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식민지과거사청산 #노아베
1939년 9월에 일어난 2차 세계대전은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사실상 끝이 났다.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인명을 살상한 전쟁이었다. 전쟁 후반기 독일과 일본의 패색敗色이 짙어가자 1945년 7월 11일 연합군 지도자들이 모인 포츠담 회담에서 일본의 무조건적 항복을 요구했지만 일본이 거부했다. 그러자 미국은 8월 6일 히로시마에, 8월 9일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됐다. 일반인을 학살한 최초의 원자폭탄이었다.
2차 대전의 승리를 거머쥔 것은 미국과 소련이었다. 미국이 원폭을 투하할 무렵인 8월 8일, 소련군은 소련 국경과 인접한 만주와 북조선의 국경을 넘어오며 공격을 개시했다. 통감부 기관지 <경성일보>에서는 ‘소련군 돌연 월경(越境)/ 불법공격을 개시’라는 기사를 톱으로 다뤘다. 이 기사에 따르면 일본 육군대신이 모든 장병에게 ‘풀을 먹고 흙을 깨물면서라도 싸워서 최악의 사태를 타개하자’는 최후의 명을 내렸다고 한다.
일본 천황 히로히토는 1945년 8월 14일 ‘종전조서’를 녹음했다. 녹음된 내용은 15일 정오에 라디오를 통해 공표됐다.(옥음방송) 그는, 전쟁을 끝내는 것을 승낙한다는 제3자적인 태도를 취했으며, 자신들의 침략으로 전쟁이 발발한 것에 대해선 입을 다물었다. 종전조서는 일본의 항복선언문에 해당하는 글인데도 어디에서도 ‘패전’이나 ‘항복’이라는 단어가 나오지 않는다. 가해 책임을 부정한 ‘종전’만 있을 뿐이다. 그 결과 전후 일본에서는 천황의 성스런 결단으로 전쟁을 끝낼 수 있었다는 신화가 만들어졌다. 히로히토는 수많은 아시아인과 일본인을 죽음으로 몰아간 전쟁 책임자였건만, 전쟁에서 국민을 구한 위대한 ‘평화주의자’로 둔갑했다. _일본 국립공문도서관 디지털 아카이브 발췌 정리
무려 34년 11개월 16일 동안 조선은 일제의 압제 아래 신음했다. 마침내 식민 지배를 벗어난 그날, 사람들은 만세를 불렀을까? 그날 거리의 표정은 어땠을까? 1945년 8월 15일 평균 기온은 27.2도였다니 지금과 비교해보면 선선했겠다.
하지만 바로 당일 날에 관한 자료를 보니 사람들은 해방된 사실도 대부분 알기 어려웠다고 한다. 우리 말 신문이라고는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하나였는데, 그 신문은 일본의 전세戰勢가 기울고 있다는 소식도, 마침내 백기를 들었단 사실도 제대로 보도하지 않았다고. 물론 항일 선각자, 민족의 지도자들은 알고 있었다고 하지만. 그렇게 해방은 소리 없이 왔고, 해방과 동시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더 기구한 조국의 운명도 가늠하지 못한 채 맞이하게 된다.
1945년 8월 초 일본의 패배는 확실시됐다. 당시 조선총독 아베 노부유키는 조선 내 일본인의 안전을 위해 자신들을 보호해줄 조선의 민족 지도자들과 접촉했다. 민족주의자 송진우가 그들의 요구를 거절하자 정무총감 엔도 류사쿠는 자신의 관저에서(서울 필동에 있는 한국의 집은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관저였다) 여운형을 만난다. 여운형은 이곳에서 총독부로부터 치안권과 행정권을 이양받았다. 몇 가지 조건을 협의하고 이를 수락한 이유는, 일본군이 철수하면서 마구잡이로 조선인을 학살하거나 일반인들 사이에서 친일파를 처단하는 사적 복수가 발생, 사회 분열과 혼란을 막기 위해서였다.
*여운형은 해방되기 1년 전인 1944년 8월에 지하 비밀독립운동 단체인 건국동맹을 모체로 건국준비위원회를 발족했다. 건준 위원장은 여운형, 부위원장은 안재홍이다.
8월 24일 일본 교토의 한 군항에서 우키시마호가 큰 굉음과 함께 두 동강이 난 채 침몰했다. 이 배에는 그리던 고국으로 돌아가려던 재일 조선인들로 가득 차 있었다. 당시 일본은 사망자가 500여 명이라고 밝혔을 뿐 탑승자 명단과 사고 경위도 공개하지 않았다. 그러나 2014년, 일본 외무성 기록으로 충격적인 진실이 드러났다. 1953년 일본의 문서에는 총 3735명이 타고 있다고 했는데, 사실은 총 8000여명에 이른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2016년에는 이 배에 폭발물이 실린 정황을 기록한 일본 방위청 문건이 발견되기도 했다. 이 참혹한 역사를 담은 영화 '우키시마호'가 2019년 9월 개봉, 관객들과 만날 예정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