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올린과 학생회
멀리 집 밖에까지 나오셔서 손을 흔드시는데 난 그만 차를 돌리고 싶은 강한 충동을 느꼈다. 허연 백발노인에다가 다리는 살짝 불편하신 모습이 우리 아이 선생님으로 맡기기에는 너무 나이가 들어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도 손수 나와계신 모습을 봤으니 그냥 지나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길가에 차를 주차하고 10살 큰아이와 5살 여동생 그리고 내 배안에 아이까지 대식구가 오망졸망 내려 인사를 시키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단아한 싱글집이었는데 커다란 통창 너머로 초록잎이 흐드러지게 피어올라 이 장면은 마치 햇살 그림자가 너울거리며 춤을 추는 듯 음악의 세계로 들어간 첫 번째 기억의 단상이 되었다.
선생님은 조심스럽게 당신을 소개하셨다.
한국에서 서울대를 졸업하시고 교수를 하시다가 뜻이 있으셔서 존스 홉킨스 대학에 속해 있는 피바디 음대로 오셔서 30년 동안 아이들을 가르치시다가 얼마 전에 은퇴하셨다고 운을 띄우셨다. 그 안에 지금도 유명한 정경화를 어릴 때 사사하셨고 그녀가 쓰던 제일 작은 3/4 사이즈 바이올린도 가지고 계시다며 직접 보여주셨다.
한국에서 내로라하는 바이올린 리스트도 많이 사사하셨다는 말에 우리는 저절로 존경하는 마음이 들었고 이런 분에게 직접 배울 수 있다는 기대감에 부풀었다. 겉모습만으로 판단한 오만이 민망함으로 바뀌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특히 한국에서 할아버지 할머니 손에 길러졌던 아이는 친할아버지와 같은 푸근함을 느꼈는지 처음부터 선생님과 호흡이 잘 맞았다. 레슨비는 20여 년 전 가격으로 $100이었으니 꽤나 비싼 가격이었지만 그분의 실력과 경험의 가치는 돈의 잣대로 댈 수 없었다.
물론 처음엔 한국 선생님처럼 강하고 빠른 스타일이 아니라서 조금 답답함을 느꼈다. 진도를 빠르게 나가는 것도 아니고 아이에게 혼을 내시는 것도 아니고 일주일에 한 번 50분 레슨을 받는데 바이올린 소리보다 이야기하는 시간이 더 많은듯했고 진도는 너무 더디게 가 가는 듯했다. 한국 음악 학원처럼 매일 가서 레슨 받고 연습하는 시스템은 세계 어디에도 없을 듯하다.
정확한 음과 박자는 기본이고 거기에 음악을 이해하고 감정을 함께 느끼며 음악을 만들게 된 배경을 마음으로 공감하는 능력이 있어야 되는데 그 모든 것을 안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결국, 어떠한 분을 만나느냐가 중요한 일이다. 음악을 이해하고 소화해서 나만의 음악을 만든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 음악을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가슴을 울릴 수 있는지는 음악성을 어떻게 키우느냐에 달려있고 그 음악적 소질을 길러주기 위한 선생님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나는 그분을 통해 알게 되었다.
그분의 성함은 안 용구 선생님이시다.
더디다 생각되었던 배움의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도 아이의 실력은 날로 성장했다. 카운티에서 1번 자리에 오르더니 고등학교 때에는 미국 동부지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바이올린 주자로 오케스트라 자리에 앉게 되었다. 자리싸움은 치열하다. 자유곡과 지정곡 그리고 즉석에서 곡을 연주해야 하는 모든 과정을 거치는 어려운 길이다. 누구에게 사사를 받았는지도 중요하고 한음 한음 어떠한 감정의 무게로 연주를 하는지가 중요하다. 기계처럼 뻣뻣하게 감정의 기복 없이 하는 연주는 결코 좋은 점수를 받지 못한다.
이러한 활동이 대학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는 차차 이야기하겠지만 한 가지 활동을 오랫동안 꾸준한 노력으로 배움의 길을 가고 갔고 더 중요한 건 결과적으로 어떠한 곳에서 상을 받았고 그 배움을 어디 곳에서 봉사했느냐가 관건이다.
이곳은 6학년부터 중학생이고 9학년부터 12학년까지 4년이 고등학생이다. 미국에 온 첫해 초등학교 1학년부터 아이들과 잘 어울리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6학년(중학교 1학년)이 되어 학교 학생회에 들어간 아이는 어떤 아이와 함께 러닝메이트로 전교 부회장에 도전장을 냈다. 중학생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선배들이 쟁쟁했고 더군다나 회장으로 나온 아이는 장애를 가지고 있었다.
장애인과 동양 여자 아이 그리고 학교에서 제일 어린 학생 둘의 러닝 메이트는 큰 이슈가 되기에 충분했다.
다른 4팀의 러닝메이트를 보면 7, 8학년이 대부분이었고 모두 노란 미국 아이들이었기에 거의 승산이 없는 게임이었다. 하지만 아이들의 의지도 가상했고 무엇보다 그들의 열정이 대단해서 그저 지켜보면서도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선거일이 정해지자 선거인단 몇 명이 매일 집에 와서 전략을 세우는 모습이 사뭇 어른들이 선거를 치르는 것처럼 보여 나도 사뭇 진지한 모드로 아이들이 필요한 모든 것을 서포트해 주기로 했다. 필요한 각종 문구류를 준비하고 회장 엄마와 함께 피자와 음료를 나르기도 했다.
나름 학교의 발전을 위한 세심한 생각을 가지고 커다란 종이에 나열하고 구호를 만들어 연습하고 그들만의 티셔츠를 디자인해서 선거 운동할 때 제작된 옷을 입고 구호를 외쳤다. 그 모습에서 예전 한국에서 내가 겪었던 회장 선거를 위한 것들을 여기에서도 똑같이 재현되고 있음을 알았다. 지금의 한국 학생들도 이러한 선거를 통해 학생회가 운영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학년에 상관없이 누구나 도전할 수 있는 미국의 이러한 선거가 참으로 공평하고 민주주의의 초석은 역시 아이들 교육의 힘에서 출발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 누구도 결과를 예상하기 어려웠다. 중학생이 되면서 처음 겪는 일이고 더군다나 우리는 이민을 오고 미국 사회를 잘 모르는 상황이라 더욱 결과를 예측하기 어려웠다. 특히 회장으로 나온 아이는 우리나라로 말하면 왜소증이 있어 보통 아이들의 반만 한 키를 가지고 있는 아이였다. 그 누가 보아도 독특해 보이긴 하지만 학교를 대표해서 일을 잘할 수 있다고 보여지지 않는 그림이었다.
하지만 키만 작다 뿐이지 공부며 운동, 심지어 음악까지 못하는 게 없는 만능 재주꾼이었다. 거기에 아주 잘생긴 얼굴과 유머를 재치 있게 잘해서 인기가 많은 아이였고 우리 아이는 오히려 미국사람이 아닌 유색인종이기에 다른 후보와는 차별이 될 수 있다는 약간의 기대감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아이와 함께 떨리는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이민을 오고 어쩌면 첫 관문이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나도 모르게 있었는지 결과가 다가올수록 가슴이 쿵쾅쿵쾅 뛰기 시작했고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오후가 되자 전화 한 통이 울렸다.
따르릉...
"Hello?"
6화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