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ㅣ난쟁이로 태어나 중학교 회장이 되고 어린 나이에 꽃바람을 타고간.
어느 날부터인가 우리 큰아이가 '빈센트'라는 남자아이 이야기를 많이 했다
슬쩍 좋아하는 남자인가 물어보면 고개를 절레절레하고 그러면서도 틈만 나면 또 빈센트 이야기를 했다. 궁금하던 차였는데 프로젝트를 같이 하기로 했다며 빈센트 집에 데려다줄 수 있냐고 물었다. 난 당연히 'OK'를 했다. 이게 웬 떡이냐 싶었다. 이름도 멋지고... 그때 우리 아이가 6학년, 여기에선 중학교 1학년, 이제 막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생이 되어 사춘기에 접어드는 딸이나, 처음 사춘기를 대하는 딸을 둔 엄마나 그 어느 때보다도 남자 친구에 예민한 때였다.
한적한 동네였다. 자그마한 집들이 띄엄띄엄 잔디들 사이로 단정하게 놓여있고 오래되었지만 나름 깔끔하게 정리된 우리 동네 같은 분위기여서 푸근했다. 이곳은 한국과 위도가 정확히 같은 선상(38.5도)에 있어서인지 4계절이 정확히 일치할뿐더러 그날그날의 날씨마저 비슷하다. 개나리 피는 4월에는 한국과 같이 노랗고 작은 개나리가 첫봄을 알리고, 단풍 드는 한국의 10월에 여기에도 나뭇잎들이 울긋불긋 서글퍼진다. 나무들도 자그마하니 한국의 보랏빛 열매들처럼 여기저기 피기 시작하나 보다, 그런 감상에 언뜻 고향의 향기에 취할 때쯤 아니나 다를까 저 멀리 자그마한 정원에 호박 넝쿨이 눈에 보였다.
빈센트 집이었다. 초인종을 누르니 삽살개와 비슷하게 생긴 누런 강아지가 손님을 먼저 반기고 드디어 주인이 문을 여는데 먼저 내 눈에 들어온 건 엄마의 모습이었다. 어? 나랑 같은 얼굴을 한 한국 여자였다. 약간 곱슬한 머리를 하고 얼굴이 하얗고 살짝 주근깨가 있는 단아한 얼굴을 하고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생각지도 못한 동양 사람을 만나니 다른 건 둘째치고 너무나 반가웠다. 그리고 엄마 옆에 작은 꼬마가 나와 내 딸에게 반갑게 인사를 했다. 근데 작아도 너무 작다. 우리네로 말하면 난쟁이인데 키는 1미터쯤 되는데 얼굴은 이름에 걸맞게 인종이 섞여서인지 동양적인 까무잡잡한 피부에 눈코 입은 서양적인 요소를 다 가지고 있어서 잘생기기도 했지만 매력적이었다.
일단 집안으로 안내되어 들어갔다. 거실 중앙에 떡하니 자리 잡은 까만 자개장이 시선을 압도했다. 커다란 난이 쳐진 액자며, 8폭짜리 병풍이며, 하다못해 오래된 기다랗고 가는 곰방대까지 한국의 한옥에서나 볼 수 있는 고풍스럽고 멋스러운 장식들이 그곳에 전시되어 있었다. 알고 보니 그녀는 이민 2세대로 어릴 때 엄마 손을 잡고 온 그 시절의 향수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사는 진정한 한국인이었고 남편은 잘생긴 미국인으로 부지런하고 영특한 한국 여자와 메너 좋고 조용한 미국 남자가 만나 아들, 딸 낳아 그림같이 사는 가족이었다.
그런데 난 어쩔 수 없이 조그만 남자아이, 웃는 모습이 매력적인 빈센트에게 시선이 갈 수밖에 없었다. 극히 정상적인 부모에게서 그렇게 작은 아이가 태어났다는 게 안타까웠다. 동생 제니퍼는 오빠 빈센트보다 나이는 어린데 어느 아이들과 같이 정상적인 너무도 사랑스러운 아이여서 내 딴에는 다행스럽게 생각되었다. 빈센트는 바이올린도 잘해서 우리 아이와 같은 학교 오케스트라 멤버였고, 수영도 수준급으로 잘하고 공부도 잘하는 학교에서 리더십이 좋은 타의 모범이 되는 누구보다도 뛰어난 아이였다.
그날 이후에도 빈센트 이름이 오르락내리락하더니 둘이서 러닝메이트로 회장 선거에 출마한다고 선언했다. 한국과 달리 미국은 대통령 선거도 부통령을 미리 선임해 함께 선거를 하는데, 어린 학생들도 그 규칙대로 회장과 부회장이 합세해서 선거를 한다. 빈센트가 회장을 우리 아이가 부회장으로 선거가 시작되었다. 6, 7, 8학년이 중학생이므로 우리 아이들은 가장 어린것들이 출마를 하니 언니 오빠들이 잘 봐 줄리 없는데 빈센트의 인기가 워낙 좋아 승산이 있다고 나름 친구들이 부축였나 보다. 이제 막 중학생이 되었고 우리 아이는 동양 아이이고 빈센트는 미국과 한국이 섞인 더군다나 그들에 비해 키가 반밖에 안 되는 아이에게 과연 표를 줄까?
한 달 정도의 유세 기간이 시작되고 나와 빈센트 엄마는 틈나는 대로 집에서 포스터 만드는 거와 간식거리를 날랐다. 아이들을 도와주는 선거단이 꽤 모였다. 10여 명의 어린아이들은 서로 머리를 맞대고 학교발전에 뭐가 좋을지를 토론하고 공약을 만들어 나갔다. 아이들이라고 우습게 보았다간 큰 코 다치겠다 싶은 게, 아침 스쿨버스의 시간 조정에서부터 점심시간의 능동적인 시간 체크며, 학교에서의 아침방송에까지 하나하나 따지며 시정하고 싶은 요구사항들을 생각해내고 포스터에 삐툴빼툴 써 내려갔다. 선거 일주일 전에는 가장 먼저 학교에 도착해서 빨간 티에 매직으로 쓴 빈센트의 Vin과 00의 Min을 조합해 만든 ‘VinMin’ 티를 입고 ‘VinMin! VinMin!’을 외쳐댔다. 다른 4팀의 선거유세에 질세라 목청껏 말이다. 그런데 목청껏 소리 지르는 ‘vinmin’이 한국말의 억양으로 보면 빈민인데... 빈민? 그 아이들은 모를 것이다. 빈민이 가난한 사람들이라는 걸! ‘빈민! 빈민!’
드디어 선거날이 되었다. 내가 직접 가볼 수도 없고 그때는 아이들 각자에게 핸드폰도 없었을 때라, 그냥 집에 앉아 기다려야만 하니 마음만 조마조마했다. 빈센트 엄마도, 나도 둘 다 제일 큰아이들이니 얼마나 흥미로운지 아이들보다 우리가 더 재미있어하고 더 가슴 졸였다. 너무도 궁금하던 차에 학교에서 먼저 연락이 왔다. 우리 아이들이 이겼다고! 만세! 미국에 와서 제일 먼저 가슴 뿌듯하게 기뻤던 일이 뭐냐 묻는다면 바로 그날이다. 공부를 잘해서 1등 한 것도 아니고 바이올린 대회를 나가서 수상을 한날도 아닌 정정당당히 선거에 나가 당당히 전교 부회장이 된 그날이다.
미국에 입성한 지 5년 만의 일이었다. 물론 빈센트의 리더십이 가장 크게 작용했고, 학교에서는 가장 어린 학년의 아이들이었지만 선거인단의 조직력이 튼튼했고 뭐니 뭐니 해도 우리 아이가 빈센트와 친구들 사이의 원만한 관계 유지에 힘을 쓴 게 큰 몫을 했다. 아! 나와 빈센트 엄마의 줄기찬 라이드와 간식거리를 사 나르고 멋진 포스터 만드는 거에 일등공신임을 빠트릴 수는 없다. 우리는 서둘러 축하파티를 열었다. 우리 집에 모여 애들이 무조건 좋아하는 피자와 콜라와 함께 브라보!!!!
그렇게 행복한 중학교 생활이 시작되었다. 나도 덩달아 아이들과 함께 승리자가 된 거 마냥 한국에도 승전보를 울렸다. 생각보다 하는 일이 많았다. 일주일에 한 번씩 학생회를 주관하고, 농구대회를 열어 친목을 도모하는 기획도 하고, 부모들에게도 버리는 물건을 모아두게 해서 서로 필요한 사람과 교환하는 일도 하고, 안 입는 옷들과 깡통 캔을 지원받아 선생님과 연계해 정말 아프리카에 보내는 일까지 내가 기억하는 일만도 여러 개가 있을 정도로 많은 학생회 일을 했다. 하지만 7, 8학년의 시기 아닌 질투로 속상한 일도 많이 겪었고 한마디로 빈센트와 우리 아이의 사춘기 시절의 질풍노도가 시작되었음을 알렸고 무사히 한 학년을 마쳤다. 그다음 해부터는 오직 8학년만 회장에 출마할 수 있고 부회장은 6, 7학년이 러닝메이트로 해도 상관없다는 방침이 만들어진 건 그만큼 학생들 사이에서의 힘듦이 많았다는 증거였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가 거의 실신 상태가 되어왔다. 오자마자 티브이를 켰다. 기다란 외길에 헬리콥터가 떠 있고 커다란 트럭과 자동차가 부딪힌 사고 현장 장면이 실시간으로 중계되고 있었다. 이런 광경이 처음이라 티브이와 아이를 번갈아 가며 보는데 트럭에 거의 밟혀버린 자동차에 다름 아닌 빈센트 가족이 타고 있었던 것이다.
엄마가 운전을 했고 빈센트는 앞좌석에 제니퍼는 뒷 자석에 앉았는데 빈센트는 키가 작아 원래 뒷 자석 아기 시트에 앉은 다음 안전벨트를 맺어야 하는데 왜 앞 좌석에 앉았는지 알 길이 없지만, 암튼 앞에 앉았다가 반대편에서 달려오는 그냥 트럭도 아니고 트레일러를 줄줄이 달고 다니는 커다란 화물트럭에 정면충돌하고, 빈센트가 타고 있던 자동차가 트럭 밑으로 들어가 버리면서 빈센트는 그대로 튕겨 나가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두고 엄마는 의식불명이 되어 헬리콥터로 후송되고 있고 뒤에 타고 있던 딸만 무사하다는 뉴스가 계속해서 생중계되는데, 헬리콥터에서 촬영되는 모습은 기차가 선로를 잃어 휘어져 버린 것처럼 너무도 참담한 장면들로 보면서도 믿기지 않았다.
빈센트...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너무 가슴이 아린다. 미안하게도 그냥 정상적인 아이였다면 그렇게도 많은 친구들과 어른들이 가슴 저미는 아픔은 아니었을까 싶다. 너무도 작은 아이가 그렇게나 당당한 웃음으로 마치 정상적인 사람들에게 “저의 모습은 이렇게 작지만, 이렇게 행복해요. 당신들은 저보다 얼마나 행복하겠어요. 슬픔이 있을 때 저를 보세요. 저는 행복하답니다”라고 말하는 듯했었다. 내 마음이 이런데 빈센트 엄마는 마지막 눈을 어떤 마음으로 감았을까? 빈센트를 먼저 하늘로 보내고 한 일주일 정도 혼수상태로 있었을 때 난 마음속으로 기도했다.
“빈센트와 함께 떠나세요. 빈센트가 혼자 가기에는 너무 외롭고 불쌍하잖아요. 그리고 당신 또한 당신으로 인해 보냈다는 죄책감으로 살지 못할 거예요. 딸은 그래도 아빠가 있잖아요. 당신이 빈센트의 작음으로 얼마나 마음이 아팠어요. 그동안 힘들었으니 이제 하늘나라에서 빈센트와 편안하고 행복한 날들 보내세요. 수고했어요”
말할 것도 없이 우리 아이와 친구들의 충격은 매일 울음바다의 연속이었고 어른들은 그야말로 속수무책이었다. 장례식장에서 친구의 낭독은 그렇게도 찬란하게 살다가 떠난 샛별을 기리는 슬픔으로 빈센트의 처절하게 하얀 얼굴에 방울방울 떨어졌다. 빈센트의 얼굴을 새긴 동그란 배지를 만들어 한동안 가슴에 꽂고 다니고 졸업앨범에도 빈센트의 밝은 모습이 남겨져 있다. 그 뒤 몇 해는 기일마다 꽃다발을 들고 무덤에 가 슬픔을 애도했다. 딸과 함께 열심히 살고 있다는 아빠의 모습도 종종 우리 둘째 딸과 같은 학교이다 보니 듣게 되고 그렇게 한 해 한 해 잊혀 가고 있다.
빈센트의 배지가 아직도 아이방 커튼 모서리에 꽂혀 있다. 언뜻 밝게 웃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슬픈 미소를 지어본다. 나보다도 더 가슴 뿌듯하게 회장 되었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했을 빈센트의 엄마가 조그만 나라 한국 사람임을 잊지 않고 지금까지도 회자됨을 우리는 알고 있다. 장애아로 태어나 빈센트처럼 찬란한 이름을 남긴, 그렇게 짧은 생애를 마친 아이를 난 보지도 듣지도 못했다. 만약 미국이 아닌 장애인을 비정상적인 사람으로 생각하는 다른 나라에서 태어났다면 어땠을까? 우리 모두는 잠재적인 장애인이다. 나를 비롯 나의 가족, 나의 친구가 장애인이 될 수 있다. 그런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똑같은 대우로 살 수 있는 지금 이 나라에 감사를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