄트 박사라면 달랐을까?

그리핀이 투명인간이 되었을 때 그에게 가장 절박한 일은 인간의 행색을 하는 것이다. 정상적인 인간의 얼굴을 갖는 것. 하지만 그것은 너무도 지난한 일이었다. 백화점으로 숨어들어갔지만 실패했고, 결국 뒷골목에 있는, 연극 무대와 관련된 의상업자가 경영하는 상점에 숨어들어가 필요한 것을 구한다. 그 과정에서 그리핀은 어쩔 수 없이 주인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밧줄로 매단다. 하지만 그리핀의 이야기를 들은 켐프의 반응은 의외였다. 켐프는 강도짓이라며 그리핀을 비난한다. 이에 그리핀이 말한다.   


“강도짓이라니! 망할 자식! 다음엔 나를 도둑놈이라 부르겠군! 켐프, 넌 정말 어리석게도 낡은 끈에 이끌려 춤을 추는 꼭두각시인건가. 내 처지를 이해할 순 없는 거야?”


보여야 할 것이 보이지 않는 것이 주는 기이함. 이에 대한 사람들의 통념은 그리핀을 공포의 대상으로 만들어버렸다. ‘낡은 끈에 이끌려 춤추는 꼭두각시’인 켐프는, 일반적인 통념에 이끌려 세상으로부터 소외된 소수자를 벼랑 끝으로 몰아가는 다수자의 전형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켐프 박사였다면 어땠을까?

책을 다 읽은 후에 곰곰이 생각해보니, <투명인간>의 결말을 여러 버전으로 만들어볼 수 있을 것 같다. 처음에는 켐프 박사가 그의 조력자가 되어 그리핀의 본래 모습을 되찾게 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졌지만, 그렇게 간단히 해결될 일이 아니다. 이미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듯, 기게스의 반지와 같은 효력의 ‘약’을 만들게 된다면 더욱 공포스러운 일이 일어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그 과정에서 곤경에 처했던 그리핀이 오히려 선의를 가진 켐프 박사를 배신할 수도 있을 것이다. 

참으로 우리가 신뢰할 수 없는 것은 인간의 감추어진, 내밀한 욕망이란 생각이 든다. 

결국 투명인간 그리핀은 알몸인 채 허공 속으로 숨어들지만 사람들에게 발각돼 처참한 최후를 맞는다. 그리고 모든 이성적 물음보다 앞서는 것은, 소설 속으로 들어가 허공을 더듬고 있는 그의 한 손을 잡아주고 싶다는, 그의 춥고 상처난 맨몸을 따뜻한 외토루 감싸 안아주고 싶다는 연민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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웰스(Herbert George Wells, 1856~1946)

1866년 영국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가난한 집안 형편 때문에 정규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웰스는 상업학교에 잠시 다녔지만, 14세에 학교 공불흘 접고 여러 가지 직업을 전전하다 17세 때 미드허스트 그래머스쿨의 교육 실습생으로 일하면서 공부를 시작했다. 이후 생물학을 공부한 후, 교사로 취직하고 글을 쓰기 시작한다. 

자연과학적인 교양과 상상력을 결합, 과거와 미래를 오가는 시간여행에 대해 쓴 <타임머신>을 비롯, <모로 박사의 섬> <투명인가> <우주전쟁> 등을 발표, ‘과학소설의 아버지’로 추앙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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