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다 나은 세상으로 발전하는 게 과거 숱한 억울한 죽음에 대한 역사적 복수"-황현산.
언젠가 한 학생이 수업 시간에 그 많은 억울한 죽음에 대한 복수는 누가 해주느냐고 묻더라. 아무도 해주는 사람이 없다. 다만 보다 나은 세상으로 가는 것, 어떤 역사적인 의식의 높이를 확보하는 것, 이런 것들이 복수가 되리라고 생각한다. 그래야 죽은 사람들이 덜 억울할 것 아닌가.
내가 살아온 동안 한국이라는 나라는 무수한 일들을 겪었다. 여러 정치제도를 실험했고, 많은 사람들이 감옥에 갇히거나 피 흘리며 죽어갔다. 그 모든 과정이 나의 역사주의적인 소신을 증명해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세상에는 젊은 나이에 죽음을 맞은 구의역의 수리공을 진실로 제 자식처럼 여기는 사람도 많고,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자신이 위선자가 아닌지 자문하는 사람도 많고, 그렇게 생각하지 못하는 자신을 부끄러워하는 사람도 많고, 비록 위선적일지라도 그 생각을 마음에 새기려고 애쓰는 사람도 많다. 그 많은 사람들은 제 생각을 버선목처럼 까 보일 수 없다. 그 사람들과 나향욱들은 끝내 만날 수 없다. 그것이 충격적이다. 거기에는 견해의 차이가 아니라 상상력의 차이가 있다.
구의역의 젊은 수리공을 제 자식처럼 여기거나 여기려 한 사람들과 나향욱들의 차이는 위선자와 정직한 자의 차이가 아니다. 그것은 어떤 종류의 상상력을 가진 사람들과 갖지 못한 사람들의 차이이며, 슬퍼할 줄도 기뻐할 줄도 아는 사람들과 가장 작은 감정까지 간접화된 사람들의 차이이다. 사이코패스를 다른 말로 정의할 수 있을까.
문학은 한 시대의 윤리적 인습에 굴복하거나 봉사하지 않기에, 그 윤리의 뿌리와 현재적 의의를 성찰하는 여유를 확보한다. 그래서 문학은 근본적으로 윤리적이며 생생하게 윤리적이다. 윤리적 탈선이 권력의 위계에 이른다면 거기에서는 윤리의 뿌리도 그 생생함도 찾을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진실이 아니라 학교교육의 코드를 알아차리는 ‘눈치’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학생의 생각이나 의문이 아니라 이미 정해져 있는 문제와 대답의 각본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토론식 수업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학생이 질문을 많이 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코드는 토론되는 것이 아니라 규정되는 것이고, 각본에는 질문이 끼어들 틈이 없다. 코드의 바탕 자체가 문제라는 이야기다. 잘못된 코드는 잘못된 그만큼 더 강압적이다. 삶의 진실과 따로 노는 코드는 결코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다.
나는 가난한 농촌과 도시 변두리에서 컸기 때문에 늘 그런 현실에서 탈출하려 애썼지만 시민으로서 그런 현실을 모른다는 것은 바보라 생각한다. 또한 동시에 그 현실에 붙들려서 아무 전망도 세우지 못하는 것 역시 우둔한 짓이다.
나는 정치·사회 현실에 무지하거나 무관심한 문인을 경멸한다. 그렇지만 나는 젊은 작가들에게 결코 직접적으로 정치적인 작품을 쓰지는 말라고 조언한다. 그 과정에서 그가 지닌 문학적 힘을 소진시키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 현실에서는 구체적으로 정치적이어야 하지만, 작품은 본질적으로 정치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본질적으로 정치적’이라 함은 인간 존재의 가장 밑바닥에서부터, 작지만 오래 영향을 주어서 인간 자체를 바꿔 놓는 것을 말한다. 문학의 역할이 바로 그런 것이다.
하루도 빼지 않고 자기 전 책상에 앉는 이유는 하루라도 책을 안 보면 일단 자기가 그걸 알고, 일주일을 안 보면 제자들이 알고, 그 이상 안 보면 세상 사람들이 알게 된다. 공부하는 사람이 하루라도 공부를 안 하면 그만큼 뒤처지고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글을 잘 쓰기 위해서는 마음을 비우고 써야 한다. 정직하게 써야 한다는 말이다. 사람들은 글을 쓸 때 애써 정직하지 않으려고 한다. 정직하게 쓰면 잘 쓰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