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ㅣ
이 말이 그렇게도 쇼킹한 말인지 글을 쓰기 전엔 몰랐고 생각지도 못한, 일반 사람들의 선입견이 있다는 걸 몰랐다. 왜일까? 처음 미국에 오고 얼마 안 된 이야기이다.
'미대 출신이 글을 쓴다'나 '솔비가 그림을 그린다'가 쇼킹한 말로 들리듯 이상한 말 때문에 시작된 사건이 내 주위에서 일어났다. 주변에 아이들 교육열로 꽤나 요란하게 도마 위에 오른 어떤 엄마가 있었다. 문제는 그 엄마가 이대를 나왔다 하고 이곳엔 이대 나온 여자가 워낙 많아 그런가 보다 했는데 이 엄마를 시기하는 친구가 있었으니.... 시기하는 엄마가 못된 소문을 퍼트리기 시작했다. 실은 이대가 아니라 그냥저냥 한 여대를 나왔는데 이대를 나왔다 뻥을 치고 다닌다고... 소문의 주인공은 이 말을 듣고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말로 심하게 다툰 뒤 두고 보자며 다들 모이는 자리에 이대 졸업장을 들고나갔더란다. 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광경인가?
이대 나온 게 얼마나 대단하고 또 얼마나 질투를 했으면 거짓이라 떠들고 또 그걸 기어이 증명한답시고 보란 듯이 졸업장을 가지고 나왔을까? 하지만 이런 일들이 똑같지는 않지만 너무도 비일비재하다는 거에 심각성이 있다. 김혜수가 어느 영화의 대사에서 '나 이대 나온 여자야!'라고 한마디 한 것이 유행처럼 번져 다른 말로 패러디된 말들이 지금도 돌아다니고 있는 걸 보면 우리 사회는 학벌에 대한 이상주의가 만연하고 지나친 학벌위주로 인한 대학의 서열도 무시 못하며 공부가 아니면 다른 모든 예술행위는 그 밑이라는 이상한 이론에 난 반기를 들고 싶다.
내가 이대를 나온 것도 아니고 이대 나온 여자를 시기하는 것도 아니지만 이곳에선 모두가 이대나 스카이를 나왔고 금송아지를 우리 안에 안 메어 놓고 미국에 온 사람이 없을 정도로 높은 학벌에 궁궐 같은 집에서 살다 온 사람들이 많으니 그 학교 졸업생들이 몽땅 미국으로 왔거나 한국의 내로라하는 사람들 모두 미국으로 건너왔다는 말인데 왜 그런 훌륭한 분들이 이리 힘든 일을 하며 이곳에 머무르는 걸까? 그들의 과거를 아는 사람이 없으니 막말 대잔치를 해도 아무도 모른다.
미대 출신 여자와 문과 출신 남자가 만나다
그럼 이대 나온 여자가 글을 쓴다면 누구나 수긍하려나? 미안하지만 이대가 아닌 미대 나온 여자가 글을 쓴다니 쇼킹하다는 말이다. 참나! 내가 글을 쓴다고 한지 얼마 되진 않았지만 나의 글을 읽고 가장 가까이에서 놀란 사람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바로 내 남편이다. 정확히 30년 전에 미대 출신과 문과 출신이 만났으니 문과 출신이 미대 출신의 뭐가 좋았을까?
첨부터 미대 다니는 여자는 화려해서 좋았다고 말함으로써 일단 공부나 머리 회전면에선 문과가 미대보다 낫고 대신 미적 감각면에선 미대가 뛰어남을 인정하고 만났나 보다. 그러면서 세월이 흐르고 아이를 기르면서도 그 처음의 생각은 변함이 없었고 나는 지식이나 정치, 경제적인 흐름에 뒷짐 지고 지켜보는 일이 다반사였다. 나의 집안살림에 대한 전폭적인 믿음을 준 남편은 가히 상을 줘야 할 정도로 통제 없는 교육방침과 생활에서의 제약을 두지 않는 자유로움으로 우리는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말없는 조건을 착실히 이행하며 지금까지 그럭저럭 조용히 살고 있었다.
문제제기를 한 건 내쪽이었다. 미대 출신이 미국에서 대학원을 가겠다고 GRE를 공부하고 부동산에 미용 전문자격증까지 아주 다양한 취미와 공부를 한다고 푸닥거리니 희한하다고 생각되었나 보다. 그러다 이번엔 글을 쓴다니 또 저러다 그만두겠지 했는데 하루에 A4 용지로 4,5장 되는 양의 에세이를 밤낮없이 쓰고 이젠 브런치에 공모를 한다고 하니 그냥이 아닌 정말 즐겁고 행복해하며 열심히 쓰고 있다는 걸 알았나 보다. '그러다 미대 출신이 작가 되겠네. 아마 굉장한 센세이션일 거야!'라고 한 말이 이 글을 쓰게 된 동기인데 솔직히 처음엔 놀리는 말이지 싶었다. 문과 출신이 보기에 미대 출신의 반란으로 보였나?
그 반응이 이상하다는 건 아니다. 다른 이상함을 얘기하려니 한참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한국의 경제가 마구 솟아오르려 날갯짓할 때 우리의 성공은 오로지 공부 잘해서 판 검사되고 의사 되고 그래, 판 검사 사위 맞고 의사 사위 맞으면 상류사회로 가는 지름길이지 싶었고 아직도 그 큰 틀에서 벗어나진 못했다. 지금도 사 자만 들어가면 널브러진 손들이 자동으로 모아지는 공손 모드로 바뀌니 대학이라는 문으로 진입하고자 애를 썼음은 당연하다. 사 자는 아니더라도 대학은 나와야 사람 구실 할 수 있는 사회가 돼버려 한국은 학력이 높은 나라로 세계를 통틀어 1위다.
대학의 수는 적고 가려는 자는 넘치고 넘치니 공부로는 경쟁이 안되고 특수하게 갈 수 있는 미술이나 음악 등 예술로의 진학이 더 쉬웠을 것이다. 더군다나 음악은 손가락 연습으로 익히는 학습이라 어릴 때 시작하지 않으면 어려워 힘들고 늦은 나이에 공부에서 급선회하며 대학을 갈 수 있는 가장 빠른 길이 바로 미술이었으리라. 공부머리가 안되면 미술로 전공을 바꾸어 눈치작전으로 대학에 들어간 이들이 많았다.
그때부터 인식이 굳혀져 버린 듯하다. 그전에는 오히려 음악을 하고자 하는 열망이 있는 학생들만 가는 곳이 음대였다. 미술에 미친 사람들만 가는 곳이 미대였기에 훌륭한 예술인들은 이들 학교를 졸업한 분들이 많다. 하지만 너도나도 교육열이 폭풍처럼 솟았던 7,80년대부터의 대학입시는 진정한 예술인들을 그저 대학 간판을 따기 위해 목숨 건 사람이다라는 인식으로 뿌리 박히게 된 것이다. 그들이 최대 피해자이고 나 또한 그들 중의 하나일 것이다.
미대에 가면 그림만 실컷 그리는 곳인 줄..
난 피아노를 하다 한 번의 실패로 다시는 손가락을 건반 위에 얹지 않았고 그 손으로 그토록 원했던 바게스에 붓을 빨고 이젤 위 흰 도화지에 목탄을 묻히는 미술학도가 되었다. 미대를 가면 그림만 붙들고 그림만 그리는 줄 알고 죽을힘을 다해 미대에 합격했는데 웬걸 1.2학년엔 교양과목과 영어 음... 윤리나 심리학 심지어 여성학도 필수 교양과목에 들어가니 언제 그림을 그리는지 도통 알 수 없는 대학 생활이었다. 내가 미대를 나왔지만 실제로 미술을 접한 건 단지 3.4학년 때였고 그나마도 반은 교양과목에 치중해야 했다. 왜냐면 전공과목과 교양과목의 크레딧이 같으므로 똑같은 양을 공부해야 하니 얼마나 어리석은 대학 생활인가?
그렇다면 국문과를 가면 글 쓰는 공부만 하는 걸까? 국문과 나온 사람들은 모두 작가가 되었는가? 베스트셀러 작가들은 모두 국문과 출신인가? 아니다. 글 쓰는 사람들의 대다수는 나처럼 비 국문과를 졸업하고 아니면 아예 대학을 가지 않고 나만의 방법으로 내 글을, 내 마음을 써 내려가는 사람이 대다수이다. 글을 쓰는 사람들은 어떠한 예술보다 창의적이야 한다. 음악은 천재적인 작곡가의 곡을 한음의 실수 없이 그대로 흉내를 내야 최고의 찬사를 받으며 최고의 위치에 갈 수 있고 미술은 사진처럼 똑같이 보고 그리는 예술 파트가 따로 있지만 글은 단 한 줄의 모방도 있을 수 없는 순수 100% 창작물이어야 한다. 모방이란 있을 수 없으니 작가들의 창의성은 그 어떤 예술보다 존경받아야 하고 오죽하면 노벨문학상이라는 세계적인 상을 마련해 두었을까?
노벨문학상은 고사하고 노벨 예술상은 못줄 망정 예술 집안을 보고 내 남편이 우스갯소리인지 진심인지 알 수 없으나 미대와 무용을 전공 한 우리 집을 딴따라 집안이라 지칭했을 때 그때는 그저 웃고 말았지만 이 사회의 우스운 시선으로 돌아보면 그보다 더 비약된 말이 어디 있을까? 분개하지 않을 수 없다. 딴따라는 예부터 예능인을 낮추어 말하는 말로 가장 낮은 범주에서 붙여진 이름인데 그런 말을 그저 미술을 한다고 예술을 전공한다고 해서 불릴 이름이 결코 아니다.
내가 만약 이대 미대를 나왔다면 상황이 달라졌을까? 내가 만약 미술 공부를 좀 더 해서 서울대나 이대를 목숨 걸고 들어갔다면 딴따라의 지위에서 높은 이름의 예술인으로 올라갔을까? 아니면 서울대 국문과를 나왔다면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을까? 모를 상황을 억지춘향으로 끼워맞힐수는 없지만 아직도 공부만이 제일이고 미술이나 예능은 공부가 아닌 사람들의 이류로 전락되는 이 사회의 시선이 바뀌어야 한다. 틀에 박힌 사고로 책 몇 개 외우고 시험을 잘 본다고 글을 잘 쓰는 건 결코 아닌데 말이다. 글은 미술이나 음악 같은 예술의 한 장르이고 종합예술의 결과물이다.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을 미술쟁이로 인정하고 음악을 잘하는 사람을 음악쟁이로 인정하고 똑같은 시선으로 공부를 잘하는 사람은 공부쟁이로 글을 쓰는 사람은 글쟁이로 불러 줄 때 누구나 그 자리에서 빛나며 진정한 행복을 추구할 수 있을 것이다. 공부에 재능이 있는 우리 딸들은 나를 부러워한다. 미술에 재능이 있는 나는 댄스를 잘하는 우리 아들을 부러워하고 댄스를 잘하는 우리 아들은 피아노를 잘 치는 친구 네이튼을 부러워한다.
미대 출신이 미스코리아다 아니면 미대 출신이 춤을 춘다 그것도 아니면 미대 출신이 노래를 한다고 하면 아무렇지 않게 수긍하고 그럴 수 있다고 생각되는데 왜 글은 쓰면 안 되는가?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사람에게 그리고 학력이 높은 사람에게 지식인이라는 호칭으로 대접해주고 대접받는다. 또한 글을 쓰는 작가에게는 지성인이라는 이름으로 한층 더 높게 쳐준다. 진정한 지식인이 어디 있으며 더 높은 지성인이 어디에 있을까? 이대를 나왔다고 말하는 이나 이대를 나왔을 리 없다고 말하는 이, 미대를 나와 그림을 그리든 작가가 되어 글을 쓰든 내가 좋아하고 내가 바르게 살면 모두가 지식인이고 모두가 지성인이 되는 것임을..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면 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