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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나 Aug 12. 2016

<수레바퀴 아래서>
우리는 수레에 깔린 달팽이가 아냐

018_헤르만 헤세

“이건 날품팔이에 지나지 않아. 넌 네가 하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니잖니. 그저 선생님과 부모님이 두려운 거겠지. 아니, 1등을 하든 2등을 하든, 그게 도대체 너와 무슨 상관이란 말이니? 그래, 난 겨우 20등이야. 그렇다고 너희 공부벌레들보다 어리석진 않다구.”


주위 사람들의 기대와 관심을 한 몸에 받으며 신학교에 입학한 모범생 한스 기벤라트. 한스는 그곳 신학교에서 천재적인 반항아 하일너를 만난다. 위의 인용글은 하일너가 자신들을 둘러싸고 있는 권위적인 기성사회, 교육제도 등을 냉소적으로 비웃으며 하는 말이다. 

아니, 이 말을 100년 전의 젊은이가 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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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스 기벤라트라는 한 소년이 있었다. 한스는 주(州) 시험에 합격, 신학교에 입학한다. 하지만 신학교의 엄격한 생활과 박제가 돼버린 학문은 한스에게 충분한 자양분을 제공하지 못하고, 한스는 점점 학교의 질서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조용하고 내성적인 한스는 결국 신경쇠약에 걸려 학교에서 쫓겨나고 아무도 반기지 않는 고향으로 돌아와 달빛 고요한 강물에 빠져 쓸쓸한 죽음을 맞이한다. 

<수레바퀴 아래서>는 헤세가 1906년에 출간한 자전적 소설이다. 그리고 주인공 한스 기벤라트는 작가 헤르만 헤세의 분신이다. 헤세가 다닌 라틴어학교는 주정부시험에 합격하기 위한 예비학교였고, 그는 입시지옥으로 향하는 길 위에 놓이게 되었다. 헤세는 자신의 어린시절을 이렇게 회고했다.


“학교에 다니기 시작함으로써 나의 인간적인 사회생활이 시작되었다. 이곳에서 어린아이였던 한 존재가 세속의 모습을 갖게 되었고, 이곳에서 ‘현실적인’ 삶의 법칙과 척도가 효력을 발하게 되었고, 이곳에서 노력과 절망, 갈등과 의식, 불만족과 불화, 투쟁과 남을 위한 배려, 그리고 매일매일의 끝없는 쳇바퀴 같은 삶이 시작되었다.”


헤세는 한스처럼 마울브론 신학교에 입학한 후 도주했고, 고향에 돌아와 탑시계 공장에서 견습공으로 일했다. 지극히 엄격하고, 종교적이며, 경쟁적 지적 성과주의를 추구하는 마울브론 신학교는 헤세를 가두는 철창이었다. 한스 기벤라트가 신학교 생활에서 삶의 목적과 내용을 모두 앗아가버려 빈 껍데기만 남아 무기력 상태에 빠졌듯 헤세 역시 두통과 불면, 자책감과 무의욕에 시달려야 했다.  

고향으로 돌아온 한스와 헤세 모두 기계 견습공으로 일하는 장면까지 두 사람은 쌍둥이처럼 똑같은 길을 간다. 다른 점이 있다면 헤세에게는 한스에게 없는 두 가지가 있었다는 것. 한스가 “어머니 없이 엄격한 소년시절을 보내 사랑할 수 있는 기질을 잃고” 만 데 비해 헤세에게는 어머니가 있었다. 그리고 조용하고 섬세한 한스에게 외골수 같은 면이 많았던 반면에 헤세에게는 ‘혁명적인 반항아’ 하일너의 면모가  있었다(하일너의 풀네임은 헤르만 하일너다). 이 두 가지 다른 점이 헤세를 살렸다면, 한스는 구원받지 못했다.   

100년 전에 헤세가 그려낸 한스 기벤라트는 무슨 영문인지 지금의 청소년으로 환생한 듯하다. 한스는 자그마한 방에서 “피곤과 졸음, 두통과 싸우며 시저와 크세노폰, 문법과 사전, 그리고 수학숙제와 씨름하며 기나긴 저녁나절을 보냈”고, “그리스어와 라틴어, 문법과 문체론, 산수와 암기, 그리고 오랫동안 쉬지도 못한 채 쫓기는 듯이” 1년의 세월을 보냈다. 공부할 과목만 대체하면 100년 전의 한스가 아니라 입시라는 관문을 앞에 둔 평범한 한 고교생의 일과를 보는 듯하다. 

재능있는 젊은이 한스가 억압적인 주위 현실에 짓눌려 스러져 가는 모습을 그려낸 이 소설은 놀라울 정도로 지금 우리 청소년들이 겪고 있는 현실을 재현하고 있다. 왜 한스는 그렇게 힘겨운 파멸의 길을 걸어가야만 했나, 무엇 때문에 그는 ‘수레바퀴’ 아래서 신음해야 했나, 무엇이 젊은 영혼을 그다지도 옥죄고 짓눌렀는가. 여기, 이곳의 수많은 ‘한스’들 때문에 그 물음은 더 무겁고, 더 아프다. 


∨ 한스 기벤라트의 아주 쓸쓸한 최후

재능이 넘치는 한스 기벤라트는 마을 사람들의 총애를 받으며 마울브론 수도원의 초급 신학교에 당당히 입학한다. 이제 이곳에서 충실하게 학식을 쌓아나간다면 평생 주위의 경애를 받으며 평탄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 모범생 한스는 선량하고 온순한 학생의 자세로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조용히 걸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 한스는 운명처럼 헤르만 하일너를 만난다. 하일너는 시를 쓰는 공상가였고, 혁명적인 반항기를 지닌 아이였다. 


“예컨대 호머를 읽을 때 말야. 우린 오디세이를 마치 무슨 요리책처럼 대하지. 겨우 두 구절을 읽는 데 한 시간이나 걸리게 마련이야. 단어 하나하나를 낱낱이 되씹어보고, 찬찬히 음미하는 거라구. 하지만 결국에는 구역질이 날 정도로 지겨워지는 법이지. 그런데도 강의가 끝날 땐 언제나 되풀이해 떠들어대는 거야. ‘여러분은 이 시인이 그걸 얼마나 멋지게 표현했는지 잘 아셨을 거예요. 여기서 여러분은 시작(詩作)의 비밀을 들여다본 셈이지요.’ 하지만 그건 단지 우리가 질식하지 않게끔 불변화사나 부정과거형에다 양념을 친 것뿐이라구. 이런 식으로라면 난 호머에 관심없어. 도대체 이 낡아빠진 그리스의 잡동사니들이 내게 무슨 소용이 있다는 거야?”  


하일너가 학교와 인생에 던지는 가히 혁명적이라고 할 만한 과격한 이야기들은 한스에게 커다란 감명을 주었다.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이에 하일너의 생각들이 한스에게 전염되었다. 신학교 최고의 모범생 한스와 구제불능 문제아 하일너의 우정은 모두에게 불가사의해 보였는데도 점점 깊어져 갔다. 하일너와의 우정이 깊어갈수록 한스에게 학교는 점점 멀어져갔다. 새로운 행복감이 용솟음쳐 한스의 피와 사상을 꿰뚫고 퍼져나갔던 것이다.  

두 사람은 불안하게 우정을 지켜갔지만, 결코 우정이 그들을 구원해주지는 못했다. 하일너는 자신을 옥죄는 지긋지긋한 수도원을 뛰쳐나가 학교를 떠나버렸고, 더 이상 모범 학생도, 최우등학생도 아닌 한스는 극도의 무기력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무엇을 추구할 것인가. 한스는 아무런 희망도, 꿈도, 목표도 쥘 수 없었다. 옛 노력은 공허하기 이를 데 없었고, 새 희망을 쥐기에 한스는 여린 존재였다. 황금을 숭배하는 이해심 없는 아버지를, 자신에 대한 기대에 부풀러 있는 마을의 목사와 교장선생님을, 자신을 에워싼 모든 현실을 뚫고 나갈 힘이 그에게는 없었다. 신경쇠약 진단을 받은 한스는 마침내 학교를 떠난다.  

한때 고향에는 한스가 애타게 기다리던 일들이 있었다. 풀을 말리고, 토끼풀을 베고, 첫 낚시질을 나르고, 가재를 잡고, 불을 지펴 감자를 굽는 일 등. 그러나 한스에게 고향은 더 이상 둥지가 아니었다. 잠시잠깐 과즙을 따면서 만난 엠마와의 관계로 인해 눈부신 희망의 파도가 불안하게, 세차게, 달콤하게 굽이쳤지만, 사실 한스는 엠마의 노리갯감에 불과했다. 

그러다 한스는 또다시 자신의 수레를 끌지 못하고 타인의 손에 끌려가고 만다. 아버지가 사다준 푸른 작업복을 입고 견습공이 된 한스. 한스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노동의 찬가를 듣고 이해했지만 그뿐, 그것이 자신의 삶이 되지는 못했다. 직장 동료들과 가진 술자리에서 돌아오는 길. “저 멀리서 온갖 불행이 한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아버지와 한바탕 말다툼,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나 작업장에 출근해야 하는 일, 차츰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했”고, 한스의 불안한 걸음걸이는 결국 싸늘한 시체가 되어 검푸른 강물을 따라 골짜기 아래로 조용히 떠내려왔다.  


∨우리는 수레바퀴에 깔린 달팽이가 아니다

<수레바퀴 아래서>를 성장소설이라고 부르자니 비극적인 회한이 밀려온다. 헤세의 대표적인 성장소설 <데미안>과 유사한 점이 많지만 사뭇 다르다. 한스가 맞서 나가기에는 그를 옥죄는 가정과 학교의 종교적 전통, 고루하고 위선적인 권위의 힘이 숨 막힐 정도로 막강하다. 싱클레어는 데미안을 만남으로써 양지에서 뛰쳐나와 온 힘으로 세상과 맞닥뜨리며 또다른 ‘데미안’이 됨으로써 온전한 성장을 이루어냈다. <데미안>은 그 지난한 과정에 초점이 맞추어진 반면에  <수레바퀴 아래서>에서는 그들을 둘러싼 질서가 얼마나 견고한가를 묘사하는 데 더 많은 무게중심을 두었기 때문이다. 결국 한스는 수레바퀴 아래 깔려 최후를 맞는다. 수레바퀴에 깔린 달팽이가 되고 만 것이다. 그것은 과연 누구의 탓일까. 나약하게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을 돌파해내지 못한 한스의 탓일까. 죽음으로써밖에 토해내지 못한 한스의 항변에 아버지는, 어른들은 뭐라고 대답할 것인가.  

‘왜 나는 가장 감수성이 예민하고 상처받기 쉬운 소년 시절에 매일 밤늦게까지 공부를 해야 했나요? 왜 나에게서 토끼를 빼앗아버리고, 라틴어 학교에서 같이 공부하던 동료들로부터 멀어지게 한 거죠? 왜 낚시하러 가거나 시내를 거닐어보는 것조차 금지했어요? 왜 심신을 피곤하게 만들 뿐인 하찮은 명예심을 부추겨 나에게 공허한 이상을 심어준 거죠? 왜 시험이 끝난 뒤에도 응당 쉬어야 할 휴식조차 허락하지 않은 건가요?’

헤세는 한스의 죽음을 모호하게 그렸다. 한스는 길을 잃었던 것일까? 실족사를 했나? 아니면 스스로 평화로운 강물에 몸을 던진 것일까? 이 작품의 제목에서 느낄 수 있는 ‘수레바퀴’라는 상징적인 말이 한스의 죽음에 대한 열쇠다. 한스의 죽음은 한 주인공의 우연한 죽음이 아니다. 그는 기성세대와 교육제도와 아버지로 대표되는 권위적인 질서에 짓눌려 신음하는 모든 청소년들의 전형이다. 

무덤가에서 요제프 기벤라트 씨는 플라이크 아저씨에게 이렇게 말한다.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저 아이는 무척 재능이 뛰어난 아이였어요. 그리고 일도 모두 잘 풀려나갔지요. 학교며 시험이며…… 그러다 갑자기 한꺼번에 불행이 닥쳐온 겁니다.”

그러자 구둣방 아저씨는 묘지 문을 나서는 프록코트의 신사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걸어가는 신사양반들 말입니다. 저 사람들도 한스를 이 지경에 빠지도록 도와준 셈이지요.”

한스의 장례식에 모인 사람들, 교사와 교장선생과 목사는 한스에 대한 책임이 있다. 그들이 바로 한스를 짓누른 ‘수레바퀴’였던 것이다. 그들 중에서 가장 책임이 큰 사람은 물론 한스의 아버지다. 한스의 아버지는 최후의 순간에도 아들의 항변을 알아듣지 못했다. 그가 아들의 비극적인 종말을 기획하고 연출한 사람이라고 한다면 너무 극단적인 평가일까. 사실 언뜻 보면 한스의 아버지는 어떤 의미에서 그다지 강압적이어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한스의 죽음에 가장 큰 책임을 묻는 것이 일면 부당해 보이기도 한다.


∨한스의 아버지, 헤세의 아버지

한스의 아버지 요제프 기벤라트는 중개업과 대리업을 하는, 장사 수완이 좋은 성실한 사람이다. 하지만 "그의 내면생활은 속물적이었다.” 기벤라트 씨는 단 한 번도 아들이 장래 어떤 직업을 갖고 싶어하는지, 어떤 학교를 가야 하는지에 대해 아들의 의사를 존중하거나 그의 능력에 대해 조금도 생각해주지 않았다. 주 시험을 보고 돌아와 자신감이 없어진 한스가 시험에서 떨어지면 김나지움에 가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언뜻 내비쳤을 때 기벤라트 씨는 분을 이기지 못한 채 소리를 질렀다. “뭐라구? 김나지움이라구? 네 녀석이 김나지움에 가겠다구? 도대체 어느 놈이 네게 그런 짓을 일러주던?” 그때 한스의 얼굴에 스며들었던 두려움을 그의 아버지는 눈치챌 수 없었다. 이뿐이 아니었다. 병든 몸으로 돌아온 한스는 아버지의 따뜻한 사랑과 관심을 기대했지만, 아버지는 그를 다시 견습공으로 내몰았다. 

헤세 역시 아버지에 대해 극단적인 양가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아버지는 존경하고 싶은 이상형인 동시에 그로부터 도망치고 싶고 철저히 그 반대가 되고 싶은 저주의 대상이었다.  헤세의 아버지는 아들을 이해하기보다 어떠한 기준과 척도를 들이대며 아들을 몰아세운 비정한 아버지였다. 헤세가 육체와 정신 모두 폐인이 되어 돌아왔을 때 그의 아버지는 그런 아들을 일주일도 안 되어 다시 에스링겐의 한 서점원으로 보내는 비정함을 보였다. 그런 아버지에게 헤세는 독화살을 쏘아보냈다.


“나에 대한 당신의 관계는 점점 더 긴장되어 가는 것 같습니다. 내가 경건주의자이고 인간이 아니라면, 그리고 내가 지닌 모든 특성과 기질을 반대로 바꿔놓는다면 당신과 잘 하모니가 되리라고 믿습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결코 그렇게 살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내가 무슨 범죄를 저지른다면 누구보다도 우선, 헤세 씨, 당신이, 나에게서 삶의 기쁨을 빼앗아 간 당신이 책임이 있습니다.”


헤세는 청소년의 위기와 아버지와의 갈등을 온몸으로 부딪치며 자신의 길을 가기 시작했다. 자신이 감당하기 어려운 높은 수준의 학교교육과 아버지의 완고함이 그를 파멸시켰지만, 학교를 떠나고 아버지를 멀리하고 자신의 길을 가기 시작함으로써 건강한 인간으로 다시 태어났고, 마침내 아버지와도 화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한스는 어떤가. 아버지와 단 한번도 맞서지 못한 채 최후를 맞았다. 그리고 기벤라트 씨는 죽음으로써 토해낸 아들의 절절한 항변조차 듣지 못하였고, 따라서 영원히 화해하지 못했다. 만일 한스를 조금 더 이해하고 품어줄 수 있는 아버지였다면 한스는 다른 길을 새롭게 모색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한스는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한 채 가지가 잘리고, 마침내 뿌리마저 뽑힌 너무나 아까운 재목이었다. 


“줄기를 잘라낸 나무는 뿌리 근처에서 다시 새로운 싹이 움터 나온다. 이처럼 왕성한 시기에 병들어 상처입은 영혼 또한 꿈으로 가득 찬 봄날 같은 어린시절로 되돌아가기도 한다. 마치 거기서 새로운 희망을 찾아내어 끊어진 생명의 끈을 다시금 이을 수 있기라도 한 듯이. 뿌리에서 움튼 새싹은 하루가 다르게 무럭무럭 자라나지만, 그것은 단지 겉으로 보여지는 생명에 불과할 뿐, 결코 다시 나무가 되지는 않는다. 한스 기벤라트도 그랬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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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헤세(Hermann Hesse, 1877~1962)

독일의 소설가이며 시인. 아버지 요하네스는 신교 목사이고 모계 역시 유서 있는 신학자 가문이었다. 유년기를 거쳐 성장기의 행적은 작품 해설 속에 녹아 있는 대로 수차례 방황을 겪는다. 그러던 중 1895년 서점 점원으로 일하며 낭만주의 문학에 심취, 처녀시집 <낭만적인 노래>로 릴케의 인정을 답는다. 그후 그의 문학적 지위를 확고히해준 작품은 <페터 카멘친트>(1904)였고, 같은 해 9세 연상의 피아니스트 마리아 베르누이와 결혼하였다. 헤세가 걸러온 긴 생애에는 인도여행으로 동양에 대한 관심이 깊어진 일, 1차 세계대전 중에 극단적 애국주의에 동조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독일 문단으로부터 공격을 당한 일, 아버지의 죽음, 아내와 자신들의 연이은 정신병 등 가정적 위기를 당하였고, 이 위기를 정신분석 연구로 타개하였다. 2차 세계대전 때 나치의 폭정에 저항, 파란을 겪었지만 세상을 떠날 때까지 오로지 자기 실현의 길을 걸었다. 주요작품 <게르트루트>(1910), <크놀프>(1915), <데미안>(1919), <싯다르타>(1922), <황야의 늑대>(1927), <나르치스와 골드문트>(1930), <유리알 유희>(1943)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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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세, 융을 만나다

헤세가 심리학과 만난 것은 십대 때였다. 마울브론 신학교 시절 기숙사를 무단 이탈하여 6개월 만에 학업을 중단한 헤세는 4년에 걸쳐서 기도요법 치료를 받고 요양시설에 수용되기도 했다. 바트 볼에서 자살을 시도한 후 헤세는 슈테텐의 요양소에 수용되기도 했다. 당시 헤세의 문제는 엄격한 가정교육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이는 일종의 도덕적 결벽성, 또는 아버지와의 갈등이라고 할 수 있는데 소년시절에 그가 겪은 이러한 갈등은 <수레바퀴 아래서> 같은 초기 작품에 뚜렷하게 흔적을 남긴다. 

헤세는 1917년 9월 7일에 융을 처음 만났는데 강한 인상을 받았다. 일기에 헤세는 "그에 대한 나의 판단은 이러한 초기의 만남 동안에 여러 번 바뀌었는데 그의 강한 자의식은 어떨 때는 마음에 들기고 하고, 어떨 때는 그것이 내게 거부감을 주기도 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매우 좋은 인상을 주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흥미롭게도 헤세는 융을 만난 지 닷새 후인 9월12일에 꿈속에서 <데미안>의 등장인물들을 만났다고 한다. 헤세는 심리학을 통해서 개인적으로 정신적인 위기에서 벗어나는데 도움을 받았을 뿐 아니라 이후 작품 활동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1910년대 후반부터 1920년대에 걸쳐 즉 <데미안>, <동화 Maerchen>,<클링조어의 마지막 여름>과 <황야의 이리>를 집필하는 동안 헤세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것은 바로 융의 심리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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