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환장 기안장과 물회 그리고 자기 발견
넷플릭스에서 하는 '대환장 기안장'이라는 프로그램이 있다. 기안 84가 상상한 건물을 실제로 제작하여 손님을 받는 숙박업에 대한 이야기다. 연예인과 숙박업에 대한 얘기는 TV에서 종종 나온 적이 있다. 효리네 민박 같은 거다. 그런데 '대환장 기안장'은 평범한 민박 얘기가 아니다.
일단 생긴 것부터 기괴하다. 어떻게 이렇게 만들었지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창의적이고 상상력이 풍부한 만화가 기안 84의 상상대로 만들어진 집이다. 울릉도 바다 한복판에 기안적 낭만이 가득한 기상천외한 집이 완성되었다. 잠깐 보면 놀이동산 같은 알록달록한 비주얼이다. 민박집이 바다 한가운데에 있으니 보트를 타고 들어가 체크인을 해야 한다. 생긴 것도 기묘한데 입구부터 신박하다.
(이미지 출처 : 네이버 이미지) 
(이미지 출처 : 네이버 이미지)입구에 문이 없다. 민박집 안으로 들어가려면 3.8m나 되는 높이의 암벽을 클라이밍 해야 입구로 들어갈 수가 있다. 클라이밍을 할 줄 아느냐 모르냐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경험이 있건 없건 여기에 온 숙박객은 다 올라가야만 건물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옆에 미끄럼틀도 있지만 미끄럼틀은 내려갈 때만 이용할 수 있다. 미끄럼틀은 분홍색과 노란색이 있는데 내려갈 때 색깔 구분을 잘해야 한다. 분홍색은 민박집 1층으로 가는 거고 노란색은 바닷속 수영장으로 바로 가는 거다. 잠이 덜 깬 상태로 잘못 미끄럼틀을 타면 아침부터 시원한 바다를 온몸으로 만끽할 수 있다.
자는 곳도 기이하다. 위에 사진 세 번째 사진에 누워있는 곳이 침대다. 취지는 좋다. 밖에서 별을 보고 잔잔한 파도 소리를 들으며 잘 수 있는 노천 침상. 해가 뜨면 눈부셔서 눈이 떠지는 자연산 모닝콜이 있고 비 오는 날엔 온전히 비를 맞아야 한다. 높은 곳에서 자다가 떨어질까 봐 안전벨트도 2개나 하고 잔다. 상상만으로도 오금이 저린다.
(이미지 출처 : 네이버 이미지)
이 집에 하이라이트는 바로 식당가는 길이다. 식당은 봉을 타고 내려와야 한다. 문제는 올라갈 때도 봉을 타고 올라가야 한다는 거다. 진짜 효율성 제로인 집이 아닐 수 없다. 그 외에도 밥은 손으로 먹기 등 숙박객들에게 진짜 평생 해볼 수 없는 경험들을 선사한다.
보면서 화면 속은 청춘이고 낭만이겠지만 현실은 장난 아니겠는데? 정말 불편하겠는데? 싶었다. 그러면서 나도 아들 둘이랑 신청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아마 표정관리 안되지 않았을까?^^;;) 총 9화인데 9화를 보며 출연진의 심리변화가 인상적이다. 기안 84와 BTS 진, 지예은. 이 세명의 조합도 신선한데 함께 고생하며 결국 적응하는 모습을 보인다. 누가 봐도 극기훈련 제대로 하고 있는데 힘들어하다가도 나중엔 해탈의 경지에 간 것 같은 모습에 점점 빠져들었다.
그렇게 프로그램 안에서 희로애락을 느끼며 재밌게 보고 있는데 정작 내 시선이 닿는 곳은 따로 있었다. 바로 '오징어 물회'였다. 출연진들이 가끔 식당에서 먹는 음식인 오징어 물회가 그렇게 맛있어 보일 수가 없었다. 내가 이렇게 물회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나? 싶을 정도로 그 메뉴가 나올 때마다 당장이라도 울릉도에 달려가고 싶었다. 동네에 오징어 물회를 검색해 봤지만 찾기 어렵다. 어렵게 찾더라도 바다 근처 식당에서 먹는 맛과 어떻게 똑같을 수가 있을까.
(이미지 출처 : 네이버 이미지)회가 거듭 될수록 '오징어 물회'에 대한 욕구도 커진다. 다른 물회라도 먹으면 되는데 맨날 발목 잡는 게 가족들이 좋아하는 메뉴가 아니라는 거다. 남편은 회를 좋아하지 않고 애들한테도 적극 권할 수 없는 메뉴이니 물회를 시켜 먹을 일이 없었다.
기호가 없이 가족의 입맛에 맞춰 살다가 내가 좋아하는 음식에 대한 욕구도 잃어버리고 살았다. 그런데 '오징어 물회'라는 음식이 내 욕구를 번뜩이게 하는 거다. 며칠을 계속 먹고 싶다고만 생각하다가 결국 먹기로 결심한다. 음식을 먹는 게 결심까지 필요한 일인가 싶지만. 나만을 위한 음식을 시킨 적이 없다 보니 결심도 필요하다. 그렇게 배달앱을 켜서 물회를 파는 가게를 찾았다. 물회가 보통 2인세트로 팔면 너무 많으려나 싶었는데 다행히 1인 물회도 판다. 최소 배달금액이 있으니 잔치국수와 컵떡볶이를 추가로 시켜 주문해 본다.
(이미지 출처 : 배달의 민족)오징어 물회는 아니지만 광어랑 멍게, 문어 등의 해산물이 가득하고 치커리와 양배추 등이 곁들여진 가게표 고성물회 1그릇. (아흐. 글을 쓰다 보니 지금도 한 그릇 먹고 싶다. 언제부터 이렇게 물회를 좋아했다고) 먹다 보니 생각난다. 맞다. 내가 비위가 좋았었지. 남편이랑 사귈 때 전복의 내장도 생으로 먹을 만큼 비위도 좋고 회도 잘 먹었던 사람이었지 라는 생각.
결혼해서 한 남자와 맞춰 살다 보니. 아들 두 명을 키우다 보니. 내가 좋아하는 기호를 잊어버리고 살았던 거 같다. 그렇게 물회 때문에 갑자기 뜬금없이 '자기 발견'을 하게 된다. 자기 발견이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좋아하고 원하는지 발견하는 과정이라고 한다.
그렇게 아주 맛나게 물회 한 그릇 먹고 나니 괜히 어른이 된 거 같다. '물회가 먹고 싶다.' '지체 없이 바로 사 먹는다.'로 이어지는 아주 간단한 의식의 흐름이 이게 뭐라고 그렇게 어려웠나 모르겠다. 자기 발견이 아니고 자기 존중인 건가? 내가 좋아하는 게 무엇인지도 잘 몰랐지만 좋아하는 걸 행동하는 용기와 나를 향한 존중도 필요한 거다.
갑자기 여행이 가고 싶어진다. 분주하게 살다 보니 여행도 끌리지 않고 쉬고만 싶었는데. 요즘 안정과 시간적인 여유가 생긴 탓도 있다. 그동안 남편의 외박을 여러 번 허락하며 받아낸 자유부인 포인트도 많이 쌓였는데 바빠서 못 갔다. 언제가 좋을지 생각하며 계속 미루고만 있었는데 날짜도 딱 떠오른다. 시부모님이 어머님 생신 맞아 여행을 길게 가신다는데 왠지 그중에 며칠 가면 좋을 거 같다. 연락이 잦은 시부모님께서 혹시 연락해서 알게 될 일이 없는 그런 날. (괜히 잘 살고 있는데 노는데 정신 팔린 며느리 되긴 싫으니까)
바로 남편에게 얘기를 했다. 여행을 떠나겠다고. 남편은 몇 번이나 자신을 여행가게 허락해 줬기에 알겠다고 한다. 그렇게 당장 비행기표를 예약한다. 숙소는 지인 찬스를 쓰고 여행 계획은 아무것도 안 세웠지만. 원래 여행의 시작은 여행을 준비하는 시작부터 이다.
가족들과 여행을 할 때도 남편의 기호와 두 아들이 좋아할 만한 곳들 위주로 계획을 짜다 보니 철저히 내 기호는 들어가지 않았다. 이번 여행은 나만을 위한 여행이니까 행복한 고민이 시작된다. 대문자 P형이라 무계획인 사람이지만 이번에는 시간을 알차게 보내고 싶어 동선과 계획을 좀 짜봐야지 싶다.
기안장을 보다가 오징어 물회를 먹고 싶어 하며 내 기호를 알게 되고 자기 존중을 생각하며 즉흥적인 여행을 계획하는 내 의식의 흐름. 어쩌면 기안 84의 즉흥적인 모습들이 나와 닮아서 그렇게 기안 84가 나오는 프로그램을 재밌게 봤나 보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그의 행동을 보며 대리만족을 느꼈나 보다. 때로는 인상이 찌푸려지는 행동들과 그의 급변한 생각의 변화와 자유로움이. 본능에 따라 행동하는 그의 주체성이 좋았던 거다.
40대에 첫 발을 디딘 지금. 내가 좋아하는 거 더 많이 찾아보고 많이 즐기며 다양한 경험 다채롭게 즐겨봐야겠다. 먹고 싶을 때 언제든 먹고 싶은 걸 먹는 즐거움을 만끽하면서. (물회! 꺄 ~)
