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겨울, 부여나들이 ②
새벽 어둠 속을 달리면, 세상이 깨어나는 걸 실시간으로 보는 재미가 있다. 그날그날 풍경이 다르지만 어둠이 걷히는 과정을 슬로모션으로 즐긴달까. 청명한 날은 아니었다. 시원하게 뻗은 비스듬한 수평의 구름이 광활한 하늘에 근사한 그림을 그렸고, 해는 쭈뼛쭈뼛 등장했다.
게소에서 마시는 새벽 커피 역시 일품이다. 상쾌한 공기 입자가 커피 속으로 퐁당, 한결 맛있다. 저 멀리 해가 기지개를 켜는 모양이다. 하늘과 구름이 분홍빛으로, 옅은 보랏빛으로 물들고 있다. 하늘 위에 펼쳐진 구름과 햇살의 잔치를 구경하다 보니 어느새 부여에 닿았다. 오늘의 해돋이는 열정적이지 않군. 대신 부드럽고 편안하게 해가 떠올랐다.
부여는 낡은 앨범 안에 꽤 오래 자리잡고 있었다. 늦가을, 따순 볕을 찾아 반 아이들과 몰려 앉아 찍은 단체 사진 속에. 중학교 수학여행지였다. 사진은 추억을 담는 소중한 장치이지만 단점이 있다. 사진에 담긴 이외의 기억을 증발시키는 것 같다. 이십대 어느 날도 우르르 부여에 몰려온 기억이 있는데 긴가민가 하다. 눈으로 보고 있어도 제대로 볼 줄 모르는 시간들이 있는 법이지. 십대나 이십대 때는, 일상의 작은 진동에도 늘 예민해서였는지, 새로운 것을 구경하는 게 별로 중요하지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이제, 새로운 여행지에 대한 기대감이 봄눈처럼 올라온다.
부여에 들어서니 아침이다. 부여에 사는 T선배가 맛집 리스트를 보내줘 천군만마를 둔 장수의 기분이 났다. 하지만 작은 난관이 있다. 아침식사가 될지 알 수 없을뿐더러 초행길이라 동선을 가늠하기도 어려웠다. 그렇다고 일단 목적지에 가서 근처에서 요깃거리를 찾고 싶지는 않았다. 여행의 즐거움의 절반은 그곳에서만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아니던다. 사진보다 훨씬 강렬한 추억이 되는 게 음식이다. 리스트를 뚫어져라 보는데 ‘12가지 푸짐한 찬이 함께 올라온다는 고사리 특선육개장’이 제일 먼저 눈에 띄었다. 전화를 했더니 아쉽게도 아침식사는 안 된다는 대답이다. 첫 시도가 좌절돼 슬쩍 기가 꺾였지만, 다시 두 번째 전화를 걸었다. 언젠가 T선배 포스팅에 올라온, 비주얼 일품 올갱이국. 아침식사가 가능하다는 말에 환호성을 지를 뻔했다.
벌써 환하게 밝아온 아침. 날이 흐릴까 걱정이었는데 다행히 맑았다. 올갱이국이 앞에 턱 놓이자 아주 단순한 기쁨이 몰려왔다. 사실 언젠가 한번 뚝배기에 들어간 올갱이국을 먹은 적이 있긴 한데 그냥 별로였다. 비린 것도 같고, 시커멓고, 다시 먹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러나 이집의 올갱이국은 달랐다. 집에서 잘 담근 된장 풀고, 아욱을 가득 넣고, 국내산 올갱이가 빽빽이 올려졌다. 맑고 담백한 맛이다. 잘 끓인 아욱된장국에 소복하게 올라온 깔끔한 올갱이들. 줄줄이 오른 찬도 맛있었다.
날 선 추위는 조금 가셨지만 그래도 겨울. 새벽부터 서성거린 속을 푸근하고 정갈한 음식이 다독여 주니 행복한 기운이 살살 번졌다.
소화도 시킬 겸 동네 한 바퀴를 돌아본다. 마을 뒤로 작은 하천이 흐른다. 지금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과거의 어느 때는 마을 아낙들이 모여 빨래를 했을 성싶은 개천이다. 근처에 작은 버스터미널이 있는 걸로 봐서 과거에는 제법 영광의 한 시절이 있었을 듯싶다. 그러고 보니 동네에 그럴싸한, 쌍화차 제대로 내줄 것 같은 이름의 다방들이 즐비하다.
한번도 살아보지 못한 시골에서의 삶을 떠올려본다. 급하게 찾아올 어둠, 적막한 고요, 아무것도 자극할 것이 없는 동네, 그저 나무와 산과 들판과 밭 사이로 바람이 분주히 흘러다니는 곳에서의 삶은 어떨까. 속사정을 알 바 없는 여행자의 눈에는 그저 소박한 아름다움으로만 다가온다. 현실을 잘 모르니 하는 소리라는 것 정도는 안다.
백제는 역사적 조명에서 밀리는 감이 있다. 메가 히트를 친 역사 드라마를 봐도 조선은 말할 것도 없고, 고구려, 신라, 고려 골고루 속하는데 백제는 드라마 편수도 부족하고 대중의 이목을 받은 경우도 많지 않다. 부여, 하면 백제와 의자왕, 삼천궁녀, 낙화암이 떠오른다. 고대국가 백제는 기원전 18년부터 나당 연합군에 멸망한 660년까지 700여년의 역사를 이어왔는데, 후대의 뇌리에 남은 것은, 멸망의 순간, 그중에서도 낙화암과 삼천궁녀의 전설뿐이니 괜스레 안타깝다.
그리하여, 외지인이 대개 그렇듯 낙화암은 꼭 볼 계획이었다. 지금에야 전설로 전해올 뿐이지만, 수많은 여인들이 적군의 손에 치졸한 죽음을 맞느니 죽음으로 절개를 지키리라 마음먹고 바람처럼 그 강물에 몸을 던졌으리라. 백마강은 표표히 흐를 것이며, 그 위로 바람도 여전할 것이다. 낙화암의 정취가 궁금했다.
부여에서 낙화암을 찾기란 식은 죽 먹기려니 하고, 사전지식 없이 차에서 내렸는데, 발길을 어디로 향해야 할지 당황스러웠다. ‘낙화암을 가려면 부소산성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단순한 정보만 있으면 될 일이었지만, 내게는 부소산성은 너무나 낯설었다. 몇십 년 전에 왔을 때는 그저 작은 산길을 걸었던 것 같은데 말이다. 평평하고 너른 마당 위쪽으로 이런저런 옛 건물들이 서 있는 품새로 봐서 저기 어디쯤 대문으로 들어서면 될 성싶다.
그런데 뭐가 뭔지 몰라 두리번거리는 동안, 나는 부여의 다른 매력을 발견했다. 부소산성 쪽에서 부여 읍내가 바라다보였는데 그 기운이 고즈넉하고 평화로워서 말할 수 없이 좋았다. 나대는 기운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달까. 나지막한 산세를 병풍처럼 두른 부여 읍내는 적절하게 단장돼 있었다. 소박하고 평온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부소산성 앞마당의 평범한 집이랑 기념품을 파는 슈퍼를 사진기에 여러 컷 담았다. 관광지 특유의 섣부르게 들뜬 분위기가 나지 않아서 마음에 들었다.
드디어 낙화암을 향해 발길을 돌린다. 부소산성 매표소에서 표를 끊고 낙화암 가는 길을 물었다. 부소산성이 얼마만한 규모인지 모르겠는데다 하루 여행길이라 시간이 넉넉한 편도 아니기 때문이었다. 필요한 취재를 마치고 T선배에게도 가야 하고, 너무 늦기 전에 서울도 가야하는 조급함이 얹어진 탓이다. 날이 좋고 여유가 있으면 찬찬히 부소산성 곳곳을 둘러봐도 좋겠다는 생각이 나중에야 들었다.
1월의 끄트막의 평일이라 사람이 거의 없었다. 마스크를 훌훌 벗어도 될 만큼 혼자 걷는 구간이 많았다. 물론 멀지도 않았고. 잘 꾸며진 공원 같은 느낌도 났다. 조금 가다보니 유적 발굴 현장이 나온다. 공사현장 앞에 ‘백제역사유적지구’에 대한 푯말이 붙어 있어 유심히 읽고 지나갔다. 부여에 낙화암만 있는 게 아님을 새삼스레 각성했다.
낙화암 쪽으로 가까이갈수록 강바람이 더 세게 불어왔고, 그 바람에 나뭇가지 흔들리는 소리가 스스스하고 들려왔다. 제법 겨울바람다웠고, 약간 고독한 느낌도 났다. 드디어 낙화암 위에 섰다. 상상 속 피라미드와 현실의 피라미드가 다르듯, 낙화암도 그랬다. 울퉁불퉁 바위 위에 백화정이라는 정자가 있어 낙화암의 상징성을 높여주는 느낌이었다. 다들 알겠지만 낙화암 전설은, 660년 백제가 나당 연합군의 침공으로 함락될 때 3천명의 궁녀가 바위 위에서 몸을 던져 강물에 빠져 죽었다는 슬픈 사연이다. 백화정은 1929년 군수 홍한표가 궁녀들의 원혼을 기리기 위해 지었고, 절벽 아래에도 낙화암이라는 글씨를 새겨넣었다는데…. 솔직히 백화정은 그렇다치고 바위에 글을 새겨넣은 건 좀 별루다. 내가 바로 낙화암이야, 라고 굳이 말함으로써 전설의 격을 좀 낮춘 게 아닐까, 하는 건 순전히 내 개인적인 취향이긴 하다.
낙화암 전설과 관련된 역사적 추론들이 많은 듯하다. 자료를 찾다가 읽은 어떤 글의 한 대목에 조금 수긍이 갔다. 충남대 황인덕 교수의 주장에 따르면 현재의 낙화암은 지형적으로 설화의 주인공이 되기 힘들다며(계단식 지형이라 바위 정상에서 강물로 투신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 낙화암의 본래 위치가 현재 부여읍 중정리 옷바위 일대라는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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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역사유적지구百濟歷史遺跡
공주시, 부여군, 익산시에 있는 백제 관련 역사유적지구. 총 8개의 유적을 포함, 공주시에 2곳(공산성, 송산리 고분군), 부여군에 4곳(관북리 유적 과 부소산성, 능산리 고분군, 정림사지, 부여 나성), 익산시에 2곳(왕궁리 유적, 미륵사지)을 포함한다. 2015년 7월 독일 본에서 열린 제39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WHC)에서 세계유산 등재 심사를 최종 통과해 한국의 12번째 세계유산이 됐다.
세계유산위원회와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는 백제역사 유적이 한국·중국·일본 동아시아 삼국 고대 왕국의 교류의 역사를 잘 보여준다는 점, 백제의 내세관·종교·건축기술·예술미 등을 모두 포함하고 있는 백제 역사와 문화의 특출한 증거라는 점 등을 높이 평가했다. _위키백과 발췌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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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 위에서 백마강을 한참 바라본다. 한 국가의 마지막 시대를 맞이했다는 비감함이 절로 든다. 백마강은 금강의 하류 구간을 부르는 이름이니, 두 이름은 같은 셈이다.
백제는 수도를 세 번 이전 한다. 한강 유역에 위례성을 쌓고 건국한(기원전 18년) 백제는 475년 고구려에게 수도를 빼앗길 때까지 거의 500여년을 서울을 수도로 삼았다. 이때를 한성시대라고 한다. 하지만 아쉽게도 한강 유역의 유물유적들은 무식하고 무례한 개발시대를 맞아 그대로 지하에 묻혀버렸거나 함부로 취급돼서 오랫동안 한 국가의 수도로서 가졌을 위엄을 후세에 전하지 못했다. 이후 웅진(지금의 공주)으로 천도해서 채 100년을 채우지 못했고(웅진시대), 660년 나당연합군에 패배해 멸망할 때까지 사비(지금의 부여)는 백제의 마지막 수도였다.
흐르는 강물을 보니 지금이라는 이 시간도 언젠간 까마득한 과거의 역사가 될 거라는, 구태의연한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리의 삶도, 전체의 역사도 묵묵히 자연스레 흘러가고 있음을 문득 각성한다. 낙화암이 어디든, 목숨을 끊은 궁녀의 수가 백 명이든 수천 명이든, 흉악한 적군에게 죽느니 깨끗한 죽음을 맞으려 치마를 뒤집어 쓰고 백마강 깊은 물에 몸을 던졌을, 오래전 그 여인들을 떠올리며 잠시 묵념을 올렸다.
부여 여행을 돌아보니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낙화암 근처 고란사도 못 들르고 발길을 돌렸다. 부여읍내를 돌며 시장도 살펴보면 좋았을걸. 오층석탑으로 유명한 정림사지도 궁금하고, <철인왕후>의 촬영지 궁남지도 들르지 못해 섭섭하다. 부여 시내 곳곳에 부소산성, 낙화암, 궁남지, 국립부여박물관 등이 모두 모여 있으니 찬찬히 다 둘러보면 재미날 것 같다. 아무튼, 부여는 부드럽고 상냥한 느낌으로 내 마음에 남았다. 아쉬운 마음은 나중에 다시 와서 채울 작정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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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소산성
공주시, 백마강 남쪽 부소산을 감싸고 쌓은 산성으로 사비시대의 도성(都城)이다. 성이 위치한 산의 이름을 따서 부소산성이라 부른다. 웅진(지금의 공주)에서 사비(지금의 부여)로 수도를 옮기던 시기인 백제 성왕 16년(538)에 왕궁을 수호하기 위해 이중의 성벽을 쌓은 것으로 보인다.
성곽의 형식은 산봉우리를 중심으로 빙 둘러싼 테뫼식과 다시 그 주위를 감싸게 쌓은 포곡식이 혼합된 복합식 산성이다. 동·서·남문터가 남아 있으며, 북문터에는 금강으로 향하는 낮은 곳에 물을 빼는 수구가 있던 것으로 보인다.
성 안에는 군창터 및 백제 때 건물터와 영일루·사비루·고란사·낙화암 등이 있다. 성 안에 군창터와 건물터 등이 있는 것으로 보아, 유사시에는 군사적 목적으로 사용하고, 평상시에는 백마강과 부소산의 아름다운 경관을 이용하여 왕과 귀족들이 즐기던 곳으로 쓰인 듯하다. 이 산성은 사비시대의 중심 산성으로서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수도를 방어한 곳으로 역사적 의의가 있다. (출처 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